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너야말로 뒤로 물러나라, 유더 아일.’
대답을 듣기도 전에 먼저 앞으로 나아가는 키시아르의 뒷모습을 보며, 유더의 눈가가 의문과 날카로움을 담아 움찔 떨렸다. 그 순간 그는 문득 이 상황이 모두 과거의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 그랬다. 이건 서부 몬스터 토벌 때 치른 엄청난 전투 중에서도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날의 기억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무너진 산에 깔리면 어쩔 수 없이 죽어버리던 보통 몬스터와 달리, 특이하게도 공격을 받을 때마다 점점 더 거대해지던 몬스터가 하나 있었다.
훗날 악마의 이름을 따 페투아멧이란 이름이 붙은 그놈을 죽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했다. 유더 역시 놈을 죽이려 엄청난 힘을 썼고 산 하나를 거의 무너뜨리기까지 했지만 몬스터는 그곳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몸집을 더욱 불렸다.
그대로라면 두 번째로 임무에 실패하거나 혹은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눈앞의 풍경처럼 키시아르가 나타났다.
그는 단신이었다. 얼룩으로 더러워진 흰 단장제복도, 검 하나 들지 않고 긴 장갑만 착용한 양손도 무엇 하나 무방비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듣는 이를 기절하게 만드는 괴성 앞에서도 그저 홀로 꼿꼿했다.
꿈속의 유더 아일은 금방이라도 힘을 쓸 수 있도록 주먹을 쥔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더는 키시아르라 해도 그 몬스터를 홀로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짐작했다. 그간 그가 힘을 써서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대부분 뒤로 물러나 지휘하는 모습만을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키시아르가 직접 처리한 몬스터들도 상황이 긴급할 때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처리했다는 느낌이었을 뿐, 그리 대단하거나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저날부터였을 것이다. 무기 하나 없이 거침없는 걸음으로 거대한 몬스터의 앞으로 나아가던 저 키시아르가 일으킨 일들을 보고 난 이후부터, 유더는 자신이 그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지 않게 되었다.
‘…….’
별다른 준비 동작도 없이 손을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 공기를 찢는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발 하나가 지탱하던 무게를 잃고 휘청대던 몬스터가 기어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자 또다시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먼지구름이 시야를 뒤덮었다.
뿌연 돌먼지 사이로 키시아르까지 함께 삼켜진 줄 알고 유더가 막 뛰어가려던 순간, 흰 그림자가 위로 훌쩍 날아오르며 잠시 윤곽을 드러냈다. 펄럭이는 흰 옷자락 사이로 싸늘한 붉은 시선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마치 경전의 한 페이지나 될 법한 엄청난 전투가 일어났다.
몬스터는 감히 자신을 공격하려 드는 작은 인간을 향해 있는 힘껏 분노의 괴성을 내질렀다. 보랏빛으로 부풀어 오른 몸에서 흘러나오는 새카만 체액이 연기 사이로 퍼질 때마다 그것이 닿은 땅이 삭고 바위가 녹았다. 가시가 박힌 꼬리와 네 발에 달린 긴 발톱은 단단한 바위산도 마치 무른 땅을 파내는 두더지처럼 손쉽게 무너뜨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이가 대다수였던 그 모습에도 키시아르는 아랑곳없이 홀로 항전했다. 그날 그곳에 있었던 마병단원들은 키시아르의 움직임을 거의 제대로 파악하지조차 못했다. 경험이 부족하여 힘과 전세를 파악하는 눈이 지금만큼 좋지 않았던 젊은 유더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잔상만 남은 채 뒤엉켜 싸우는 속도가 너무 빨라 누구도 그를 함부로 지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꿈속이기 때문일까. 유더는 어쩐지 키시아르의 움직임을 제 기억보다 조금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공격을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놀라운 속도로 피했고, 너무나 단순한 타격만으로도 몬스터의 단단한 몸을 찌그러트리거나 혹은 달라붙듯이 농락하여 휘청이게 만들었다. 그 속도와 힘이 너무나 무자비해 마치 몸이 닿기도 전에 몬스터의 몸을 마음대로 끌어당겼다 밀어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휘두르고, 차고, 손을 내지르는 건 체술의 기본이 되는 동작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처럼 가볍고 무거우며 절제되었으나 또한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했을 터였다.
여기 있었던가 하면 발을 굴러 다른 곳에서 몸을 내밀고, 그런가 하면 눈 깜빡할 사이에 어느새 위로 뛰어올라 아래를 향해 쏜살같이 떨어져 내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을 이기지 못한 몬스터의 육체가 갈갈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몸 이곳저곳이 불룩거리며 더욱 부풀어오르기는 했으나 재생하는 시간보다 키시아르의 공격이 더 빨랐다. 키시아르의 몸에 걸친 옷 또한 점차 엉망이 되었지만 그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제 안위조차 잊고 그 광경에 넋을 잃었다.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키시아르가 내보이는 힘 속에는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강함이 있었다. 무기도 없이 야만적으로 달라붙어 싸우는데도 그가 그리는 궤적은 놀랄 만큼 우아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경하고 매혹되어 시선을 빼앗길 만한,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런 힘이 있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 전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했다. 키시아르에게 잔뜩 얻어맞고 눈이 돌아간 몬스터가 결국 주변을 돌보지 않고 그를 쫓게 되자, 키시아르는 유더가 일찍이 이미 무너뜨려 놓았던 절벽을 향해 놈을 유인했다.
