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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96화 (296/805)

296화

“가케인! 나와! 교대 시간이야!”

말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갑자기 문을 열며 뛰쳐 들어온 엘더 남매 때문에 유더와 가케인의 대화는 잠시 끊어지고 말았다.

“앗, 유더가 깨어나 있었네. 이제 괜찮아?”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고마워.”

“괜찮기는요. 아직 하나도 안 나았는데요.”

유더의 대답에 뒤이어 루산이 투덜거리자 엘더 남매도 그럴 줄 알았다며 장단을 맞추어 떠들어 댔다. 아무래도 가케인에게 하려던 제안은 뒤로 미루어야 할 듯했다.

“자, 잠깐만. 유더가 뭐라고 말하려던 참이란 말이야. 그것만 듣고 갈 테니까 이것 좀 놔 줘.”

“무슨 말?”

그러나 가케인은 끈질겼다. 양팔에 매달린 엘더 남매를 견뎌내며 힘겹게 내뱉은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엘더 남매가 흥미를 보였다. 유더는 순식간에 제게 향하는 여러 시선들을 피부로 느끼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가케인이 이번 임무를 잘 끝내면 나와 함께 일을 좀 해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려고 했어.”

“일? 무슨 일?”

“왜 가케인한테만 제안하는 거야?”

“나…… 나한테?”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엘더 남매와 어안이 벙벙한 가케인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유더는 엘더 남매의 집요한 질문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키시아르에게 하사받은 조력자 임명권에 대해 털어놓아야 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있으니 괜찮겠지.’

5인의 임명권 중 아직 사용한 건 하나도 없다. 유더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함께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마병단 훈련 및 업무를 빼먹는 혜택 따위는 없을 것이라 말하자 단원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부단장급은 안 되고 그 이하는 된다는 거지?”

“응.”

“뭐야. 그러면 우리도 할래. 끼워 줘!”

“방금 들었잖아.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닐 거라고. 현재는 마병단을 위한 정보 수집을 해 보는 방향 쪽으로 생각 중이긴 하지만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정보 수집이면 더 멋지잖아! 우리가 가케인보다 강하니까 끼워 줘!”

큰 외침과 함께 침대 아래쪽 어딘가가 들썩들썩 흔들렸다. 유더는 곁에서 어설프게 웃는 가케인의 슬픈 중얼거림을 들었다.

“내가 대련에서 아직 한 번도 못 이긴 건 맞지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니 가슴이 좀 아프네, 힌…….”

“우리 외모를 보고 방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부단장도 아니고, 단장님도 인정한 실력자고, 훈련 안 빼먹고도 다 할 자신 있고, 의욕 넘치고. 조건도 딱 맞지? 이 이상 적격자가 또 누가 있어?”

엘더 남매의 아우성을 듣다 보니 점점 그들의 말에 설득당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무슨 일이든 의욕이 중요한 법이다. 하기 싫다는 사람을 굳이 데려다 쓰는 것보다는 유더에 대해 잘 알면서도 함께 하고 싶다는 사람을 끼우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알겠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게. 일단 서부에서 너희가 얼마나 임무를 잘 해내는지 보고 나서.”

“좋아!”

가케인과 같은 조건을 걸었다는 데 만족한 듯 엘더 남매가 대답했다.

“가케인, 너는?”

한숨처럼 희미하게 웃으며 가케인이 있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잠시의 침묵 뒤 열기를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좋아.”

가케인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정에 찬 모습으로 돌아갔다. 유더는 엘더 남매가 정신없이 떠드는 목소리를 들으며 루산 사제가 눈 위에 감은 붕대를 푸는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고작 팔다리에 새로 붕대를 감고 동료들과 대화를 조금 나누었을 뿐인데도 몸이 몹시 피로했다.

“유더 님. 이게 마지막이니 졸리시더라도 조금 더 참으세요.”

유더의 상태를 알아차린 듯 루산 사제가 말을 걸었다. 유더는 그러고 보니 독성이 파고든 부위가 팔다리만은 아닐 것이라는 데에 새삼 생각이 미쳤다.

“다른 부분은… 붕대를 갈지 않아도 됩니까?”

“예. 거긴 밤에 이미 갈아주셨다고 하셨으니까요… 음. 다 풀었으니 눈을 한 번 떠 보시겠어요?”

무언가 신경에 걸렸으나 유더는 일단 시키는 대로 감았던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아찔한 통증이 번지며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무언가 어른거렸다. 몇 번을 깜박여 보아도 눈앞을 가린 새카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어떠세요?”

“검은 얼룩이… 대부분이라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아직 변화가 없군요.”

루산이 한숨을 내쉬며 눈 위에 약을 바르고 새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 얼룩이 눈 속에 파고든 독성일 겁니다. 피를 뒤집어쓰고 나서 한동안 눈을 뜨고 계셨던 게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전까지는 크게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눈앞이 다시 어두워지고 나니 어쩐지 손 안에서 굴러다니던 동그란 사탕의 감촉이 생각났다. 유더는 누운 채 입고 있는 옷을 더듬어 보았으나 당연히도 주머니 안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뭘 찾으시나요?”

