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40화 (340/805)

340화

유더가 에버와 함께 편지에 대한 대화를 조금 더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답도 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그들이 머물고 있는 저택의 주인인 빌름 남작이었다.

하인들을 잔뜩 이끌고 들어온 그의 시선이 방 내부와 에버, 그리고 유더의 얼굴을 훑고서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애써 표정을 정돈하였지만 눈빛 속에 가득한 차가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흠. 몸이 좋지 않아 공작 전하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보아하니 멀쩡한 모양이군.”

에버가 불쾌한 얼굴을 감추며 편지를 도로 집어넣었다.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무례하군요. 어찌 인사도 하지 않고 말을…….”

“되었다. 황제 폐하께 직접 칭호를 받은 인재라 해도 아직까지는 예의에 익숙지 않겠지. 내가 이해하는 수밖에.”

빌름 남작의 곁에 있던 하인 한 사람이 유더의 태도를 지적하고 나서자 남작이 너그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흔들어 그를 뒤로 물렸다. 속 깊은 이처럼 말하는 태도와 내용이 전혀 달라 우습지도 않았다.

“경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네.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안 될 듯해 미리 기별을 주지 못했어. 선객은 물리고, 둘만 이야기할 수 있겠나?”

권유형이었지만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투였다.

‘할 이야기라.’

키시아르가 없고, 유더가 홀로 남은 틈을 타 연락 없이 찾아왔다면 용건은 뻔했다. 에버가 날카롭게 치뜬 눈으로 빌름 남작을 바라보다가는 유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더.”

여기 있어주기를 바란다면 빌름 남작 따위가 무어라 하더라도 남아 있겠다는 의지가 짧은 부름 속에 모두 담겨 있었다. 유더는 에버를 향해 안심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에버, 대화가 끝나는 대로 제가 찾아갈 테니 추후 다시 이어서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알겠어요. 응접실 쪽에 있을 테니 이따 봐요.”

에버가 자리에서 일어나 빌름 남작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고개만 살짝 숙인 뒤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흘긋 본 빌름 남작이 기다렸다는 듯 하인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하인들이 에버가 앉았던 의자를 정성스레 닦고 나서야 남작은 콧수염을 비틀며 우아하게 엉덩이를 붙였다.

“경이 사라인 대삼림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꼭 한 번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와 다행이야.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조시에프 빌름 남작이라 하네.”

“유더 아일입니다.”

그는 타인 공작가의 방계 출신으로 대략 8대 전부터 타이누를 맡아 온 빌름 가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힘차게 중얼거렸으나 유더는 그중 무엇도 머리에 넣어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빌름 남작이 언제쯤 본론을 꺼낼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래서, 올해 서부 국경 너머에서 일어난 몬스터 이상 발생이 기어이 대삼림까지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 내게는 큰 걱정거리였지. 그것을 해결해 준 경에게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전하고 싶네.”

‘이제 슬슬 시작인가?’

너무나 지루한 탓에 창밖이라도 보아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쯤 드디어 빌름 남작이 몬스터 이야기를 꺼냈다.

“아닙니다.”

“내 듣자하니 경이 홀로 몬스터를 해치우면서 부상을 입었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빌름 남작의 시선이 유더의 왼쪽 눈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유더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도 곧바로 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까지 따라와야 했다니,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경을 정말 깊이 아끼시는 모양이야. 오죽 소중히 여기셨으면 자신의 숙소까지 내어 주셨겠는가?”

“…….”

감탄하는 듯 돌려 표현하고는 있으나 그 뜻을 해석하면 결국 ‘죽도록 고생해 놓고도 펠레타 공작에게 붙잡혀 있으니 얼마나 수치스럽겠느냐’는 의미였다. 유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빌름 남작은 은밀히 목소리를 낮추며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차 제국을 이끌어 나갈 젊은 인재가 제 뜻을 펴지 못하고 이런 곳에 앉아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일이지. 경의 활약에 큰 인상을 받으신 타인 공작께서도 나와 같은 의견이라 말씀해 주셨다네.”

“…그렇습니까.”

“그분께서 각성자에 대해 그토록 진보적인 말씀을 하셨다는 게 믿기지 않는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유더의 반응을 저 좋을 대로 판단한 빌름 남작은 헛기침을 하며 타인 공작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달리 타인 공작이 사실은 몹시 도전 정신이 강한 이라느니,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라면 여타의 흠은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을 갖췄다느니 하는 말 속에서 유더는 어렵지 않게 그의 진짜 뜻을 파악해 냈다.

