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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60화 (360/805)

360화

“전하께서는 아일 경을 정말 신뢰하시는 것 같아.”

본저로 돌아가는 동안, 프루엘레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하긴, 숙소를 함께 쓰도록 하실 정도이니 당연하겠지만 말이야.”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키시아르가 유더와 같은 숙소를 쓰고 대외적으로 애인이라 칭하는 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확신하는 듯하던 이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까 대화를 듣다 보니 마병단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토록 깊은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거든.”

아무래도 프루엘레는 키시아르와 유더가 나눈 대화를 듣고 무언가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여태 동생들 이외의 사람을 믿으려 노력한 적이 없어. 타인을 경계해야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배웠지. 그렇잖아? 믿음을 주면 줄수록 내 약점이 드러날 가능성도 커지니까 말이야.”

“…….”

“나도 아일 경처럼 신뢰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면… 가문의 일에 좀 더 빨리 관심을 두고 주변을 믿으려 했다면… 동생들의 위험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 말은 들릴 듯 말 듯 작게 울려 퍼졌다. 유더는 본저의 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제가 누군가의 삶에 조언을 할 만큼 잘 살아온 건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큰일을 앞두고 프루엘레가 처지는 건 안 될 듯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사실 프루엘레 공자님의…….”

“엘레.”

“…엘레 님의 말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사실은 보좌 자리도 여러 번 거절했었습니다.”

“거절했었다고?”

프루엘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신뢰를 받는 사람은 먼저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엘레 님의 말에 들어맞는 분은 제가 아니라 단장님이시겠지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기분이 몹시 묘했다. 제 입으로 키시아르 라 오르에 대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유드레인 아일이었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제가 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신뢰란 주고받으며 형성되는 것이다. 키시아르가 먼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면, 유더가 아무리 밀어내도 몇 번이나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유더 또한 그에게 무언가를 돌려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는 그저 그뿐이었으나 결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졌고 계속해서 더 달라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엘레 님은 이미 단장님과 저를, 그리고 마병단을 믿고 여기까지 오시지 않았습니까. 단장님께서는 엘레 님의 요청에 응답해 주셨죠. 그건 신뢰가 아닙니까?”

그러니 굳이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 생의 프루엘레도, 그리고 그의 동생들도 아직 멀쩡했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일 경 말이 맞아.”

프루엘레가 느리게 대답했다.

“부러워서 한 말이었는데, 어쩐지 그보다 더한 부끄러움을 얻었네.”

“말이 지나쳤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 그냥… 펠레타 공작 전하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져.”

프루엘레의 암적색 눈동자 위로 한결 밝은 기색이 돌았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마병단에 들어간다면, 아일 경을 유더라고 불러도 될까?”

유더는 본저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부르셔도 괜찮으니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시오.”

“알겠어. 그렇게 할게.”

유더의 입장에서 보자면 솔직히 프루엘레 쪽도 만만치 않게 대단했다. 아무리 제 세계 이외에는 관심이 없이 살아왔다지만, 귀족으로 태어나 신분이 다른 이들에게 여기까지 스스럼없이 대하기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아페토 가의 레블린 때도 그랬지만, 이전 생의 제가 알던 것보다 보이지 않는 틀 바깥에 있던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듯했다.

억울하게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가거나 사라진 이들의 운명을 제가 다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있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논리도, 증거도 없지만 있는 것처럼 선명히 느껴지는 이 감정을, 그 믿음을 아마도 희망이라 부르는 것일 테다.

“그런데… 본저 안이 왜 이리 소란스럽지?”

밝은 얼굴로 들어선 프루엘레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손님들을 압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듯 화려하기 그지없는 현관 홀 너머로 평소와 다른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들렸다.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내는 소리인 것만은 확실했다.

프루엘레는 제 숙소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마침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하인 한 명을 불렀다. 무슨 일인지 묻자 그가 겁을 먹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조심스레 대답했다.

“저녁 식사 도중 옷이 물에 젖어 자리를 비우셨던 페이프 님과 넬리사벨 님이 옷을 모두 갈아입으신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 없어 다 함께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래, 알겠다.”

프루엘레는 하인을 보낸 뒤 그리 유쾌하지 않은 얼굴로 올라가자고 말했다.

“괜히 물었어.”

“이상하군요. 어디로 간 걸까요.”

“사라진 게 아니라 항의의 뜻으로 타고 온 마차를 두고 그냥 돌아가 버린 거겠지. 그 부부는 남작의 재산에 빌붙어 생활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방자해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이 잦아. 아마 제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남작에게 화가 나 가문의 마차가 아니라 다른 마차를 잡아타고 돌아가 버린 걸 거야.”

