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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06화 (306/805)

306화

“그건 걱정 말게.”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안아서 가면 문제없을 테니까.”

예감은 곧바로 사실이 되었다. 유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딱 잘라 거절했다.

“싫습니다.”

“그러면 업어서 가는 쪽이 좋나?”

“안든 업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까지 나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까지라니. 이보다 간단히 함께 산책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어디 있다고. 설마 안기는 거라서 싫은 건 아닐 텐데?”

“그게 무슨…….”

대체 어디서 나온 확신이냐고 반박하려던 순간, 막상 부정하려 생각해 보니 그간 저지른 일들이 슬금슬금 뇌리에 떠올랐다. 유더는 2성 발현 때 그의 품에 안겼던 때부터 시작하여 바로 어제도 얌전히 몸을 맡긴 채 식사하러 이동했던 기억이나, 얼마 전 제가 먼저 손을 내밀어 끌어안았던 기억 등을 머리에서 밀어냈다. 그 이외의 다른 사유를 생각하느라 답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 안과 바깥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다? 뭐가 다르지.”

말하는 뜻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반문하는 태연한 목소리에 속이 슬쩍 끓었다. 유더는 돌려 표현하는 쪽을 포기하고 직접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바깥에서 그렇게 하시면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겠지요. 불필요한 추문이 퍼질 겁니다. 단장님께서도 그 점을 내내 고려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만…….”

유더는 이전 생에서 이미 그 불필요한 추문이 퍼졌을 때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질리도록 보아 잘 알았다. 때문에 이번 생에서만큼은 외부에서 보는 그들의 관계가 평범한 단장과 보좌 이상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 그토록 이끌림을 거부하려 하지 않았었던가.

결국 키시아르를 향한 거대한 충동 앞에 지기는 했다지만, 그렇다 해서 이전과 같은 바보짓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키시아르에게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과 이 상황이 낳을지 모를 위험은 분명히 별개의 문제였다.

키시아르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이 볼지도 모르는 대낮에 안고 산책하겠다는 말을 그리 당당히 하다니.

‘기분이 지나치게 좋아져서 이곳이 마병단이 아니라 서부 마법사 연합 거점 한복판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닐 테고.’

마병단원들이야 키시아르의 특이한 성정을 이미 잘 알아 어느 정도의 기행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겠지만 마법사들은 아니었다. 과거의 여러 기억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범람했다.

“불필요한 추문이라……. 그렇게 생각하다니, 의외군.”

“뭐가 의외입니까.”

“이 세상에서 나의 신분이나 이름을 제일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내 보좌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라는 게 놀라워서 말이야.”

유더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제가 그간 상당히 불경하게 비쳤다면 죄송합니다만… 당연히 단장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보라고. 이런 대답 말이야. 나를 진짜로 어려워했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답이지.”

유더는 두 번째로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반박할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다가는 좌초되기를 반복했다.

“…이건 다른 이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럴까? 가케인 볼룬발트나 칸나 완드 같은 이에게 같은 말을 했다면 절대로 그런 답이 나오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밖에 나가는 건 몰라도 저를 꼭 단장님께서 옮겨주실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흥분하지 말게. 열이 더 오르니까.”

날카로운 대꾸를 내뱉은 뒤 작게 숨을 몰아쉬자,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서늘한 손길이 뺨에 닿았다. 유더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분위기가 도로 가라앉았다는 사실에 미약한 후회를 느꼈다.

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려 했던 순간, 키시아르가 먼저 목소리를 내어 말을 꺼냈다.

“미안하네. 불안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이 정도는 이제 괜찮으리라 욕심을 낸 탓에 괜스레 마음을 어지럽게 했나 보군.”

“…….”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두고 싶네.”

나지막했던 말이 끊긴 뒤, 키시아르가 느리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너와 함께 하는 것이 조금도 추문이라 여기지 않아.”

순간 가슴 안쪽에서 불시에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유더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 손을 잡은 사내가 계속해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는 있겠지. 평소 추잡한 짓을 즐기던 펠레타 공작이 전도유망한 젊은 능력자의 앞길까지 막으려 든다는 추문이 돌고, 황제 폐하께서 그것을 보다 못해 내게 근신을 내리는 그런 결말 쪽이 오히려 더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말이 돼. 그동안 여기 누워 있기만 해서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실은 대삼림 전체를 뒤흔든 엄청난 각성자에 대한 이야기가 현재 제국 전체를 넘어 멀리까지 퍼져 나가고 있는 중이거든.”

