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제가 살던 마을에서 노름꾼들 하는 짓을 많이 봐서 잘 아는데 말입니다, 도박에 미친 놈들은 남이 뭐라고 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귀빈은 오자마자 그자에게 사사건건 질문을 하고, 나중엔 걸 판돈 액수까지 묻더라고요.”
말인즉슨 타인 공작이 오늘 함께 온 남국인을 몹시 의지하는 모습이 수상해 보였다는 뜻이었다.
“음……. 확실히 각별해 보이긴 하네.”
“그렇다니까요. 제 감도 그놈이 제일 수상하다고 말했다고요.”
아페토 공작가의 실험 대상이 되어 잡혀갈 뻔했다가 유더에게 구출된 사건 이후, 데브란은 누구보다 열심히 충성하며 수련을 했다. 비록 언행이 조금 거친 편이라 해도 수련을 통해 발전시킨 야성적인 감은 믿어 볼 만했다.
“마침 귀빈이 그자의 이름을 불러서 잘 기억해 놨죠. 아톤이라는 이름이더군요. 스티버도 제 의견에 동의해 줬으니 이따가 그자가 도박장에서 나갈 때 뒤를 한번 밟고 와도 될까요?”
데브란은 상대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고, 마법사나 각성자로 보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스티버는 고심 끝에 승낙했다.
그러나 데브란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전신을 칭칭 감싸 보기만 해도 답답해 보이는 옷을 걸친 그 남국인 사내가, 놀랍게도 마차조차 타지 않고 도박장을 나선 뒤 추적할 새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
누군가 문득 뺨을 매만졌다.
흠칫 놀라 눈을 뜬 유더는 제가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반쯤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뒤숭숭한 꿈을 꾼 듯도 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현실임을 인식하는 시간이 조금 늦어져 눈을 멍하니 깜박이는 동안 뺨을 만진 사내가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인사를 건넸다.
“잘 잤나?”
“……죄송합니다. 오신 줄도 모르고 잤군요.”
“옥에서 밤을 새고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지.”
서늘한 손길이 뺨을 넘어 그대로 머리칼이 흐트러진 이마를 쓸어 넘겨주었다. 눈꺼풀을 더듬는 차갑고도 부드러운 감촉 덕에 겨우 제대로 잠이 모두 깨었다.
유더는 아직 밖에서 묻어 온 찬바람의 잔재를 머금은 키시아르를 바라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진료를 마치면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기까지 갈 기운도 없었던 모양이군. 지금이라도 눕겠나?”
“아닙니다. 잠은… 이제 다 깼습니다.”
자세를 바로 하며 잠들기 직전 무엇을 했던가 생각하자 답은 곧 떠올랐다.
‘이논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생각을 좀 해 보려다가… 난로가 너무 따뜻해서 깜박 잠들었나.’
다행히도 해는 아직 창밖에 제대로 떠 있었다. 지나치게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건 아니었던 듯했다.
“단장님께서는 빌름 남작과 대화를 모두 마치신 겁니까?”
“일단은.”
짧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잠시 후 말을 덧붙였다.
“타인 공작 측에서 앞으로 각성자들이 일으키는 사건과 관련한 조사는 모두 우리에게 맡기겠다고 했다더군. 필요하다면 타이누 기사단을 비롯해 상주한 병력들을 데려다 쓸 수 있고, 치안 관리단에 만들어 두기로 한 조사본부도 마음대로 하라는 뜻을 밝혔어.”
각성자들이 일으킨 사건과 관련한 조사 우선권은 원래부터 마병단의 몫이었는데 무얼 양보한다는 듯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된 일이었다.
‘대신 타인 공작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모두의 눈을 피해 비밀 무역 건을 은폐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처리하려 들겠지.’
하지만 그건 오히려 키시아르가 바라던 바이니 오히려 박수를 쳐야 할 일이었다.
유더는 그러한 뜻을 간략하게 담아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살짝 눈을 접어 웃은 키시아르가 갑자기 무언가를 유더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낯이 익으면서도 동시에 낯선 쿠키 상자였다.
“어제 나단이 사 온 녀석이었는데, 이제야 먹을 수 있겠군. 축하하는 의미로 조금 들면서 이야기할까.”
테이블보가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 차려진 아침 식사를 양껏 먹은 탓에 아직까지는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지만, 유더는 결국 키시아르가 열어 둔 상자 속 쿠키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미소지은 채 바라보던 키시아르가 이어서 말을 시작했다.
“글레힘 빌름도 정신을 차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네. 침입자들은 그에게 상단 지하실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과 내부에서 암호화한 정보의 해석을 요구했다더군.”
