241화
“…하여 본래 에제인 왕자께서 말씀하셨던 길로는 가기 어려울 확률이 높습니다.”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아, 마침 왔군요.”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 지도에 표기된 건 그동안 서부에서 머물고 있던 펠레타 기사단에서 파악한 국경지대의 몬스터 발생 현황입니다.”
유더에게서 지도를 받아든 키시아르가 테이블 위에 펼쳐두었다. 모두가 그 지도에 표기된 붉은색 범위와 산발한 점들을 볼 수 있었다.
“어디의 지도인지 아시겠습니까.”
“네. 사라인 대삼림을 중심으로 맞닿아 있는 나라들의 국경 부근을 담았군요.”
“맞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국 서부이며, 이쪽이 듀번, 옆이 넬라른, 그 밑은 에릴, 그리고 히스누입니다.”
에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키시아르가 대삼림을 기준으로 붙어 있는 나라들을 하나씩 언급했다.
“예년에는 이 시기에 보통 제국 서부 국경 바깥쪽, 그러니까 사라인 대삼림의 북서부 끝에서나 조금씩 몬스터가 발생하고는 했습니다. 2달 정도 지난 시기가 되어야 국경 안쪽에서도 몬스터가 많이 발견되었지요. 그런데 이번은 예상보다도 훨씬 발생이 빠릅니다.”
긴 손가락이 붉게 표시된 범위들을 몇 번 빠르게 짚어나갔다.
“넬라른으로 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 부근에서도 이미 몬스터가 여럿 발생했습니다. 이 속도라면 길이 막히는 것도 시간 문제이고, 애초에 제국 서부 국경까지 몬스터들이 뒤덮여 거기까지 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
에제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넬라른의 국경 근처에서 몬스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피해가 꽤 커질 듯하다는 예상도……. 하지만 이렇게 삼림 안쪽에서 골고루 발생한 듯 보이는 건 처음인데, 확실한 정보이십니까?”
“펠레타 기사단은 그동안 제국 곳곳을 다니며 몬스터 퇴치 및 정보 수집 작업을 다년에 걸쳐 해 왔습니다. 관련한 정보력으로는 그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다 자신합니다. 그곳을 거쳐 온 상인과 기사단, 근처에 거주하는 이들을 여럿 만나며 만들어 낸 지도입니다.”
“…난감한 일이군요.”
에제인이 턱 아래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가능하다면 대삼림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만, 어려우시겠지요.”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에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황제 폐하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굳이 그 위험한 곳을 거쳐가려 한 이유는 현재 넬라른의 왕께서 앓고 계신 지병이 도져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접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지병 악화. 그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왕의 자리가 비는 순간부터 물밑에서 일어나던 왕위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리라는 이야기였다.
모두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 생각이 맞다는 듯 에제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께서는 분명 저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시겠다 약조하셨으나, 반대가 워낙 거세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하여 저는 이번에 오르 제국의 황제 폐하의 인정을 받아 자리를 공고히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목적은 이루었어도 돌아간 곳에 자리가 없다면 모든 일이 불가능으로 돌아가겠지요.”
넬라른 본국 내에는 에제인의 편이 없었다. 나머지 네 형제는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 온 에제인을 제일 먼저 배척하기 위해 손을 잡았고, 따로 도움을 줄 외척도 힘이 미미했다.
에제인의 가장 큰 아군은 그의 능력으로 그간 옆나라들과의 알력다툼에서 승리해 온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아 온 백성들과 아랫사람들이었다. 왕은 몇 년 전 스스로 골랐던 첫째 태자가 세상을 떠난 뒤 국정과 자식들 간의 다툼에서 눈을 떼었다. 그는 에제인이 스스로 다른 이들의 반발을 꺾을 수 있다면 자리를 주겠노라 말하였을 뿐, 크게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않았다.
에제인은 그래서 제국에 왔다.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 속국이었던 덕에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 오르 제국의 힘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빌려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자세하지는 않으나 대충 추측할 수는 있을 정도로만 간결히 설명한 뒤, 에제인은 지도에 표기된 붉은 점들을 찌푸린 얼굴로 가만히 보았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에 의하면 다른 형제들이 이미 다른 길은 막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왕께서 승하하기 전 제가 본국에 돌아갈 수 없도록 온갖 수단을 사용하겠지요.”