‘도박적인 투자에 미쳐 개인 자산을 전부 털어 넣은 사람이라니 도전 정신이야 당연히 강하겠지. 성공만 바라고 실패할 시 얻게 될 불운에서 눈을 돌리는 건 그런 자들의 전형적인 특성이고.’

이전 생의 타인 공작은 카치안 황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조용히 잘 먹고 잘 살았다. 잠시 제국을 달구었던 불법 격투장 사건에 타인 가의 이름이 올랐으나, 연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 데다 개인적 사업을 명목으로 수도에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았으니 유더 또한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그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었던 건 분명 카치안을 비롯한 다른 귀족들의 협력과 옹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카치안 황제는 자신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존재를 극도로 싫어했으나, 반대로 몸을 납작 낮추고 협력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이에게는 자비를 보였다. 4대 공작가 중 한 곳이면서도 황제의 권위를 위험하게 할 만한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제 일에만 눈이 멀어 있었을 타인 공작은 그 선을 참 잘 지킨 셈이었다.

이전이라면 신경을 쓰지 않았을 일이건만, 갑자기 입맛이 썼다. 키시아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떤가. 생각이 있나?”

유더는 이전 생의 타인 가에 대해 떠올리느라 잠시 빌름 남작의 말을 놓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그시 바라만 보자 눈썹을 움찔 떤 남작이 분위기에 짓눌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타인 공작 전하와의 만남을 결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기회라는 건 그리 쉽게 오지 않아. 다리를 놓아주는 건 내가 할 테니, 경은 그저 수도에 돌아가 연락을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타인 공작께서… 저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빌름 남작이 그제야 이야기가 조금 통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유더는 마주 웃지 않았다. 키시아르가 이곳에 오기 전 염려했던 모든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듣고 있는 이 상황이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뭐?”

“저는 마병단장 보좌입니다. 제가 한 모든 일은 마병단 소속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 하나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게 연락을 주시고 싶으시다면 단장님께 우선 말씀하여 주십시오.”

어안이 벙벙해진 남작이 안색을 벌겋게 붉히든 말든 유더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슨… 마병단이 뭐가 어떻다고? 그게 지금 타인 공작 전하의 말씀보다 감히 우선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남작님께서는 마병단의 단장이신 펠레타 공작 전하의 뜻을 제가 우선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순간 빌름 남작은 말문이 막혔다.

‘이놈이?’

당연히 유더 쪽에서도 펠레타 공작을 벗어나고 싶어 할 줄 알았기에 포섭을 하러 온 것이었는데 이런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예상대로라면 태연한 모습으로 상대를 내려다보는 건 그이고 상대는 성급히 조바심을 삼키며 매달렸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재 표정 변화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건 오히려 남작 쪽이었으며, 심지어 유더는 한술 더 떠 그를 떠 보는 듯한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 빌름 남작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면서 상대를 너무 쉽게 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불쑥 느꼈다.

그는 어렴풋한 불안감을 감추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무슨 그런 이상한 말을 다 하나? 내 말이 그게 아니라는 건 알지 않나. 이리 딱딱해서야 어찌 큰일을 할 수 있겠어. 물론 경의 입장에서는 펠레타 공작 전하의 뜻을 어기는 것 같아 걱정스럽겠지만 그런 걱정은 전혀 안 해도 괜찮다네.”

“그러면 이런 제안을 받았다고 단장님께 말씀드려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유더는 체면도 잊고 고개를 내젓는 빌름 남작을 보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키시아르에게 알려서는 안 될 제안을 하러 온 시점에서 이미 그가 주장하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좋은 제안’이 아닌데, 대체 저를 얼마나 멍청하게 보았기에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펠레타 공작 전하께는 내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말하지 말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남작님. 말씀 도중 죄송합니다. 본채에서 급한 기별이 왔습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하인 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몸을 앞으로 잔뜩 내민 남작과 반대로 침착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저를 보는 검은 머리 사내의 묘한 대조에 순간 입을 다물었다가, 무슨 일이냐는 호통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그것이, 타인 1공자께서 방금 전 막 이곳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1공자께서?”

빌름 남작이 당황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타인 공작 전하께서는 아무런 기별도 주시지 않으셨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일단 부인께서 공자님을 모시며 남작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빠르게 대답한 빌름 남작이 유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겼으니 대화는 일단 이쯤 하지. 그러나 내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보길 바라네. 다음에 다시 부르지.”

그들이 사라진 뒤 유더는 잠시 자리에 앉아 방금 들은 말에 대해 생각했다. 당연히도 그것이 빌름 남작의 제안은 아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