“혹시… 제가 이곳에 돌아왔을 때 옷 안에 뭔가 있지 않았습니까?”

치료를 위해 옷을 갈아입혔겠지만 주머니 안에 뭔가 들어있는 줄 알았다면 꺼내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물었다. 그러나 루산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때 워낙 정신이 없어서 거기까지 살필 여력이… 아. 체액에 젖은 옷은 단장님께서 갈아입히셨던 것 같은데 물어볼까요? 뭘 찾으시는지 알려주시면요.”

“아뇨. 아닙니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유더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뱃속에서 근질거리며 치솟는 물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한 마디를 다시 꺼내고 말았다.

“그런데 제 옷을 정말… 단장님께서 갈아입히셨습니까?”

“네. 정말 대단하셨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루산이 물수건으로 유더의 목과 뺨 쪽을 부드럽게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사실 그런 분들께선 스스로 옷 갈아입는 방법을 아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제 안의 편견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분께서 줄곧 곁에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그리 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지…….”

루산의 말을 듣는 동안 점차 호흡이 뜨거워져 갔다. 열이 올라가는 중임을 스스로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텅 빈 주머니 쪽을 손가락 끝으로 괜스레 더듬어 보다가, 유더는 몽롱한 어둠 속에 의식을 맡겼다.

꿈자리가 몹시 더러웠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깨어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유더는 깨질 듯한 두통에 신음하며 숨을 헐떡였다. 너무나 추웠다. 몸 안이 온통 차가운 얼음 조각으로 가득 찬 채 뒤흔들리는 듯했다. 제 속에 가득 찬 얼음을 긁어내고 싶었지만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웅크린 채로 버르적대며 팔을 움직이려던 시도를 몇 번인가 실패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겨우 의식을 차렸다.

“…….”

유더는 가쁜 호흡을 정리하려 노력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보았다. 몇 번 더듬더듬 움찔거리며 움직여 보니 겨우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움직일 수 없도록 붙잡고 있는 누군가의 큰 손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렇게 큰 손을 지닌 사람은 달리 없었다. 뒤늦게 은은하게 파고드는 알싸하고 익숙한 체향에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단장님.”

지독하게 쉰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갔다. 그제야 유더의 손을 꽉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뭡…니까. 이건…….”

“감아 둔 붕대를 쥐어뜯으려 해서 어쩔 수 없었어.”

평소보다 조금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악몽을 꾸는 모양이던데.”

“…….”

“먹을 만한 걸 가져왔는데 삼킬 수 있겠나?”

그 말을 듣고서야 무언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기억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추가로 깨달았다. 식욕은 없었지만 생존과 회복을 위해서는 싫어도 먹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언제나 머리에 새겨져 있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유더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다가온 손이 어깨를 붙잡아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전신이 어디라 할 것 없이 온통 욱신거렸다.

“먼저 물부터 마시는 게 좋겠지.”

유더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제가 마시겠습니다.”

키시아르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내 그 손에 컵을 쥐여 주었다. 그러나 유더는 그 컵을 입술에 대어 보기도 전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차가운 액체가 몸과 침대를 흠뻑 적셨다.

당혹감에 사로잡혀 입을 벌리자 다가온 팔이 곧 그의 몸을 안아 들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마치 제가 물컵을 놓칠 줄 알면서도 준 듯한 말에 고개를 돌리니 서늘한 바람 같은 웃음소리가 뺨을 간지럽혔다.

“예상대로라니, 무슨 뜻이십니까.”

“수저를 들 힘도 없을 거라고 말해 본들 내 보좌는 분명 아니라고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물을 먼저 주셨다는 겁니까?”

“어차피 약도 다시 바르고 침구도 갈아야 하니 겸사겸사였던 셈 치자고.”

키시아르는 유더를 안은 채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다른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희미한 음식 냄새가 고소하게 코를 찔렀다. 유더는 그가 처음부터 침대에서 식사를 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기가 막혔지만 동시에 가슴속이 또다시 작게 쑤셨다.

“이제 내려 주십시오. 앉는 것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갈비뼈가 여럿 부러진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보통 말리는 법이지.”

“하지만.”

“자.”

자세를 한 번 고쳐 안는 것만으로 요청을 깔끔하게 무시한 키시아르는 그대로 유더를 제 무릎에 앉힌 채 가져온 수프를 떠 입 안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얼핏 보아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해 보였지만 그 태도 속에는 평소와 같은 웃음기도, 그렇다고 이전에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격렬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더는 당혹과 미약한 수치심, 그리고 몸을 감싼 온기가 주는 반사적인 안도감 속에서 혼란스럽게 그것을 삼켰다.

그가 기억하는 한 가장 어릴 때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식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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