하지만 대삼림은 여러 나라와 얽혀 있어 완전히 길을 막을 수 없다. 에제인을 돕기 위해 넬라른 본국에서 나온 이들이 타국을 통해 이미 삼림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중간에 다른 나라의 국경을 따라 돌아가는 방법으로 삼림을 통과하려 했습니다만…….”
거기로 향하는 길에서조차 또다시 암살자들을 만났다. 에제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마음을 읽은 듯이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정보가 새고 있군요.”
“…….”
“그렇지 않다면 그리 급히 움직였는데도 기다렸다는 듯 목적지를 앞둔 장소에서 공격당할 리는 없다고 처음부터 짐작했습니다. 저희 측과 나누었던 연락조에는 중간에 정보가 흘러나간 흔적이 없었으니, 아마도 그쪽 내부에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겠지요.”
“아마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에제인 왕자가 키시아르의 말을 인정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시종들이 일제히 어깨를 흠칫 굳혔다.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 위로 감정을 읽기 힘든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
“어느 쪽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바깥쪽? 아니면 안쪽입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중에는 배신자가 없습니다!”
유더가 모르는 시종 한 사람이 몸을 떨며 외쳤다. 다른 시종들 또한 서로를 의구심 넘치는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
에제인은 말이 없었다. 무릎 위에 올린 손 사이에 입술을 가리고 지도를 내려다보는 젊은 왕자의 눈동자 사이로 어두운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유더는 어쩐지 그가 오는 내내 자신에게 시답잖은 인연 같은 부분을 떠들어 대며 마병단과 각성자에 대한 이야기만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고 느꼈다. 그는 현 상황을 구할 힘을, 그리고 제 곁에 있을 인재를 필요로 하는 중이었다.
‘목숨을 구원받아 다행이라 말하던 순간 왕자가 잠시 드러냈던 상처입은 내면은 단순히 스스로 몬스터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분함에서만 우러나온 게 아니라 이 부분까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던가.’
굳이 시종과 자리를 한 번 바꾸면서 본래 타려던 말을 타지 않았던 이유 또한 안전을 고려하여 나름대로 남의 눈을 가리려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새삼 등골이 서늘해졌다.
“죄송하지만 누가 저를 배신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제가 믿기에 데려온 이들입니다. 사신으로 따라온 많은 이들 중 마지막까지 곁에 남기기로 선택한 이들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는 단장님께서도 아시겠지요. 험난한 대삼림 내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에제인의 말에 시종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키시아르 또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 저희 쪽에서 다른 방법을 사용해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방법 말씀이십니까?”
에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키시아르가 손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한 사람을 가리켰다.
“칸나 완드.”
“네, 단장님.”
“가능하겠나?”
그는 유더에게 뒷일을 맡기겠다는 한 마디로 전투한 흔적을 지우라 명했던 때처럼 이번에도 정확한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든 뜻만은 모든 단원이 알 수 있었다.
“완벽한 장담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단장님이 원하신다면 반드시 작은 단서라도 찾아내겠습니다!”
지극히 작고 평범해 보이기만 하던 단발머리 여자에게서 흘러나온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에제인 왕자와 그의 시종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좋아.”
키시아르는 에제인 왕자의 시종들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부탁을 건넸다.
“시간이 오래 필요하지는 않을 거야. 그녀가 해 달라는 대로 잠시만 움직여줄 수 있겠나?”
“무… 무얼 하라는 겁니까?”
약간 겁을 집어먹은 표정을 지은 시종 한 사람이 반문했으나 칸나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답해주지 않았다.
“여러분의 몸에 오랫동안 닿아 있던 물건이 필요해요. 뭐가 좋을지 모르겠는데 추천 좀 해 주시겠어요?”
“왕자님.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희가 들어야 합니까?”
그러나 에제인 왕자는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답했다.
“모두 넬라른 왕궁에서 가져온 표식을 건네드려라. 잠시면 된다고 했으니 그것이면 충분하겠지.”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