아마 이번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이전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수많은 이들이 유더를 포섭하려 들 거라며 속삭인 목소리 속에는 희미한 웃음과 낯선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 보게. 전례 없는 능력을 지닌 데다 심지어 새파랗게 젊고 생생한 미모로 빛나는 이가 고작 펠레타 공작 밑에 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큰 상을 내리실 이가 겨우 그런 곳에 발목이 잡혀 있어서야 누가 생각해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라 여기겠지. 그러니 방금 그 이야기도 충분히 가능해.”

유더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 생에도 그는 제 힘을 사용해 서부의 많은 지형을 때려 부수고 다시 만들어낼 만큼의 일을 해냈지만 그를 포섭하러 온 이 따위는 없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일이 일어난 시기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많은 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갑자기 유더 아일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일이 생길 리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키시아르의 이야기 속 다른 허황된 부분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그는 누가 포섭을 하러 오든 말든 조금도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이 모든 건 애초부터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저와는 관계 없을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이전에도 그랬지만 키시아르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뱃속이 울렁거리고는 했다. 고집스럽게 꽉 다문 입술을 보며 웃은 키시아르가 잠시 후 목소리를 진지하게 내리깔았다.

“유더. 그래서 이번에 서부에서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나는 너를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앞에 정식으로 소개할 생각이다.”

순간 두 번째로 저릿하게 울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크게 뛰었다. 유더의 손을 잡은 큰 손에 방금 전보다 강한 힘이 들어갔다.

“거기서 내가 너를 무어라 소개하리라 생각하나.”

“…….”

마병단의 단장보좌. 20살짜리 평민 출신 각성자.

그것 외의 답은 없을 텐데, 키시아르의 말은 마치 당연히도 그 외가 있다는 듯 들렸다. 유더의 손을 끌어당긴 키시아르가 감싸 쥔 손가락 위로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가는 떼었다.

불에 달군 쇠로 낙인찍히는 듯한 뜨거움에 놀라 움찔 굳은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확신을 담아 속삭였다.

“이전의 나는 네가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아끼고 귀여워하는 보좌이자 부하로 대할 수 있다고 말했었지만… 알고 있나? 그 말의 전제조건.”

네가 원한다면. 그 한 마디를 중얼거린 사내의 입술 위로 깊은 열망이 서린 한숨이 흘렀다.

“내 마음은 이미 여기에 있어. 저항할 수 없이 모두 빼앗겼고, 다시 되찾아 올 방법이 있다 해도 찾아오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그렇다 하여 상대도 같은 답을 내놓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안 해.”

“…….”

“만약 네가 나를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해 준다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달라지겠지. 그 가치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를 기다린다 해도 무엇이 아까울까.”

그 말을 평범한 단어로 요약해야 한다면, 가장 가까운 건 아마도 구애였으리라. 외면할 수도, 차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확연한 답을 내놓은 키시아르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비치는 열기의 무게가 익숙했다. 그는 분명 유더가 제 품 속에서 죽은 줄 알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확신이 이유도 없이 파고들었다.

유더는 보이지 않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뜨거워지는 만큼 뱃속이 크게 울렁거렸다. 몇 번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뺨을 쓸어넘긴 손이 곧 떨어져 나갔다. 유더는 제 손을 놓고 일어서는 기척을 느끼며 서늘한 추위에 휩싸였다. 몸은 열이 나서 더운데 안쪽은 왜 추운지 알 수 없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고통과 충동이 계속해서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저녁에.”

그 순간, 걸음 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유더는 힘겹게 목소리를 내어 말을 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게 되면… 그때는, 괜찮습니다.”

“…….”

“피곤하시다면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만…….”

“…그럴 리가.”

고요하고도 뜨거운 답이 돌아왔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면 나와 함께 산책을 해도 괜찮다는 거지?”

“……네.”

“오늘만은 어서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주기를 간절히 기다려야겠군.”

밝은 웃음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유더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제가 무슨 답을 지껄인 것인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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