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마법사들의 작명 능력이 좋지 않은 건 예부터 유구하지. 어차피 이상한 이름이 될 거라면 네 이름을 남겨두는 게 나아.”
“…….”
“춥지는 않나? 꽤 쌀쌀한데.”
“괜찮습니다.”
“어젯밤은 푹 쉬었고?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아 살피지 못한 게 아쉽더군. 아, 약사 이논이 도착했다는 보고도 받았는데 그와는 만났나?”
“예. 만났습니다. 밤에도 잘 쉬었습니다.”
지나치게 달콤한 목소리가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히 그들의 대화에 크게 관심을 두는 이는 주변에 없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단장님께서도, 어젯밤에 잘 쉬셨습니까?”
“아니.”
키시아르의 눈이 마치 그 말만을 기다렸던 듯이 반짝였다.
“그래서 나단과 합류하고 마차에 타면 거기서 조금 눈을 붙일 생각이야.”
“아, 네. 다행입니다.”
“올 때처럼 빨리 이동할 필요가 없으니 잘되었어. 보좌는 나와 함께 타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몰랐습니다.”
“이제라도 잊지 말도록 해.”
유더가 말없이 눈만 깜박이자 키시아르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잘 쉬었는지 말고 또 궁금한 건 없나? 지금쯤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
그 말을 듣고서야 유더는 키시아르의 외모에 홀려 잠시 잊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어제 그 몬스터의 처분은 어떻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까?”
이것부터 물어보았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다. 키시아르는 우아한 손짓으로 짐이 쌓여 있는 곳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 검은 천으로 감싼 상자가 보이나?”
“네. …데려가기로 한 겁니까?”
“타이누에 몬스터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을 불러 두었네. 거기서 제대로 살펴본 뒤 다시 처분을 결정하기로 했어.”
결정을 읊는 목소리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사들은 저것을 폐기 처분한 줄 알 테니 타이누에 가서도 비밀은 지키게.”
그는 유더의 왼쪽 눈가를 가볍게 스치듯 쓸어낸 뒤 몸을 돌렸다.
떠날 시간을 앞두고 마병단원들은 각자의 아쉬움을 담아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 일로 인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로 떨어지게 된 엘더 남매는 침울함을 감추지 못했고, 에버는 이곳에 남게 될 어린 지미를 걱정했다. 그러나 지미는 드넓은 대삼림에서 토벌 임무를 수행한다는 생각에 신이 나 뺨이 붉게 상기된 상태였다.
유더는 마지막으로 서부 마법사 연합의 거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으나, 이번에는 이곳에 사는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아무도 모를 사실만은 그를 꽤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허기진 줄도 몰랐던 뱃속이 비로소 따뜻해지는 듯한 그 기분을 음미하며 유더는 시선을 돌렸다.
작은 거점은 곧 대삼림의 울창한 푸른 숲에 가리며 사라져 갔다.
***
“남작님! 대삼림 쪽에서 드디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타이누의 영주 빌름 남작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튕기듯 일어나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렸다.
“그래. 거점 일은 잘 처리했다고 하느냐? 펠레타 공작은. 아니, 마병단과 서부 연합 마법사 놈들의 정황은? 그보다 대체 왜 이리 소식이 늦어진 게야! 내가 분명 일주일에 한 번씩은 연락을 하라고 했을 텐데!”
빌름 남작은 태어나서 이토록 마음이 조급했던 적이 없었다. 요사이 그에게 일어난 일은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 이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기 그지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온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대삼림에 떡하니 등장한 마병단이 소리소문 없이 이상발생한 거대한 몬스터를 해치운 건 그렇다 치자. 분명 수도에 있다던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는 왜 거기 있으며, 서부 마법사 연합은 왜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단 말인가?
