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리도 강렬한 허기짐과 충족되지 않는 욕심을 견뎌내며 사는 것일까. 상대를 얽어매어 더 오랫동안, 더 깊이 달라붙고 싶은 이런 욕망을 언제나 삶의 일부로 간직한 채 산다는 건 너무 자극적인 일이 아닐까. 한 사람을 향한 수없이 많은 감정이 머리를 가득 메워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는 게 이상했다.
키시아르 라 오르도 지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두서없는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어디선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시 눈을 뜨자, 의자 사이에 유더를 가두듯 끌어안고 있던 사내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소리를 낼 듯 반사적으로 벌어진 입술을 타고 매끄럽게 젖은 점막이 다시 파고들었다. 낮은 소리를 내며 젖혀진 목덜미 위를 긴 손가락 끝이 부드럽게 받쳤다. 머리칼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지분대는 별것 아닌 감각이 입 안쪽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뜨거운 것과 합쳐지자 일순 놀랄 만큼 날카로운 쾌감이 뇌리를 스쳤다.
욕망의 심지에 다시 한 번 불이 당겨지며 머릿속이 흐려지려 했으나, 문밖에서 재차 두드리는 소리가 의식을 일깨웠다. 이번에는 목소리도 함께였다.
“단장님, 들어가도 괜찮을지요…?”
식탁을 치우기 위해 방문한 하인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에버의 목소리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유더는 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내심이 소요되는 기분이었다.
“……단장, 님.”
목소리가 막 자고 일어난 듯 잠겨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목을 가다듬었다. 키시아르가 웃음을 흘리며 유더의 찌푸린 미간 위에 입을 맞추었다.
“응?”
왜 불렀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귀 아래와 목줄기에 비비는 코끝의 감각이 간지러워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유더는 제 목에 가볍게 입을 맞춘 채 움직이지 않는 사내를 그대로 더 강하게 끌어당기고 싶은 열망과 밀어내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잠시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결국 이긴 쪽은 이성이었다. 키시아르의 목에 둘렀던 손을 겨우 풀어내며 닫힌 문 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하지만 말과 달리 키시아르는 대답을 하고서도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드문 반응이었다.
어쩌면 그도 저와 같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가 생각하자 재차 심장 안쪽이 크게 조였다 풀리는 감각이 찾아들었다. 목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온 뜨거운 숨을 흘리며, 유더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키시아르의 뺨을 어루만졌다. 장갑을 사이에 두고 닿은 터라 촉감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었지만, 키시아르가 고개를 들어 웃음기 없는 깊은 시선을 보낸 순간 무어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차올랐다.
오가는 말이 없이도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유더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유더는 한 번만 어루만지고 떼어내려 했던 생각을 바꾸어 조심스레 키시아르의 눈가를 쓸었다. 모양 좋은 눈썹 위로 늘어진 금빛 머리칼 끝이 장갑 위를 스치는 아주 작고 의미 없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몹시 크게 느껴졌다.
키시아르 또한 손을 뻗어 유더의 뺨을 매만졌다. 마치 거울을 보듯 같은 부위를 쓸어내는 손길이 알 수 없는 감정을 피워 냈다. 어쩌면 애틋함이라 부를 만도 한, 그런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키시아르는 몸을 펴고 일어났다. 들어오라고 명하는 목소리에서 방금 전까지 내보였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 아직 식사 중이셨군요. 죄송합니다.”
“괜찮네. 곧 하인들을 불러 치우려 했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지?”
들어온 에버는 아직 치우지 못한 그릇이 가득한 테이블을 보고 놀란 듯했으나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방문한 목적을 보고했다.
“치안 관리단에 가 있는 핀이 다른 단원들과 함께 유더가 발견한 감옥 3층을 내내 살폈는데, 거기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아무래도 사람의… 그것도 각성자의 목소리 같다고 하더군요.”
사람의 목소리라는 말에 유더는 제가 그곳에서 들었던 기이한 바람 소리를 떠올렸다. 타인 가의 문장이 있던 벽 쪽에서 가장 가까이 들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확실히 일반적인 바람 소리라기보다는 눈이 몰아칠 때 창틈 사이로 새는 날카로운 소리와 더 비슷하다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그게 각성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니.