초대를 받아 온 손님이 주인에게 화가 났을 때, 주인이 내어 준 호의를 무시하고 나가는 건 귀족적인 모욕의 표시였다. 프루엘레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숙소로 들어갔다. 푹신한 방석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고양이가 프루엘레를 확인하고는 아주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프루엘레는 순식간에 차가웠던 표정을 바꾸어 고양이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니피. 형을 기다렸니? 무서웠을 텐데 장하구나. 늦게 와서 미안하다.”

“…….”

한참 동안 고양이를 어르고 나서야 겨우 유더의 시선을 인식한 듯 고개를 돌린 프루엘레가 약간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이 모습으로 있을 때는 자꾸 이렇게 대하게 돼.”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프루엘레의 품에서 훌쩍 뛰어내린 니폴렌은 유더의 주변을 몇 번 돌고는 발목에 조그만 머리를 비볐다.

“니폴렌은 확실히 아일 경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각성자로 추정된다는 그 하인에게도 비슷하게 행동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횟수가 달라. 그자에겐 한 번만 다가갔을 뿐이지만 당신에게는 여러 번 하고 있잖아. 이 녀석이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걸 알면 동생들이 얼마나 놀랄까.”

“…….”

“아 맞다. 그 하인도 어서 불러야겠군.”

프루엘레가 싱긋 웃으며 하인을 부르는 줄을 당겼다.

“아마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자가 바로 올 거야. 사각지대에서 살펴보겠어? 아니면 여기 같이 있겠어?”

“같이 있겠습니다.”

그자가 그저 평범하게 정체를 숨긴 각성자일 뿐이었다 해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프루엘레와 니폴렌의 곁에 있어야 했다. 지킬 이의 곁에서 떨어질수록 보호는 더욱 어려워지는 법이었다.

잠시 후 문밖에서 느린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누가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하인용 옷을 갖춰 입은 어느 사내가 나타났을 때, 그 생각은 보기 좋게 뒤집어지고 말았다.

새로 들어온 하인이라던 젊은 사내는 놀랍게도 유더와 구면이었다. 페투아멧을 잡기 위해 유인 작전을 폈을 때, 쓰러진 마법사를 구출하는 일을 돕고 유더에게 마지막 순간 검을 던져 주었던 바로 그 각성자가 거기에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인상적인 경험이었던 탓에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기억이 났다. 유더가 그를 알아봄과 동시에 남자 또한 유더를 알아보았는지 눈을 크게 홉떴다.

“……당신.”

유더가 입을 열자마자 남자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잠깐……!”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더는 볼 것도 없이 프루엘레를 향해 외쳤다.

“저자가 그 하인입니까?”

“응, 맞아. 그런데 왜…….”

“구면입니다. 잡아 올 테니 따라오지 마시고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빠르게 말을 끝낸 뒤 유더는 바로 몸을 날렸다. 복도로 나가자 그사이 너른 복도의 끝까지 간 사내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평소라면 이런 때에 바람을 밟고 움직였겠지만 지금은 발끝에 바람을 작게 싣는 정도가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범인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릴 수는 있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1층으로 내려가 마구 뛰었다. 그를 쫓는 유더를 본 몇몇 하인들이 어리둥절하게 무어라 소리를 쳤지만 반응할 새가 없었다.

‘젠장. 더럽게 빠르군. 무슨 능력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남자의 그림자는 어느새 1층 아래의 지하로 향했다. 유더는 자신이 더 알 수 없는 길로 가기 전, 조금 더 무리하여 힘을 발휘하기로 했다.

“멈추라고, 했을 텐데!”

“큭!”

가슴이 갑갑하게 막히는 기분을 참아내며 힘을 발하자, 땅이 울렁이며 남자의 발끝 앞으로 불쑥 솟았다. 발이 걸린 남자가 속절없이 넘어짐과 동시에 유더는 그의 뒷덜미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뒤엉킨 채 복도 너머로 정신없이 굴렀다. 어두운 지하실 너머로 몸 여기저기에 뭔가 부딪치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붙잡은 이를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잠시 후 구르던 몸이 멈추었다. 유더는 숨을 헐떡이며 붙잡고 있던 사내의 옷자락을 꽉 쥔 채 불꽃 하나를 불러냈다.

“이봐요.”

“…….”

‘…기절했나.’

넘어져 구른 충격 때문인지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유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단 남자의 목에 두른 타이를 풀어 그의 손목을 묶었다. 그제야 조금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붉게 물든 제 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불에 비쳐 그렇게 보이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피였다.

‘뭐지.’

혹시나 싶어 제가 묶은 남자를 살폈지만 그는 상처가 없었다. 유더는 불꽃을 조금 더 크게 키웠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뒤엉켜 쓰러진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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