케일루사 황제가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의 업적을 자랑스레 발표한 뒤부터 빌름 남작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과도 같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무능함을 질책하는 타인 공작의 분노 섞인 연락이 날아왔고, 서부의 귀족과 백성들은 몬스터를 제때 저지하지 못한 타인 가를 원망했다. 결과적으로 황제와 펠레타 공작, 마병단의 명성이 높아진 만큼 욕과 손가락질은 타이누를 관리하는 빌름 남작에게 쏠린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거기에 뒤늦게 타인 가의 치부를 가리고자 파견한 기사들마저 소식을 제대로 보내오지 않자 그의 불안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다가는 아무에게나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는 펠레타 공작이 정말로 신검을 갖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거대한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건 지나치게 부풀려진 소문이기를, 실제로는 일을 엉망진창으로 실패하여 많은 이들이 죽었기를 바랐다. 타인 가의 비밀 무역거점이 그들의 눈에 띄는 일 또한 결코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들어온 소식을 가지고 그의 앞에 선 집사의 표정은 유령처럼 창백하기만 했다. 두 개의 편지를 든 손이 떨리는 것을 본 빌름 남작은 불안에 차 어서 읽으라고 명령했다.
“나, 남작님. 대삼림에 파견했던 기사들이……. 그것이…….”
“그것이 뭐. 설마 거점을 놈들에게 들키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집사가 후들대며 읽은 첫 번째 편지 속 진실은 그보다 더 나빴다. 빌름 남작은 그가 보낸 세 명의 기사가 모두 괴한의 습격을 받아 죽었으며, 시체를 수습한 마병단이 사건 조사 결과를 편지로 보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잠시 기절했다.
그리고 깨어난 다음 미처 다 듣지 못했던 다음 편지 속에, 마병단장과 그의 단원들이 타이누로 다 함께 올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또다시 기절했다.
그가 바랐던 일 중 무엇 하나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독실한 태양신 신자였던 빌름 남작은 드러누워 신의 무정함을 원망했으나 그에게는 편히 쉴 여유조차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타인 공작이 보낸 명 때문이었다.
‘감히 타인 가의 기사들을 죽이고 그들의 물건을 갈취해 사라졌다는 간 큰 각성자 놈들을 쫓아라. 갈취한 물건을 통해 얻은 정보로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자 한다면 분명 타이누에 있는 중간 거점을 찾아가겠지. 그리고 펠레타 공작을 어떻게든 포섭해 신검이나 마병단에 대한 소문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그들이 우리의 비밀 무역 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알아내도록.’
타인 공작이 보낸 단호한 명 속에는 이번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시, 빌름 남작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이 많은 일을 다 처리하려면 인력과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 그런 건 하나도 지원해 주지 않으면서 명령만 내리는 공작이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작님.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이 막 성문 경비대를 통과하여 들어섰다 합니다. 곧 이곳에 도착할 테니 준비하십시오.”
“알겠다.”
빌름 남작은 며칠 사이 초췌해진 얼굴로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일단 펠레타 공작을 만나 마병단이 대삼림에서 이루어낸 업적에 대한 감사를 명목으로 제집으로 초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로를 건너 달려온 말과 마차들이 그의 앞에서 멈추고, 안에서 예절과 절도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듯한 이들이 우르르 내렸을 때에는 아무리 노련한 빌름 남작이라도 순간 머리가 어찔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찌뿌둥해 죽는 줄 알았어. 이제야 좀 쉴 수 있겠네!”
“여기가 타이누라고?”
“나 지금 좀 마려운데… 화장실은 어디지?”
신이시여. 이 더럽고 무례한 평민들이 정말 모두 마병단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부르짖어 보아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빌름 남작의 뒤에 선 가신들과 기사들도 불쾌하고 당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유난히 눈에 띄는 장신의 사내가 새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체격이 좋은 기사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솟아 있을 만큼 키가 컸다. 하지만 딱딱한 기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움직임이 우아했으며,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을 만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빌름 남작은 그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붉은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뜬 순간, 저도 모르게 정신이 몽롱해져 헛숨을 삼키는 추태를 벌이고 말았다.
‘믿을 수가 없군. 저 사람이 바로 그 쭉정이 공작이라니…….’
