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생각해 두신 방도가 있으십니까.”
“방도는 없네.”
키시아르의 대답은 몹시 간결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사냥할 시기를 노리는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오늘 데려온 이들 덕분에 우린 아마 곧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될 거야.”
오늘 데려온 사람들 때문에 경매가 다시 열리게 될 거라고? 몹시 의미심장한 말에 눈을 찌푸린 유더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에버 또한 알 듯 말 듯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장님. 슬슬 밖에 나가 있던 다른 단원들이 돌아올 시간이 된 듯하니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맛있는 차와 쿠키를 즐길 기회를 함께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많은 이들을 구한 자네의 노고에 이 정도는 약과지. 오늘 제대로 된 안내를 해 주어 고마웠네.”
에버가 나간 뒤, 유더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쿠키 접시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남은 차를 삼켰다.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찻주전자의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한 잔 더 마시겠나? 아직 남아 있는데.”
“괜찮습니다.”
“나단이 사 온 쿠키는 어떻던가. 빌름 남작의 말로는 타이누의 귀족가들마다 사람을 보내 사 간다는 인기 제품이라더군.”
말린 과일을 예쁘게 저며 올리고 색을 넣은 설탕 가루로 장식한 쿠키를 사기 위해 줄을 선 하인들 사이에 끼어 있었을 나단 주커만이라. 도저히 상상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리 방탕하게 놀고먹는 위장을 하기 위해서라지만 소드마스터씩이나 되는 부관에게 그런 명을 내리는 이는 세상에 키시아르 라 오르뿐일 터였다.
“……괜찮았습니다.”
“아무래도 과일이 올라가서인지 내 입에는 첫맛이 지나치게 상큼하더군. 다음에는 초콜릿 쪽으로 변경하라고 명해야겠어.”
“또 시키실 생각이셨습니까?”
“부관을 자주 내보내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가게들은 이유를 대기에 아주 적절하거든.”
그렇다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유더는 마지막 남은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다. 확실히 맛은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에버가 떠나기 전 키시아르가 했던 마지막 말만이 둥둥 떠다녔다.
키시아르의 말대로 오늘 데려온 기억 잃은 자들로 인하여 경매가 열리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수많은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채우고 바쁘게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지?”
“아까 했던 말씀이 어떤 이유로 이루어질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게 그리 궁금했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은 키시아르가 턱을 괴고는 대답해 주었다.
“간단해. 내분이 일으킬 소요 때문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유더는 비로소 그의 뜻을 이해했다.
기억 잃은 이들의 존재는 곧 나그란의 별 마을에 있던 각성자들 간의 내분을 뜻했다. 나한과 그의 동료처럼 타인 가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을 자들이 있다면, 반대로 이번 일로 인해 그들에게 반발심을 크게 가진 자들도 생겼을 터였다.
내부의 반발과 대립은 구성원들의 신중함을 잃게 만들기 가장 좋은 요소이다. 타인 가와 빌름 남작은 곧 키시아르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혼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선택할 길 역시 더 좁아질 테고 그다음은 타이누에 오기 전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일이 전개될 터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역시 이해가 빨라서 좋군. 상으로 쿠키를 더 먹겠나?”
“…….”
유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사양하지 말라는 다정한 미소와 함께 두 번째 쿠키 상자를 열었다.
“음?”
그러나 그는 곧바로 과자를 옮기지 않고 잠시 멈칫하며 뚜껑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닿은 곳에 작게 접은 쪽지가 하나 몰래 붙어 있었다.
“나단이 보고거리를 하나 더 남겨 놓고 갔었군.”
“무슨 내용입니까?”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타이누에 도착할 예정이라는데. 잘되었어.”
쪽지를 빠르게 읽은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전에 몬스터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을 타이누에서 만날 거라 말했던 것, 기억하나?”
“네.”
“펠레타에서 올 이들이야. 도착하면 약사 이논까지 불러 다 함께 보는 게 좋겠군.”
펠레타에서 온 몬스터 전문가들이라. 이전 생의 기억을 돌이켜도 정체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유더는 미약한 긴장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해 두겠습니다.”
다음 날, 타이누의 아침은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시작되었다. 지진처럼 미세한 흔들림을 감지하자마자 기민하게 눈을 뜬 유더는 마찬가지로 이미 일어나 있던 키시아르를 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장님께서도 느끼셨습니까?”
“이곳 근처는 아니야. 꽤 먼 곳에서 일어난 폭발인 것 같군.”
자리에서 일어난 키시아르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손에 세 마리의 작은 전서조를 올리고 다시 되돌아왔다.
“보고가 빠른데……. 어디 볼까.”
키시아르가 다리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를 열고 안에 든 쪽지를 읽는 동안 유더는 고개를 갸웃대는 새들에게 물을 주었다.
