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처음 보았을 때는 틈새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에 놀라 거기까지는 제대로 눈길이 가지 않았었는데, 로나와 대화를 하면서 다시 시선을 그쪽에 무심코 준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너무 짙고 어두워. 아까도 저랬었던가?’
그림자라는 것이 본래 어둡고 짙은 건 당연하겠지만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혹 균열의 징조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린 채 바라보고 있자 로나가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아일 님? 이제 보실 건 다 보신 듯한데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으세요?”
“…저 바위 틈새의 그림자, 뭔가 조금 이상해지지 않았습니까?”
“네?”
로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정확히 뭐가 이상하시다는 거죠? 원래 저랬던 것 같은데요.”
“…….”
뭐가 이상하느냐고 물어도 정확히 표현할 말이 없었으므로 유더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답을 기다리던 로나가 한숨을 내쉬며 유더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상한 균열과 관련된 문제로 생각보다 지나치게 신경을 쓰시고 계셨나 보군요. 오늘만 날은 아니에요. 내일 와서 한번 더 살펴보셔도 되니 지금은 그냥 돌아가죠.”
“내일도 오실 겁니까?”
“그럼요. 제가 멀쩡한 한은 계속 와서 확인할 거예요.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만은 절대로 훼손되게 둘 수 없어요.”
로나는 초소 안에 남아 있던 마법사들의 공동 일지를 챙기고 나서 다시 마력의 샘을 감싼 보호 마법진을 닫았다. 유더는 그녀가 갖은 애를 쓰며 마력을 움직이는 동안 점점 환상처럼 사라져 가는 마력의 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곳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진을 열고 닫아야만 합니까.”
“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나 몬스터에게 침범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중앙 제어진이 많이 훼손된 탓인지 이 진도 너무 약해졌어요. 어서 보수해야 하는데 여력이 될지… 걱정이네요.”
진을 닫은 뒤 로나는 자신이 모은 하루 어치의 마력이 거의 소진되었다고 말했다. 어릴 때 마법사가 된 뒤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수련했지만, 그녀처럼 진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어하는 마법사가 세상에는 몹시 흔했다.
‘마력 부족 현상.’
유더는 그동안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 문제에 대해 새삼스레 떠올려 보았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력을 볼 줄 아는 재능을 타고나야 하지만 그렇게 선별된 자들 속에서도 속성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소수였다. 그중에서도 위력적인 공격마법이나 방어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더욱 드물어, 그것이 가능한 이들은 평민 출신이라도 고위귀족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다. 약간의 마력만 있다면 내부에 새겨진 마법을 곧장 쓸 수 있는 마도구가 날이 갈수록 각광받는 이유였다.
전설 속 대마법사들이 일으켰다는 기적에 비해 현실의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마법의 위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전설이란 본래 현실을 부풀려 생성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들은 진심으로 그 간극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유더는 속성마법과 비슷한 힘을 보인 자신을 향해 질문을 퍼붓던 마법사들의 눈빛과 마력 감응 검사를 받아본 적 있느냐고 물으며 웃던 순간 로나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감정을 떠올렸다.
‘부러움… 혹은 질시.’
그것은 유더 아일이 이전 생에서 타인에게 가장 자주 받았던 감정이었기에 헷갈릴 수가 없었다. 마법과 각성자의 능력이 다른 힘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유더를 부러워했다.
로나는 이 연구를 통해 마력 부족 현상을 해결할 것이라 말했다. 만약 그 일이 정말로 이루어진다면 그들은 무엇을 얻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힘.’
이리 많은 이들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매달리는 연구의 최종 목적이 결국에는 힘으로 귀결한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힘을 원하는 인간이 어디까지 무모해질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등 뒤에 두고 온 마력의 샘 유적지를 한번 흘긋 돌아보았다.
‘역시 내가 아니라 키시아르가 여기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라면 제가 느끼는 이 묘한 기분의 정체도 잘 알았을 테고, 마력의 샘을 보면서도 훨씬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쉬워해도 결국 현실은 저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유더는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딱딱하고 동그란 세 개의 사탕이 안에서 부대끼는 감각이 느껴지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는 그것을 느리게 만지작대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적지가 멀어져 갔다.
***
로나와 유더는 돌아오는 내내 몬스터와 마주치지 않았다. 로나는 제가 보고 온 결과를 수장 미칼린에게 보고했고, 미칼린은 그녀의 뜻대로 하루에 한 번씩 유더와 동행하에 유적지와 그 주변을 살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유더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마법사들의 일을 도우며 나머지 하루를 보냈다. 그가 힘을 쓰는 모습을 구경하는 마법사들이 어제보다 더욱 많이 늘어났다. 대놓고 가까이 다가와 질문하는 마법사들에게서도 경계심이 전보다 훨씬 옅어진 상태였다.