“확실합니까?”
유더의 질문에 에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소리가 내내 들리는 건 아니고 한동안 들리다가 반나절 정도는 다시 조용한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고 경비병들이 증언했대요. 그걸 기반으로 조디가 여러 번 들어보았는데, 사람인 건 확실하고 느껴지는 감각이 자기와 비슷한 각성자 같다고 하더라구요.”
조디 슬리엠은 소리를 질러 여러 패턴의 공격을 할 수 있는 마병단원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소리에 훨씬 민감한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이의 목소리 같다고 확신해 주었다면 의심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유더는 키시아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 안에 사람을 숨겨 두었을 확률이 가장 높겠군요.”
“그럴 것 같군.”
키시아르의 심각해진 표정을 본 에버가 오가는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인지 대강 눈치를 챈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프루엘레 공자님께서 계획대로 정보를 알아내셨습니까?”
“그래. 상단 건물 쪽에 살아 있지 않은 물건들을, 그리고 치안 관리단 감옥 쪽에 사람을 숨겨 둔 것 같다더군.”
“맙소사…….”
에버의 얼굴 위로 혐오와 분노가 짙게 깔렸다.
“에버. 빌름 남작이 치안 관리단에 방문하는 낌새는 없었나?”
“네. 저희가 지켜보는 동안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이나 병사들의 말로는 빌름 남작이 본래 한 달에 몇 번 정도 비밀리에 제이머 필 기사단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더군요.”
“한 달에 몇 번이라……. 사람들을 꾸준히 먹이고 관리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성의 없는 기간이군.”
키시아르의 손가락이 스스로의 팔짱 낀 팔 위를 두드렸다. 에버는 그가 생각을 마치고 지시를 내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일단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3층을 계속 감시하도록 하게. 빌름 남작은 분명 며칠 내로 그곳에 다시 찾아갈 테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뒤, 에버는 치안 관리단에 마련한 마병단 조사본부에서 진행 중인 다른 일들을 몇 가지 더 짧게 언급하고서 보고를 마쳤다. 그대로 바로 떠날 줄 알았으나, 그녀는 한 가지 용건이 더 있다며 품속을 뒤적였다.
“유더. 당신에게 온 편지를 아침에 제가 맡아 두었었거든요. 지금 줄게요.”
이전에도 유더에게 온 편지를 에버가 맡아 주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고맙다고 말하며 그녀가 준 편지 몇 개를 받아들었다. 간만에 익숙한 이름들을 보니 미약하게 표정이 풀렸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레퍼 풀이라도 씹어 먹었어요?”
“예?”
“입술이 부은 것 같아서요. 여기.”
에버가 스스로의 입술 쪽을 두드려 보이며 어디가 부었는지 알려 주었다. 유더는 어색하게 제 입술을 문질러 보았으나 거울 없이 만져만 보아서는 부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부었다면 이유는 뻔했다. 방금까지 하고 있던 일 때문일 터였다.
“…….”
유더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마 그런… 모양입니다.”
“조심해요. 서부의 레퍼 풀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맵더라구요. 어제 에문도 점심 요리에 들어가 있던 걸 실수로 씹어서 오늘까지 혀와 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어요.”
얼음을 물고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는 친절한 조언을 남긴 뒤 에버는 유더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인사를 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단장님.”
그녀가 나간 뒤 방 안에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유더는 미묘한 기분으로 키시아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눈썹을 누그러뜨린 채 미안한 듯 웃고 있었다.
“…정말로 부었습니까?”
“조금.”
같은 일을 같이 했음에도 키시아르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하기는, 입을 맞추던 도중 입술을 깨물린 건 유더 쪽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이전에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을 때는 그도 입술에 상처가 약간 났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그리 티가 나지 않았었던 것으로 보아 본래 표가 안 나는 성질일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군요. 레퍼 풀을 실수로 먹은 사람이 이미 있어 주어서 다행입니다.”
“입술을 물었던 건 지나쳤다고 화낼 줄 알았는데, 그렇게 끝내 주는 건가?”
“그런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내 보좌는 역시 호쾌하군.”
“하고 싶어서 한 일이고, 아프지 않았으니까요.”
키시아르는 어쩐지 그 말에 몹시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