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빌름 남작은 굳은 얼굴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흉흉한 사건 탓에 내내 닫혀 있던 저택의 문이 아주 오랜만에 예전처럼 열려 있는 모습을 보니 메말랐던 그의 가슴에도 드물게 감동이란 감정이 스미는 듯했다.
거대한 정문 앞에 위엄 있게 선 타이누 기사들은 오늘을 위해 닦은 아름다운 갑옷을 차려입고서 들어오는 손님들의 초대장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서부 곳곳에서 달려온 귀빈들의 마차는 위엄 있는 저택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그 어디에도 그동안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들의 여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공적인 업무로 방문한 듯한 허름한 마차 한 대가 눈치도 없이 파티 참석객들 사이에 끼어 있다가 쫓겨나는 광경을 지켜보던 남작은 창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그의 집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경매 쪽에서는 연락이 모두 도착했느냐?”
“예. 물건 검수 및 이동 준비 모두 마무리 진행 중입니다. 치안관리단 쪽은 언제든 남작님께서 방문하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었고, 창고 쪽은 남국인들이 연락을 주었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 합니다.”
“응? 그놈들이 직접? 제콥은 뭘 하고?”
남작은 비밀 창고가 위치한 술집을 운영하는 늙은 주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본래 창고와 관련된 연락은 늙은 주인의 소관이었다.
“요 며칠간은 계속 남국인들이 연락을 주더군요. 얼마 전 제콥이 나이가 들어 몸이 좋지 않으니 창고 관리비를 더 달라고 건방지게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을 무시하여 일을 소홀히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런 간 큰 짓을 했다고? 오랫동안 과분한 은혜를 받고도 감사한 줄 모르는군. 이번 일이 끝나면 그놈부터 처리해라.”
“예. 알겠습니다.”
빌름 남작은 늙은 주인이 직접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소식에 잠시 불쾌함을 느꼈으나, 설마 자신이 모르는 사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남국인 놈들이 늙고 멍청한 평민 놈보다는 일을 제대로 한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영 기분이 나쁜 놈들이지만 타인 공작 전하의 명만은 확실히 처리한단 말이지.’
“그러면 이제 예정대로 창고의 물건들을 옮기는 일에 착수하라고 연락해라. 치안 관리단에는 오늘 자정 방문할 것이다. 시간을 맞추어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야.”
“물론이지요.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제 이틀만 지나면 작년과 똑같이 모든 일이 남작님께서 준비하신 대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혀가 매끄러운 집사의 말에 빌름 남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늘과 내일, 이틀만 참으면.’
그간 타이누 곳곳을 어지럽힌 천한 각성자 놈들과 멍청한 주제에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능력만은 탁월했던 펠레타 공작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았던가. 타인 공작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을 하여 질책하는 와중에도 기어이 귀중한 물건들을 오늘까지 지켜내는 데 성공한 자신이 대견하고 안쓰러웠다.
비록 그 과정에서 동생 두 명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지만 어쩌겠는가. 남작은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타인 공작에게 동생들의 몫까지 값을 쳐 타인 공작에게 자신의 부귀영화를 더욱 확실히 보장받을 셈이었다.
‘타인 공작이라…….’
남작은 연상 작용으로 떠오른 이의 얼굴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프루엘레 1공자가 이번 일을 마무리까지 못 보고 갑자기 돌아가 버린 게 좀 아쉽기는 하군. 빌름 가와 차기 타인 공작의 관계를 잘 드러낼 수 있을 기회였는데 말이야.”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분께서 떠나시기 전 파티 준비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시고서 쓸만한 이들을 추천해 주신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분께서 타이누를 제2의 고향처럼 느끼시고, 남작님을 가족처럼 여기시기에 그리 열심히 도움을 주셨으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긴, 그렇지.”
남작은 몰래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어. 하기는 그분이 아직 어리시던 시절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 이 타이누고, 공작 전하보다도 자주 본 이가 나와 아내 아니겠느냐. 들렀다 가셨다는 소식만으로도 이미 모든 이들이 우리의 관계를 짐작하겠지.”
