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여태까지 중 가장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 된 코엘트 남작을 뒤로하고, 유더는 키시아르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에버와 칸나가 마법사의 연구실을 숨겨 둔 신비한 마법에 관해 열의에 찬 대화를 나누었으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온 말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이 향할 때만 조금씩 단답을 하면서, 제가 보고 들은 새로운 정보에 대해 생각했다.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와 루마의 연구 사이에는 연관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키시아르가 해석해 낸 일기 내용이 난해하여 바로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저주받은 것들’과 ‘시간’ 등의 단어는 귀에 몹시도 잘 들어왔다.
‘저주받은 것들이란 분명 그가 연구했다는 몬스터를 뜻하는 거겠지. 몬스터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낸다면 시간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지나치게 의미심장하지 않나.’
코엘트 남작과 키시아르는 그 말이 황당무계하다 여겼지만 유더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초대 타인 공작의 스승, 루마가 어떤 연구를 했는지 알았으며 실제로 진짜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마법사 루마 정도 되는 이가 믿기 힘든 무언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서 답을 찾기 위한 연구를 했다는 건, 그게 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이논의 말처럼 유더 이전에도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사람이 또 있었을까?
루마의 곁에 그런 경우가 있었기에 루마와 초대 타인 공작은 시간과 관련된 연구를 하려 한 걸까.
그 연구를 통해 시간을 정말 돌릴 수 있게 되었다면, 루마는 대체 무엇을 하려 했을까.
유더는 키시아르의 손에 들린 낡은 책을 흘긋 보았다.
저 안에 있을 전체 내용이 몹시 궁금해졌으나 고어도 모르는 이가 그것을 보자고 할 만한 좋은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논이 본다면 읽을 수 있을 텐데.’
고민하며 고개를 든 순간, 유더는 저를 보고 있던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눈을 깜박이기가 무섭게 키시아르가 태연히 입을 열어 말을 걸었다.
“이 일기에 관심이 있나? 아까부터 계속 보던데.”
아까 일기 내용을 듣고서 여러 생각에 정신이 팔려 키시아르의 부름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을 때도 그는 저런 눈빛을 했었다.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을 텐데도 어쩐지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그 눈.
키시아르는 여러 수상한 점을 지닌 유더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작은 하나의 조각조차 놓치려 하지 않는다. 의심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 관찰과 기다림의 밑바닥에는 거대한 신뢰와 단단하고도 뜨거운 열기가 얽혀 있었다.
케일루사 황제의 일로 심경이 복잡할 지금도 그의 감각은 여전히 유더에게 향해 있다.
그것을 확신한 순간,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신기하다고 생각하여 잠시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 관심이 생긴다면 언제든 말하게.”
이 답은, 확실히 유더가 그 일기의 내용에 보인 남다른 반응을 알아챘다는 뜻이리라.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그다음 일까지 간단하지는 않았다. 눈치가 비상한 사내의 앞에서 제 비밀에 닿을 만한 여지를 줄지도 모를 일을 하는 건 본래대로라면 지양해야 할 사항이었으니까.
‘비밀이라…….’
유더는 제가 쥐고 있는 비밀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인지 알았다. 인간이 아니라는 걸 몰랐을 때부터 이미 왠지 모르게 신비한 구석이 있었던 이논과 다른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받아들이는 방식부터 다를 터였다.
‘초대 타인 공작의 일기 내용처럼 황당무계하다는 반응 정도만 돌아오면 오히려 다행이겠지.’
거짓말쟁이로 몰리는 건 익숙하다. 부정당하는 말도, 무조건적인 증오를 받아내는 일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어떨까.
얼마 전까지의 유더는 그가 내보이는 저 안온한 신뢰 앞에 안주하며 당당히 제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비밀을 유지하고 감당하는 일이 그리 어렵다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가 앞으로 이룰 대업과 미래에 제 비밀 따위는 필요 없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좋은 관계로 얽혔던 것도 아니고, 끝도 최악이었으니 더더욱 알릴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것이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아니. 이유는 이미 알고 있지.’
그가 유더를 위해 모든 문을 이미 열어 주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유더를 위하여 자신이 느끼는 모든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겠다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발코니에 서서 날아 들어오던 유더를 끌어안았을 때, 세상 모든 것을 다 품에 안은 것처럼 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만큼, 갈등을 먹고 자란 망설임의 크기 또한 그만큼 컸다. 생전 처음 느끼는 불명확한 흔들림이었다. 처음으로 제 힘이 몬스터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때 느꼈던 감정과도 비슷하니, 두려움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했다.
