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유더의 곁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꽉 쥐고 있던 주먹 속에는 딱딱하고 동그란 사탕이 여전히 들어 있었으므로 어젯밤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는 사탕을 만지작거리다 포장지를 더듬어 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드디어 힘들게 입에 넣은 사탕의 맛은 기억과 다름없이 달고 새콤했다.
그는 그대로 누운 채 어디선가 들려오는 떠들썩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여태까지의 고요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바깥은 평소와 다른 활기로 가득했다. 마치 비어 있던 집에 주인들이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뒤바뀐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되었다. 오늘 있을 마법 시전 때문일 터였다.
“어? 유더. 일어난 거야?”
사탕을 다 녹여 삼켰을 때쯤, 가케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눈치 빠르게도 유더의 기상을 금방 알아차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시끄러워서 깬 건 아니지? 조용히 준비해 달라고 계속 부탁했는데도 다들 저래서……. 졸리진 않아? 몸 상태는 어때?”
“괜찮아. 나쁘지 않아.”
유더의 대답을 들은 가케인이 이마의 열을 재 보고는 몸을 부축해 상체를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들 오늘 저녁에 있을 마법 시전 준비를 한다고 좀 정신이 없어. 물론 넌 그냥 사제님하고 같이 평소처럼 식사만 잘 하고 있으면 된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은 마.”
“아니죠. 약도 드셔야죠.”
가케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루산 사제가 곁에서 첨언을 했다. 오늘 일어날 일에 루산 또한 기대를 많이 품고 있는 모양인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밝았다. 유더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팔다리와 얼굴에 두른 붕대를 갈았다.
“오늘은 밖에 나가실 테니 옷을 두껍게 입으셔야 할 것 같아서 유더 님의 가방을 가져왔어요. 혹시 원하시는 옷이 있으신가요?”
“아뇨.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음… 그러면……. 엇.”
가방을 뒤지던 루산 사제는 문득 어느 옷 사이에서 툭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하고 의아한 얼굴로 주워들었다.
“이건 뭐죠? 마정석인가요?”
그의 조촐한 짐 속에 들어있을 물건 중 마정석이라 불릴 만한 건 하나뿐이었다. 유더는 서부에 오기 전 키시아르에게 받았던 붉은 돌의 힘 매개체를 떠올렸다.
“검붉은 색을 띤 돌이라면… 네. 그 비슷한 겁니다. 주시죠.”
유더는 루산에게 건네받은 차가운 돌을 쥐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서부로 오느라 그간 매개체의 힘을 직접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오랜만에 쥔 매개체의 감촉이 낯설고 생경했다.
‘이것에 힘을 불어넣으면 증폭되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었는데… 페투아멧을 상대할 때 이걸 썼더라면 더 나았을까.’
하지만 이것이 없이도 당시의 유더는 충분히 페투아멧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고, 그대로 해냈다. 예상치 못하게도 피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이런 꼴이 되기는 했으나 한번도 써 보지 않은 불확실한 요소에 도박을 걸 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다.
유더는 아쉬움 없이 그것을 옆에 내려놓았다. 가케인과 루산이 그 매개체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키시아르가 준 것이라고 답하자 이내 납득하고 관심을 거두었다.
이후의 하루는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유더는 교대로 방문하는 단원들을 통해 마력의 샘 유적지 근처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마법의 진행 준비 과정을 들었다. 중간중간 열이 오르거나 떨어질 때마다 루산이 그의 곁에서 물수건을 올리거나 따뜻하게 덥힌 방한 주머니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 루산은 그에게 몇 개의 환약을 먹였다.
“이전보다 진통 성분이 든 약초를 더 많이 넣어서 만들었어요. 혹시 마법이 진행되는 도중 아플 수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드리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사제님.”
진심을 담은 인사에 루산이 머쓱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목에 걸고 있던 성표를 풀어 유더의 손 안에 함께 쥐고 짧은 기도를 해 주었다.
“유더 님께, 그리고 저희 모두에게 빛의 따스함이 공평히 내리쬐길 바랍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자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온 이는 엘더 남매와 뜻밖의 손님이었다.
“이 마법사가 밖에서 자꾸 왔다 갔다 하고 있길래 데려왔어. 유더한테 볼일이 있대.”
“……로나 베잇이에요.”
머뭇거리며 입을 연 마법사의 정체에 유더는 조금 놀랐다. 누구보다도 마력의 샘 유적지를 연구하는 일에 진심을 다했던 그녀가 이곳에 올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소개를 하고 난 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유더는 어느 정도 기다리다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다치셨던 건 다 나으셨습니까.”