“타이누 치안 관리단 건물과 우리가 찾아갔던 붉은사슴 상단 건물에서 의문의 침입 사건이 일어났다는군.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지만 현재 추적 중이며, 경비를 서던 이들과 죄수 몇 명이 부상을 입은 듯해.”
다른 보고들도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모두 놀고먹는 척을 하며 바깥에서 타이누의 정황을 살피던 펠레타 기사단이 보낸 보고였다.
“나그란의 별이겠군요.”
“그래. 하지만 두 곳을 침입한 이들이 같은 뜻을 지닌 파일지는 알 수 없지.”
유더는 적어도 타이누 치안 관리대를 침입한 이들은 기억을 잃은 이들을 찾은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짐작했다. 완전히 죽여 입을 막으려는 의도였는지, 아니면 뒤늦게라도 찾아와 구해 주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한발 늦은 건 분명했다. 기억을 잃은 이들은 이미 여기에 있었으니까.
“일이 예상보다 빨리 시작되었지만 빌름 남작이 당장 연락을 하지는 않을 것 같군. 우리는 모르는 척을 하고 오늘은 여기서 느긋이 시간을 보내도록 할까? 저녁쯤 타인 공자도 부르고 말이야.”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곱게 접어 꾹 쥐었다. 잠시 후 다시 편 손안에는 얼마 안 되는 잿가루만 남아 있었다.
유더는 그날 하루 종일 키시아르와 함께 쉬었다. 키시아르는 본채 쪽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움직임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단원들과 함께 응접실에서 카드 게임을 하거나 잡담을 나누었다. 빌름 남작의 하인들이 무슨 불온한 눈빛을 보내도 개의치 않고 남자 애인을 곁에 낀 채 쾌활하게 웃는 모습이 그야말로 방탕한 공작의 표본다웠다.
저녁이 되자 고양이와 책 한 권을 품에 안은 프루엘레가 찾아와 그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예의 바른 모습으로 고양이와 자신을 모두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뒤, 동생의 식사를 먼저 챙겼다. 고양이가 작은 입을 열어 음식을 먹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수저를 드는 모습이 형제라기보다는 부모와 다름없었다.
“전하. 오늘 폭발 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들으셨겠지요.”
“물론이지.”
“빌름 남작이 그 건으로 하루 종일 수도와 연락을 하는 것 같더군요. 아버지는 아직도 대삼림에서 기사들을 살해한 자들을 잡지 못한 데다 타이누가 침범당했다는 사실에 몹시 분노하신 것 같았습니다.”
“자네가 여기 왔다는 건 이제 신경 쓸 일도 아니게 되겠군.”
“예. 덕분에 혼란을 틈타 제가 아는 이들과 접촉하기는 쉬웠습니다.”
프루엘레가 타이누에 둔 지인들은 빌름 남작의 아래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일부 귀족들이었다. 어린 시절 프루엘레와 동생들이 잠시 타이누에서 머물 때 동정을 담아 도움을 주었던 그들은, 이곳 사정을 알고 싶다는 1공자의 부탁에 별다른 의심 없이 흔쾌히 정보를 알려 주었다.
“아버지는 빌름 남작을 통하여 타이누에 둔 중간 거점에 은밀히 밀수품을 숨기고, 그것을 다시 수도와 남부 쪽으로 보내 유통시킨 듯합니다. 남부에는 주로 ‘서부에서 들여온 말’들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말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무엇인지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이겠지.”
“예.”
간결히 대답한 프루엘레가 잘게 썰고 있던 고기를 내려다보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일순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보에 의하면… 타이누 내의 그 ‘중간 거점’에는 아직 ‘유통’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말을 숨길 만한 곳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요. 때문에 제가 추측하기에 거점으로 삼을 만한 가능성이 높은 장소 몇 곳을 표기하여 가져왔습니다.”
프루엘레는 이곳까지 가져왔던 책을 키시아르에게 건넸다. 그것은 두꺼운 역사서였다.
“서부와 타이누의 역사를 자세히 적어 둔 것으로 유명한 책입니다. 타인 가의 선조 중 한 사람이 쓴 책이지요. 장소는 그 안에 표기해 두었습니다.”
“이런 귀한 선물을 주다니, 고맙네.”
“아닙니다. 그런데……. 듣기로는 어제 별채에 낯선 손님들이 다수 들어왔다던데, 어찌 된 일인지 혹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어제 그들이 치안 관리단에서 데려온 이들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본채까지 흘러들어 갔던 모양이었다.
“타이누의 기사를 죽인 이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이라네. 우린 그자들이 능력에 의해 정신이 붕괴된 채로 버려졌다고 추정하고 있지.”
“……그런 능력도 있습니까?”
프루엘레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설마 오늘 치안 관리단에 침입자가 온 이유도…….”
“어쩌면 그 연장선일 수도 있겠지. 다행히 어제는 우리가 한발 빨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