유더는 망설임 끝에 돌아가기 위한 마차를 타기 전,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저는 중간에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지?”
키시아르가 반문했다.
“작은 몬스터가 있는 곳을 찾아가 살펴보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이논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컸지만, 내일 할 일을 위해 페투아멧을 보고 오려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갑작스러운 청에 칸나가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답해 줄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유더를 보던 키시아르가 이내 끄덕이며 허락의 뜻을 표했다.
“좋아. 그렇게 하게.”
마차에 탄 키시아르는 칸나에게 현재 페투아멧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이들이 그 몬스터를 살폈는지 간단히 알려 주었다. 페투아멧을 연구하여 얻어낸 약이 유더가 힘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칸나가 감탄했다.
“그랬군요. 제가 받은 편지에는 간략히만 써 있어서 그쪽은 어떻게 된 건지 잘 몰랐어요. 그러면 펠레타에서 오셨다는 두 분은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도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러지 않을까 싶지만 잘 모르겠군. 사실 이번 일을 통해 그 몬스터의 처분도 뒤로 미루어야겠다고 생각 중이라서 말이네.”
“…그러셨습니까?”
유더조차 처음 듣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번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대로 떠나기 전에 페투아멧을 처분할 줄 알았었다.
“헬렘의 말로 이토록 연구하기 좋은 대상을 찾는 건 기적에 가깝다고 말하더군. 불확실한 점을 하나라도 남겨 두었다가 추후에 문제가 되면 안 될 테니 말이네.”
그리 말하며 유더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그가 말하는 ‘문제’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몹시 확실했다.
아무래도 키시아르는 이번에 유더가 일으킨 일들을 통해 그가 완전히 다 나았다 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문제가 언제든 또 생길지 모른다 생각하게 된 듯했다. 달리 반박할 수 없었기에 유더는 그저 침묵했다.
“그러면 단장님, 혹시 저도 유더를 따라가도 될까요?”
칸나가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어 물었다.
“오기 전까지 제가 하고 있던 일은 거의 다 끝나서 바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 몬스터도 오랜만에 좀 살펴보고 싶었고요.”
“좋네.”
키시아르는 이번에도 흔쾌히 허락했다. 결국 유더는 칸나와 함께 믹과 헬렘이 머무는 집 근처에서 내려야 했다.
“아. 여기야? 정말 평범해 보이는 집이네. 아무도 여기에서 몬스터 연구를 한다곤 생각조차 못 했겠다.”
언젠가의 유더와 비슷한 감탄을 하는 칸나를 뒤로 두고 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문이 빼꼼 열렸다. 믹 슈덴이 유더를 보고는 이내 경계를 풀고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오! 보좌님! 나았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제야 뵙네요. 이 시간엔 웬일이시죠?”
“혹 쉬고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갑작스럽지만 몬스터를 잠시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쉬기는요? 할머니랑 약사님이랑 모처럼 다같이 술이나 마시고 있었는데요. 들어오세요. 뒤의 분은 누구시죠?”
“칸나 완드라고 합니다. 마병단 정과 부단장이에요.”
“오. 전 믹 슈덴이라고 합니다. 반나서 반가워요.”
칸나와 가볍게 악수를 나눈 믹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 곳곳을 짧게 훑었다.
“그런데… 과연 부단장쯤 되시는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그런가요?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라 정말이에요.”
“믹 씨도 굉장히 남다른 분 같으신걸요.”
아무래도 두 사람 모두 악수를 나눈 순간 서로에게서 뭔가를 느끼고 떠보는 듯했지만, 그리 나쁜 의도는 아닐 테니 유더는 묵묵히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술을 마시고 있었다던 믹의 말마따나 테이블 위에 술병을 가득 두고 헬렘과 함께 잔을 나누던 이논이 유더를 보고는 눈을 사납게 떴다.
“뭐야? 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몬스터를 보러 왔을 뿐이야.”
바로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워 다른 쪽 목적부터 말했지만 이논은 믿지 않는 듯 더욱 의심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헬렘이 술잔을 든 채 웃으면서 유더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건강해 보여 기쁘군요.”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얼. 큰일은 여기 약사가 다 했는데요. 나와 믹은 별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했죠.”
그때 칸나가 믹과 함께 들어오는 바람에 그들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