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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76화 (376/805)

376화

“네 발로 움직이고, 꼬리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군요. 짐승과 벌레의 중간 정도 형태……. 이전에 보내 주신 바에 의하면 거의 하루 종일 식욕을 보인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맞나요?”

“그렇다더군.”

키시아르가 웃음기 없는 눈빛으로 페투아멧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마력을 흡수하는 종류의 몬스터들 중에는 비교적 흔한 특징입니다. 만물에 깃든 소량의 마력을 흡수하여 그것을 원동력 삼아 움직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주변을 빙빙 돌며 페투아멧을 살핀 헬렘이 잠시 후 주머니 안에서 장갑을 꺼내 꼈다. 그녀가 갑자기 우리 안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는 바람에 유더는 흠칫 놀라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키시아르와 나단은 그저 침착하기만 했다.

“괜찮은 겁니까.”

“이 방면의 전문가는 헬렘이라네. 70년 넘게 몬스터를 연구하고도 사지가 멀쩡한 사람은 흔치 않아.”

“내버려 두시지 그러세요. 모처럼 잘생긴 젊은이의 걱정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예전에 나와 나단의 걱정은 달갑지 않다고 하더니, 내 보좌 쪽이 자네의 취향이었나 보지? 어디 가서 잘생김으로는 진 적이 없는데 이거 조금 섭섭하군.”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뻔뻔하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헬렘은 아무에게나 저런 칭찬을 하지 않는데, 보좌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야.”

“…….”

유더는 대답을 피했다. 시선이 마주친 이논이 아까보다 더욱 좋지 않아진 얼굴로 볼 근육을 씰룩대고 있었다.

“자, 그러면 이제 채취를 좀 해 볼까.”

헬렘이 우리 안에 넣은 손으로 페투아멧의 머리 부분을 툭툭 건드렸다. 식사를 방해받아 화가 난 듯한 몬스터가 작게 위협하는 소리를 흘리며 검게 변한 꼬리를 휘둘렀다. 그러나 공격은 장갑에 닿자마자 튕겨 나갔을 뿐, 조금도 타격을 주지 못했다.

몇 번 더 같은 일을 반복한 헬렘은 장갑 끝을 물어뜯느라 대롱대롱 매달린 페투아멧을 요령 좋게 떨어트리고 나서 뒤로 돌아섰다. 몬스터가 뿜어낸 독액이 잔뜩 묻은 장갑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수백 번쯤은 이런 일을 해 본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자. 그러면 이쪽도 보지요.”

장갑을 벗은 헬렘이 유더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키가 커서 살피기 어려우니 여기 좀 앉아 봐요.”

“……예.”

유더는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유더의 왼쪽 눈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한 헬렘이 안경 윗부분을 손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평범해 보였던 렌즈의 색이 어둡게 변하며 연두색 눈동자가 가려졌다. 그녀가 서슴없이 유더의 턱을 붙잡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유더는 몹시 낯설고도 당혹스러운 기분을 삼켰다.

“독을 흡수한 흔적이 아직 덜 사라졌다더니, 정말이군요.”

보이지 않는 왼쪽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던 헬렘이 잠시 후 다시 안경 렌즈 색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몬스터가 당신을 따른다고 들었는데, 그걸 지금 볼 수 있을까요?”

“할머니!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벌써 다 진행한 거예요?!”

그때, 위층에서 큰 소리를 내며 뛰어 내려온 누군가가 숨을 헐떡이며 끼어들었다. 새 둥지처럼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의 사내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 앞에서도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우리 안에 든 페투아멧을 보고는 단숨에 밝아진 얼굴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 네가 바로 그 마법진까지 삼켰다는 몬스터구나. 생각보다 귀여운데?”

“주군께 인사를 드리는 게 먼저가 아니니.”

헬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걸자 사내가 무어라 입 안으로 투덜거림을 삼키며 뒤돌아섰다.

“할머니 주군이지, 내 주군이 아니라니까 매번 저래. 아무튼… 간만에 뵙네요, 전하. 사람을 급히 불러 놓고 하루 반나절이나 기다리게 하시는 바람에 할 일이 없어 술을 좀 마셨을 뿐이니까, 이 정도는 봐주시리라 믿습니다.”

믿기 어려울 만큼 실로 건방진 태도였으나 키시아르는 오히려 빙긋이 웃었다.

“그러지. 이쪽은 내 보좌인 유더 아일, 그리고 이쪽은 마병단의 능력 있는 약사이자 저 몬스터로 인해 입은 부상 치료법을 연구 중인 이논이네. 자네 소개는 자네가 하도록.”

“아… 이쪽이 그……?”

헬렘과 비슷한 눈빛으로 유더를 빤히 바라보던 사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믹 슈덴입니다. 상단을 운영 중이고, 펠레타 공작 전하와는 사업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고 있지요. 성으로 불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믹이라고 불러 주세요.”

유더는 천천히 그의 손을 잡으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슈덴 쪽이 성이었군. …상단을 운영하는 슈덴 씨라?’