“…네. 덕분에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어요. 건강해요.”
“다행이군요.”
로나는 증폭진의 힘을 흡수한 페투아멧과 싸우다 부상을 입고 실려 왔었다. 그 마지막 기억 때문에 제대로 회복할 수 있었을지 조금 신경이 쓰였는데, 무사히 다 나았다니 다행이었다.
“제가 부상을 입어 위험해졌을 때… 당신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나중에 들었어요. 그때 일을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오게 되었네요.”
“사과라면 괜찮습니다만.”
로나 같은 이가 유더의 경고를 잘 들어주리라고는 처음부터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유더가 다친 것도 아니고, 부상 치료에 사제보다 더 큰 도움을 준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런 식으로 사과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나는 그 말뜻을 무언가 오해한 듯, 목소리에 조금 힘이 빠졌다.
“그래요. 받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어요. 뭐, 당연한 일이겠죠.”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로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전, 그동안 연구 도중 일어나는 다소의 위험은 마법사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다른 이들이 마법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여겼죠. 각성자라면 특히요. 하지만… 이번 일을 겪은 뒤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
로나는 각성자들의 도움으로 몇 번이나 목숨을 구했다. 그들이 하던 연구 때문에 하마터면 대삼림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큰 피해를 입을 뻔했는데, 그 거대한 몬스터를 죽이고 이 모든 위기를 구해낸 이 또한 각성자였다. 그녀는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각성자들이 가볍게 통제하는 작은 몬스터조차 다루지 못하는 동료들의 굴욕적인 모습과 욕심에 찬 아집을 지켜보며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마법사는 태생적으로 욕심을 타고나야만 대성할 수 있다고들 말하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추한 모습은 곧 로나가 외면하던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 그 자체였다.
“이전까지는 마법사인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그게 부끄러워요. 제가 하고 있던 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나니 더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붕대로도 다 감추지 못한 검은 얼룩에 로나의 시선이 닿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숙였다.
“사과 대신이라기에는 무엇하지만, 오늘 시전될 마법의 해답을 찾기 위해 그동안 정말 노력했어요. 그 덕에 마병단장님께 당신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죠.”
유더는 그녀가 그냥 찾아온 게 아니라 키시아르의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다른 단원들은 짐작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는지 그저 잠잠했다.
“부디 제가 찾은 답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에요.”
로나가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나갔다.
“……마법사들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별로지만, 저 사람은 이번에 정말 열심히 했다고 들었어. 부상이 낫지 않았는데도 잠도 자지 않고 연구하다 몇 번 쓰러져서 사제님이 불려가셨거든.”
침묵을 지키는 유더의 곁에서 가케인이 조금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단장님도 그래서 널 만나는 걸 허락하신 걸 거야.”
유더는 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원들은 억지로 사과를 받아 줄 필요가 없다는 둥, 자존심만 센 마법사들의 기를 더 눌러줄 필요가 있다는 둥 하며 떠들어 대고 나서 겨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이제 우리가 널 마력의 샘인지, 뭔지가 있는 쪽으로 옮길 거야.”
엘더 남매가 유더를 둘러싸고 간략히 선언했다.
“어제 실험해 본 결과 직접 옮기는 것보다 이쪽이 부담이 적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 그쪽에선 칸나하고 단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 긴장은 하지 마.”
“너희는?”
“우린 널 옮기고 뒤따라갈 거야.”
힌과 핀이 유더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유더는 몸에 걸친 단복 겉옷 자락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그 안주머니에는 아까 짐가방에서 꺼냈던 붉은 돌의 힘 매개체가 들어 있었다.
“이제 이동한다! 준비해!”
유더는 힌과 핀의 팔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볼 수 없었으나, 제 몸을 둘러싼 기운이 요동치는 감각만은 예민하게 느꼈다. 마치 작은 폭풍 같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몸을 감싸더니, 잠시 후 몸이 어디론가 휙 이끌려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 속에 던져진 나뭇잎처럼 휩쓸리는 감각이 짧게 스쳐 지나간 뒤, 주변을 두른 공기가 변하며 몸이 낙하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가 그의 몸을 가볍게 받아들어 추슬러 안았다.
“제대로 잘 왔군.”
머리 위에서 키시아르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더 남매의 힘으로 이동하는 감각은 어떻던가?”
“……나쁘진 않았습니다.”
“역시 겁이 없어서 좋군. 자,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