여태 빌름 남작이 인식했던 펠레타 공작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정보는 방탕하고 멍청한 쭉정이 공작이란 이야기였다. 지금까지는 그 외의 다른 부분은 신경 쓸 가치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 있는 저 사내는 얼마나 찬란하며 또 압도적인가? 그가 정말 황가의 문제아이며 타인 공작이 진지하게 상대할 가치도 없다 일컬었던 그 펠레타 공작인가?
빌름 남작이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펠레타 공작이 빠져나온 마차 안에서 한 사람이 더 내렸다. 유독 새카만 머리칼에 혈색 없이 피부가 창백한, 몹시 젊디젊은 청년이었다.
‘누구지? 시종이나… 부관인가?’
빌름 남작의 의문 속에서 청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빌름 남작은 검은 얼룩으로 뒤덮인 한쪽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펠레타 공작과는 다른 의미로 주변의 시선을 잡아끌면서도 동시에 껄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탁월한 눈이었다.
빌름 남작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자 청년은 펠레타 공작에게 무어라 입술을 달싹여 말을 걸었다. 그러자 펠레타 공작이 걸음을 옮겨 빌름 남작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시끄럽게 굴던 마병단원들도 그가 움직이자 일제히 조용해졌다.
“자네가 빌름 남작인가?”
“예, 그렇…습니다. 조시에프 빌름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 전하.”
조금 말을 더듬기는 했으나, 빌름 남작은 몸에 익은 예절대로 간신히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성문 경비대에게 듣자 하니 자네가 우리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던데.”
“예. 사라인 대삼림에서 타이누까지 먼 길을 와 주셨는데 영주가 되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공작 전하와 마병단 덕분에 편히 잠들 수 있게 된 모든 서부 제국민들을 대표하여 제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오니 부디 편히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여기까지 실수한 말은 없었겠지. 빌름 남작은 제가 한 말을 되짚어 보며 공손히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키시아르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사실 마병단이 오기 전 계획할 때만 해도 이 제안을 거절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실제로 펠레타 공작의 얼굴을 보고 나니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심 심경이 복잡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타인 공작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빌름 남작은 조이는 듯 뛰는 가슴께를 붙잡고 키시아르의 벌어지는 입술을 살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극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미남은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 태평한 얼굴로 변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지 않아도 잠자리를 걱정 중이었는데 알아서 내어주겠다니 이거 참 고마운 말이군. 그렇지 않나, 보좌?”
“…예.”
공작이 옆에 서 있던 검은 머리 사내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두르며 묻자,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 호의, 사양하지 않도록 하지.”
“…….”
펠레타 공작이 소문과 달리 몹시 어려운 사내일지 모른다 여겨 잔뜩 경계하고 있었던 빌름 남작의 첫인상은 그 순간 요란하게 무너졌다.
“오는 동안 제법 피곤이 쌓였거든. 저녁 식사는 수도식으로 요리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 혹 파티도 열 생각인가? 그렇다면 의상도 새로 준비해야겠군. 숙소는 어디지?”
“아, 그… 별채…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직 첫인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빌름 남작이 어설프게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채! 좋군. 그 정도라면 견딜 만하겠지. 현재 수행하는 인원이 많은 편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좁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외부의 지나친 관심과 간섭은 귀찮으니까. 이해하리라 믿네.”
“무, 물론… 이해합니다.”
“하하하. 자네와 나는 아무래도 잘 통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키시아르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찡긋 움직였다. 무엇을 해도 제법 어울려 보이는 그 외모만 아니었다면 단숨에 내쳐 버렸을 만큼 경박한 태도였다. 빌름 남작은 그들이 안내를 받아 별채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집사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거대한 충격과 안도가 동시에 그의 머리를 두들겼다.
“…남작님. 괜찮으십니까?”
“허. 소문이 틀린 것 하나 없군.”
“예?”
“아무것도 아니다.”
빌름 남작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신께 감사를 올렸다. 그는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의 시중을 들 이들에게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하나도 놓치지 말라는 비밀스러운 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