키시아르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슈덴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는 워낙 상황이 빠르게 지나가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소개를 듣고 나자 이전에 들은 그의 직업과 더해져 기이한 추측이 솟아올랐다.

슈덴, 그리고 상단.

그 두 가지가 겹쳐지는 곳은 유더가 알기로 한 곳뿐이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운영하시는 상단의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유더의 탐색하는 듯한 눈빛을 본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그야 물론, 슈덴 상단이지요.”

역시. 유더는 비로소 그의 정체를 확신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사치품 교역에 힘쓰며 단기간에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유명한 상단 중 하나가 된 슈덴 상단. 일전에 아페토 가의 본저에 레블린을 만나기 위하여 몰래 갔을 때, 키시아르가 그곳의 신분패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 쓰는 것을 보며 관련성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전 생에도 간혹 키시아르와 개인적 거래를 하고는 하던 그 상단의 관계자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전 생에는 상단 같은 곳까지 신경을 쓸 틈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제가 뭘 하는 사람인지 전하께서 제대로 말씀해 주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생각에 잠긴 유더의 표정을 무어라 생각했는지, 믹 슈덴이 쾌활하게 물었다.

“…단장님께서는 작은 상단을 운영하시는 분이라 말씀하셨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더의 시선을 받은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하. 우리 상단 규모는 사실 그리 크지 않아요. 그러니까 작다는 말도 틀리진 않죠.”

믹 슈덴은 유명한 상단을 운영 중인 사람이라 보기 힘들 만큼 젊었고, 자유분방해 보였다. 그러나 인사를 나눌 만큼 나누고 페투아멧을 돌아본 순간 그의 눈빛은 완전히 바뀌었다.

“정말 흥미롭네. 이렇게 끊임없이 먹으면서도 전부 소화를 시킬 수 있는 건 그만큼 소화 능력이 좋다는 뜻인데… 몸집은 또 작단 말이지.”

“체액이 전부 독이더구나. 그걸로 녹여서 소화시키니 굳이 몸집이 크지 않아도 괜찮은 거겠지.”

곁에 있던 헬렘이 설명해 주자 믹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다.

“독이요? 채취는 해 두셨겠죠, 할머니?”

“했지만, 훔쳐 갈 생각 마라. 안 줄 거니까. 네 건 네가 채취해.”

“아, 너무해. 전 할머니처럼 능력이 좋질 못해서 힘들다고요.”

“장사꾼 도와줄 생각은 없어.”

믹과 헬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유더는 키시아르를 향해 궁금한 점을 슬쩍 물었다.

“슈덴 상단을 운영하는 분과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뭐,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슈덴 상단의 시작 시기에 어쩌다 보니 내가 도움을 꽤 주었지. 이후로 지금까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네. 슈덴은 몬스터 부산물을 이용한 물건들에 관심이 많은 자라, 관련한 지식이 풍부해.”

키시아르가 슈덴 상단의 시작에 도움을 주었다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그 정도로 오래된 친분이었는데,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위해서 나서지 않았단 말이지.’

그의 사후에도 슈덴 상단은 내내 조용했다. 사실 조용했던 건 슈덴뿐만이 아니라 키시아르와 연관된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펠레타 기사단도, 나단 주커만도, 펠레타와 관련된 모두가 키시아르의 죽음을 전후로 침묵과 함께 순순히 흩어졌다.

카치안 황제가 제대로 손을 쓸 필요조차 없을 만큼 손쉬운 승리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을지 이전에는 굳이 생각하려 했던 적이 없었다. 패배를 예감한 반역의 잔당들이 굳이 충성심을 발휘하지 않고 도망치는 건 역사의 흔하디흔한 일면이었다. 하지만 잊은 줄조차 몰랐던 기억들이 다소 되살아난 지금은 달랐다.

키시아르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그리 쉽게 그를 버리려 했을까?

나단 주커만을 제외하고도, 그의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나 다른 이들 모두 얼마나 진심으로 그를 따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반항 없이 흩어졌다면 거기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가정을 떠올렸다.

‘그 모든 게 만약, 키시아르 본인의 의지에 따른 일이었다면.’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수많은 이들을 두고 패배할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지, 아닐지,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었을지를 판단하기 전에 머리가 지끈대며 욱신거렸다.

“이봐요. 보좌님. 이 몬스터가 당신을 따른다는 걸 보여 주려고 했다면서요? 나 때문에 못 했다니 미안하게 됐어요. 이제 좀 보여 줄 수 있어요?”

두통이 이어지기 전, 생각을 깨트리는 부름이 들려왔다. 유더는 믹과 헬렘을 향해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지금도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사실 시도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때 유더가 한 일은 그저 페투아멧의 우리 근처에 서서 손만 조금 움직인 것뿐이었으니까.

유더는 그때처럼 우리 근처에 서서 페투아멧을 내려다보았다. 믹과 헬렘의 손에 한참 괴롭힘을 당한 탓인지 작은 몬스터는 아직도 약이 바짝 올라 꼬리를 세운 상태였다.

유더는 천천히 우리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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