‘소용없습니다! 이미 거기서 떨어트려 보았음에도 두 배로 커져 기어 올라온 놈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키시아르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멀어져 갔다. 유더는 사지가 반쯤 잘린 몸으로도 무시무시한 집념을 발휘해 바닥을 기며 그를 뒤쫓는 몬스터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어딘가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마병단원들을 향해 거세게 외쳤다.
‘움직일 틈은 지금뿐이다. 어서 후퇴해!’
그리고 그는 키시아르와 몬스터가 향한 방향으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무너진 숲 너머로 괴성을 지르며 나아가는 몬스터와 계속해서 놈을 유인하며 시선을 끄는 흰 그림자가 보였다.
‘대체 혼자서 무슨…….’
좀 더 빨리 나아가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배에서 어느덧 축축하게 새어 나온 피 때문이었다. 유더는 이를 악물고 바람의 힘을 불러냈다. 그것을 밟고 크게 도약하자 무너진 돌더미와 부서진 나무와 뒤섞인 토사도 금세 등 뒤로 훌쩍 멀어졌다.
‘젠장.’
중얼거리는 욕설을 들으며 유더는 과거의 자신을 낯설게 느꼈다. 이렇게까지 허겁지겁 제 몸도 챙기지 않고 단신으로 쫓아간 줄은 몰랐었는데, 실제로는 정말 이랬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꿈이라서 과장된 광경일까.
‘단장님!’
유더의 외침과 동시에 무너진 절벽 끝까지 다다랐던 키시아르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이내 발을 굴러 허공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정확하게 몬스터의 머리 부근까지 날아오른 그가 팔을 내뻗어 상처 입은 얼굴을 향해 마지막 공격을 했다.
키시아르의 손 근처에서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이 한 번 크게 일렁이며, 끔찍한 비명이 산 전체를 진동시켰다. 몬스터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피가 유더의 근처까지 튀며, 큰 덩어리가 발치로 굴러왔다. 몬스터의 혓바닥이었다.
반쯤 뽑혀 나온 길고 두툼한 살덩어리가 뱀처럼 꿈틀대는 동안 새파란 빛이 기이한 선을 그리며 표면에서 연달아 깜박거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언뜻 마법진의 일부처럼도 보였다. 그 모양이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더는 거기에 더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멀지 않은 낭떠러지 끝에서 몬스터가 기력을 잃고 흔들대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반쯤 날아간 것이 약점을 제대로 찌른 모양인지,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잠시 후 몬스터가 낮게 그르렁거리며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산꼭대기부터 정확히 세로로 절반을 잘린 듯 날카롭고 기이한 모습의 절벽은 놈을 죽이기 위해 유더가 만들어냈던 덫이었다.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 전체가 울리고 귀가 먹먹한 소리가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거대한 충격을 이기지 못한 땅에 금이 가며 크게 흔들렸다. 몬스터가 딛고 서 있던 땅에도 여파가 밀려왔는지 절벽 끄트머리부터 또다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더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으나, 지친 듯 서 있던 키시아르는 그대로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단장님!’
다시 한 번 불렀지만 이번에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지친 것인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은 것인가. 어느 쪽인지 이 위치에서는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마침내 키시아르의 주변 바닥까지 갈라져 무너지기 시작하자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흰 겉옷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질 듯 휘청거렸다. 유더는 제가 붙잡고 있던 안전한 나무와 단단한 땅을 순간적으로 살폈다. 여기까지는 안전했다. 이곳에 있는 한 그가 다칠 일은 없다. 키시아르가 방금 보여준 정도의 힘이 있다면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충분히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꽉 붙잡고 있던 나무에서 손을 놓았다.
바람을 밟고 뛰자마자 키시아르가 서 있던 곳마저 마침내 모두 조각조각 갈라져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더는 간발의 차이로 손을 뻗어 흰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힘을 잃고 스러지는 피투성이 큰 몸을 제 품 안에 다 끌어안을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일단 붙잡은 것으로도 충분했다.
겨우 다시 마주친 얼굴은 코와 입, 귀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꽉 감은 눈 위로 나부끼는 금빛 머리칼이 붉게 보일 만큼 온통 젖어 있었다.
유더는 마지막 남은 기력으로 바람의 힘을 짜내 두 사람의 몸을 함께 휘감았다. 거친 바람이 미친 듯 발버둥 치며 등 뒤로 길고 긴 꼬리와도 같은 궤적을 그렸다. 그들은 그대로 한 덩어리가 되어 산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