“내부 정보라면, 그때 부서진 금고 속에서 훔쳐 간 것들과 관련된 겁니까.”
“그런 듯하지만 빌름 남작은 필사적으로 그 부분을 없었던 일 취급하고 싶어 해서 말이야. 노력이 가엾어 일단 모르는 척을 해 주었네. 물론 나중에 개인적으로 글레힘을 다시 한번 만날 생각이지만.”
유더는 나단 주커만의 보고를 떠올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나한은 그곳에서 가져간 정보를 완전히 손에 넣지 못한 게 분명했다. 만약 어젯밤 납치를 당했다면 글레힘 빌름은 금방 모든 정보를 술술 불고 나서 살해당했으리라.
“치안 관리단에 보낸 단원들은 일할 자리를 정리해 두었고, 에버 벡은 드디어 그자들이 숨어 있을 만한 장소를 발견하여 찾으러 갔지만 아깝게도 어젯밤 싹 사라졌다더군.”
급하게 떠난 흔적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도망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까 돌아왔을 때 에버가 보이지 않았던 건 그 일 때문이었던 듯했다.
“지금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대로라면 곧 다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때맞추어 타이누에 있는 여러 상단 조합에서 모여 올해도 경매를 열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온 걸 봐서는 타인 공작도 시간을 더 끌 생각이 없는 모양이거든.”
상단 조합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타인 공작의 손길이 여기저기에 닿아 있을 곳들이었다. 얼마 전 그 경매가 또다시 열리게 될 것이라 예측했었던 키시아르의 말은 정확한 현실이 되어 이루어졌다.
키시아르의 장난스런 눈빛 속에서 유더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경매 소식을 알게 된다면 나한도 분명 그때가 절호의 기회임을 부정할 수 없겠지.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도 두 토끼를 모두 잡을 가장 좋은 기회가 될 테고.’
때로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눈앞의 떡밥을 물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 타인 공작이 열게 될 경매가 그러했고, 그 경매의 정체를 꿰뚫어 볼 에르시와 나한이 하게 될 선택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이 최선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가 제 눈앞에 있었다.
유더는 심장이 크게 뛰는 감각을 느끼며 숨을 작게 내쉬었다.
사냥감들이 몰리는 줄도 모르는 채 절벽에 몰리도록 만드는 것은 말이 쉽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키시아르의 예측에 따라 지정된 절벽 위에 선 이들은 그곳이 절벽이 아닌 최선의 선택을 통해 맞이한 기회의 순간이라 여기게 될 터였다.
물밑에서 어른대기만 하던 판들이 모여 눈앞의 사내가 예측한 대로 짜여 가고 있었다. 모든 말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놓이고 있는 광경을 가까이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나그란의 별과 타인 가가 각자의 목적을 위하여 피할 수 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순간들이 어느새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실제로는 아주 잠깐 잠들어 있었을 뿐임에도 마치 며칠은 자고 있다 일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치 유더의 그런 생경한 기분을 읽기라도 한 듯이, 키시아르가 말했다.
“그래……. 이대로라면 아마 큰 문제 없이 내가 바라던 대로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겠지. 예상보다 거셌던 변수들이 있었는데도, 놀랄 만큼 완벽하게도 말이야.”
완벽하게도.
그 말을 입 안으로 되뇌며 곱씹고 있으려니 뒤이은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지금의 이 완벽한 시기를 얻어낼 수 있었던 건, 누군가 나와 마병단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자처하여 앞으로 나서 주었기 때문일 거야.”
“…….”
“그렇지 않나?”
누군가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붉은 눈동자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단 한 곳만을 보고 있었다. 유더는 눈을 깜박이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단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목 안쪽이 또다시 말라 왔다.
“…저는, 이번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
“그런 말씀은 제가 아니라 주커만 경이나… 에버가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들에게도 모든 일이 끝난 뒤 마땅한 치하를 할 거야. 하지만 지금의 치하는 어젯밤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 버린 이에게 해 줄 때지.”
흰 손이 다가와 유더의 손을 붙잡았다.
“물질로 된 무엇을 주어도 부담스러워만 할 이에게,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계속 생각했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가 된 것처럼 마땅치 않더군.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그가 무엇을 해냈는지 말로만 알려 주는 것. 그리고…….”
장갑을 끼지 않아 훤히 드러나 있는 검은 얼룩 위로, 키시아르가 소리 없이 입술을 눌렀다. 유더의 손끝이 칼에 찔린 듯 움츠러들었으나 눌린 온기는 사라지지 않고 낙인처럼 남았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제게 그런 치하는, 인사는 조금도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유더 아일에게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은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유더는 얼어붙은 채 고통스럽게 뻐끔대는 제 안의 수많은 구멍들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