대삼림의 하루는 다른 곳보다 일찍 저물었다. 울창한 나무 때문에 조금만 해가 기울어도 금세 밤처럼 어두워지기 일쑤였다. 마법사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유더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랫동안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숲속을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당장이라도 그 안으로 뛰쳐 들어가고 싶은 충동과 여기 남아 있어야 한다는 차가운 이성이 번갈아 찾아들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자가 점점 더 길게 늘어졌다. 결국 그것이 어둠과 동화되어 완전히 구분할 수 없게 된 뒤에야 유더는 손을 움직여 주머니 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들었다. 너무 오래 만지작거린 탓인지 조금 해진 종이 포장지를 열어 하나를 입에 넣고 나자 이전에 맛본 기억이 나는 단맛이 가득 퍼졌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무런 목적 없이 이렇게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본 건 그의 인생에 거의 없었던 일이었다.
유더는 머리를 저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은 그리 먹고 싶지 않았기에 넘기기로 했다. 오늘도 루산은 부상자들의 곁에서 잠을 잘 생각인지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혼자 남고 나니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때문인지 신경이 유난히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마치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영 미적지근하군.’
기분 탓이려니 싶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평소 침대 옆에 풀어두었던 검을 몸 바로 곁에 두고서 눈을 감았다.
곧 불쾌한 수마가 밀려들었다.
누군가 팔을 붙잡아 뒤로 거세게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꼬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절벽에 부딪혔다. 굉음과 함께 산 일부가 그대로 박살났고, 사방에서 들려온 비명이 귀를 찢었다. 짙은 피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똑바로 서 있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유더는 숨을 몰아쉬며 곁을 돌아보았다. 그의 팔을 붙잡아 순식간에 한참을 뒤로 날 듯이 뛰어 몬스터에게 맞지 않도록 도와준 이가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심해야지.’
‘…….’
언제 왔냐든가, 구해줘서 감사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상대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평소보다 훨씬 안색이 좋지 않은 키시아르가 유더의 팔을 놓고 전신을 한 번 짧게 훑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과 몬스터에게 스쳐 피를 본 복부에서 시선이 두세 번 멈추었다.
그가 그 상처들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 전 유더는 억지로 시선을 돌리며 부단장다운 질문을 했다.
‘저렇게 큰 몬스터는 처음 봅니다. 대체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군요.’
‘처음 목격된 곳은 대삼림 쪽.’
키시아르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때는 저렇게 크지 않았다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저 정도로 자랐다고 하더군.’
‘단시간 내에 저렇게 자랄 수도 있는 겁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몬스터는 아주 일부에 불과해. 저런 기이한 성장방식을 지닌 몬스터도 있을 수 있겠지.’
눈앞에 있는 저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얼굴에 묻어난 핏물이 문득 시선을 끌었다. 방금 전까지는 없던 상처였으니 아마도 유더를 끌어당기다 꼬리에 난 날카로운 가시 끝에 스친 듯했다.
작은 산 하나 정도쯤과 비교할 만큼 거대한 몬스터는 그때까지 마병단이 서부 토벌을 진행하며 만났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크고 강력했다. 곳곳에서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으나 무너진 돌더미가 너무 많아 위치 파악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재앙이다. 유더는 하늘을 진동시킬 만큼 울부짖는 몬스터를 올려다보며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이 멸망하려는 게 아니라면 저런 몬스터가 나타날 리 없었다. 아마도 여기서 후퇴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온 마병단 전원이 사망하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게 될 터였다.
직접적으로 통하지 않는 제 힘을 어떻게든 뽑아내어 산 하나를 무너뜨리면서까지 항전했지만, 몸이 부서져 죽은 줄 알았던 몬스터는 또다시 더욱 커진 채 거대한 울부짖음을 흩뿌리며 일어섰다. 이대로는 서부 전체의 지형이 바뀌어버릴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키시아르가 와 보았자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의 능력이 보기보다 강하다는 점은 인정했으나 저리 거대한 놈은 키시아르라 해도 타격을 주기 어려울 터였다.
지금 후퇴해도 늦겠지만, 그래도 귀하신 황족이 이런 곳에서 죽으면 더 큰 문제가 될 터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이 욕을 먹는 인생인데 하나 더해진다고 뭐가 나아질까마는…….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 단장님께서는 먼저 몸을 피하시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이제야 왔는데, 벌써 돌아가라는 뜻인가?’
‘그렇다고 여기서 죽으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튼 제가 시간을 끌 테니 다른 단원들을 이끌고 후퇴하시죠.’
당연히 수긍하리라 생각했으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유더는 저를 보는 키시아르의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드문 감정을 읽고 조금 놀랐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뒤로 물러서기 위해서가 아니다.’
목소리 속에서 차가운 불꽃이 느껴졌다.
‘너야말로 뒤로 물러나라, 유더 아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