오래전 타이누에서 몇 년간 머물다 간 공작가의 어린 자식들에게 빌름 남작은 빈말로도 잘해 주었다고 볼 수 없으나, 남작은 자신처럼 프루엘레 또한 그 시절을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있으리라 지레짐작하고 흡족해했다.
“그러면 이제 손님맞이를 위하여 나가 보아야겠구나. 아, 그러고 보니 별저 쪽은 어떻지?”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도 곧 이곳으로 오신다는 전갈을 들었습니다.”
“그래… 곧 모든 골칫거리가 사라진다 생각하니 그 추악한 남색 행각을 또 본다 해도 덜 역겨울 것 같군. 하하핫.”
남작은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여 더욱 말라 버린 얼굴을 움직여 크게 웃었다. 파티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려 퍼졌다.
“자, 이제 가 볼까.”
유더는 제 앞에서 우아하게 손을 내민 키시아르를 바라보다 천천히 그것을 잡았다. 짙은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예복 차림의 키시아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놀기 좋아하는 쭉정이 공작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망토를 붙이지 않아 시원하게 드러난 너른 어깨와 날렵한 허리, 가슴 주머니에 꽂아 장식한 화려한 꽃과 손수건이 누가 보아도 전통적이고 격식 있는 자리를 위하여 온 이는 아니라는 느낌을 한껏 느끼게 했다. 대충 넘긴 탓에 약간 흘러내린 앞머리칼 사이로 장난기 넘치는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제가 설마 이런 예복을 또 입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번은 한결 편하지 않나?”
유더가 걸친 옷도 키시아르의 옷과 그리 다를 바 없이 비슷한 예복이었다. 다만 차이라면 그의 옷에는 안에 걸친 예복을 가리기 좋은 검은 망토가 길게 매달려 있다는 것뿐이었다.
숙소 밖으로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그중에는 펠레타 기사단원들을 통솔하는 나단 주커만과, 이곳에 없는 에버를 대신하여 남은 핀 엘더의 모습도 있었다.
유더는 자신을 본 핀이 눈을 찡긋하며 두어 번 깜박이는 모습을 보고는 마주 고개를 작게 끄덕여 주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간단히 인사를 나누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건 일종의 약속이자 신호였다.
‘드디어 뭔가 알아낸 건가.’
핀은 그동안 유더의 부탁을 받아 다른 단원들 몰래 남국인 상인들이 있는 술집과 여관 근처를 돌아다녔다. 예상했던 대로 단원들은 핀이 슬쩍 사라져 어딘가에 다녀온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유더조차도 핀이 정확히 어떤 방법을 써서 이목을 피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살피러 와야겠군.’
오늘 마병단은 사전에 협의한 대로 인원을 둘로 나누었다. 대부분은 에버를 따라 치안 관리단에 있었고, 나머지는 파티가 열리는 빌름 남작의 저택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
그러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이가 철저하게 초대객만으로 제한되었기에, 본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는 키시아르와 그가 파트너로 지정한 유더 아일뿐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마병단 중 아무도 없었다.
“펠레타 공작 전하… 어서 오십시오.”
본저로 들어서는 길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하인들이 일제히 공손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였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팔을 잡은 자신을 몰래 훑는 그들의 눈초리가 멀쩡해진 왼쪽 눈을 보면서는 놀라움으로, 뒤이어 혐오와 두려움으로 물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유더에게 그 시선들이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대가마냥 시원하게까지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아마 더욱 기겁하였으리라.
대부분의 참석객이 들어선 빌름 가 본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고 화려했다. 작년에 이어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귀족들이 서로 반가운 미소를 건네었고,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홀을 따뜻하게 메웠다.
물론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내용까지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그런 것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소문의 펠레타 공작을, 그리고 타이누에서 일어날 비밀스러운 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