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그래…. 그 일기라는 걸 봐야 확실해지겠다만 가능성은 충분하겠네.”
“일기는 단장님이 가지고 있어.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면 보여 주실 것 같은데……. 혹 가져오면 읽어 볼 수 있겠어?”
“읽을 수는 있지. 그런데 그 말을 하면서 왜 그리 표정이 안 좋은지부터 먼저 듣고 싶은데.”
이논이 눈썹을 매섭게 치켜올리며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그 부분이 네가 오늘 나한테 온 이유라는 확신이 들고 있거든?”
“…….”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이논의 감은 역시 대단했다.
유더는 철창에 매달려 꼬리를 휘두르는 페투아멧을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이 복잡한 상황과 감정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몹시 어려웠다.
“이논. 너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지.”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뭉뚱그려 그렇게 말했지만 이논이라면 제대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
쥐고 있는 정보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유더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최소한으로 두는 쪽이 맞았다.
하지만 그건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을 효용성만으로 판단 가능할 때의 이야기였다. 누구도 온전히 믿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과 다가올 재앙을 막겠다는 목표만을 생각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그때.
“이전까지는 굳이 그걸 알릴 생각이 없었어.”
그렇다고 지나치게 숨기느라 노력하지도 않았다. 유더가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수상하게 보일 여지를 감안하고서라도 움직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나단 주커만 같은 이들에게는 일부러 자신의 수상함을 대놓고 드러내면서 목표를 이루기도 했고, 이논에게는 필요를 위하여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하지만 이번에 그 일기를 빌리게 되면…….”
“단장 쪽에서 네가 대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좀 더 알게 될 테고, 그걸 통해 비밀에 접근하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 그게 걱정된다 이거야?”
“그래.”
“그렇게 목숨 걸고 제 몸 버려 가면서 딱 붙어 있더니, 비밀을 알리는 건 싫다……. 의외네. 난 네가 그쪽에도 비밀을 어느 정도 말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논이 철창으로 다가가 유더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오려 꼬리를 휘두르는 페투아멧의 머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작은 몬스터가 뒤로 벌렁 넘어져 버둥거리는 동안 꼬리 끝에서 독액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럼 그쪽은 너를 그간 상당히 수상하게 봤을 텐데도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거였어?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네.”
“응.”
“응은 뭐가 응이야? 이게 칭찬인 줄 알아? 보통 미친 게 아니라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너나 그쪽이나!”
어이없어하며 대꾸한 이논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볼을 꼬집고 싶은지 손이 얼굴 근처까지 올라와 꿈틀대다가는 간신히 내려갔다.
“일단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하자. 단순히 비밀 자체가 알려지는 게 싫은 거야, 아니면 단장과 관련된 다른 뭔가가 또 있어서 싫은 거야?”
유더는 가슴이 조이는 듯한 감각을 억누르며 최소한의 감정만을 담아 대답했다.
“굳이 말하자면, 후자겠지.”
이논의 샛노란 눈동자가 조금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유더는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입을 벌렸다 다문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그리 좋은 것들만 보고서 여기로 돌아온 게 아니야. 그때는 많은 것이 지금과는 달랐어. 주변 환경도, 사람들도. 전부 다.”
유드레인 아일은 수많은 죽음과 재앙을 보았으며, 어떤 죽음들에는 스스로 관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도 죄인의 이름을 지고 생을 마감했다. 돌아와 많은 것을 바꾸었다 해도 그 사실들이 제 안에서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게 단장님이야.”
“그래. 그 이상 안 들어도 뭐가 그리 걱정되어 죽상이었는지는 이제 대충 알겠다.”
그런데 그래서 뭐? 이논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어차피 이미 수상한데도 그쪽이 뭐든 봐주고 있다면 뭐가 문제야? 내가 보기엔 그냥 네가 하던 대로 할 일 하면 될 것 같은데. 정 고민되면 그쪽한테 가서 나한테 말한 정도만이라도 말하든가. 자세한 건 빼 놓고 큰 것만 대충 말하면 되잖아.”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잘살고 있던 나한테 다짜고짜 쳐들어와 자길 무조건 도우라던 건 쉽고, 그건 어려워? 엉? 내 도움을 장담하던 그 미친 확신은 어디로 갔어? 이거 아주 웃기는 놈이네. 표정 안 좋다고 걱정한 내가 바보다!”
걱정을 했었다고? 그 말에 대해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기어이 이논이 뺨을 잡아 늘렸다.
“그냥 평소처럼 해! 내가 준 약을 먹고 성욕에 불도 붙었었다고 우겼으니까 이번에도 내 이름 대고 빌려오면 되잖아!”
“이논.”
목소리가 너무 커졌다고 말하려 했지만 볼이 늘어난 상태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이논이 다른쪽 뺨도 쭉 잡아당겨 흔들었다.
“아니다. 그냥 내일 당장 내가 가서 단장을 만나는 쪽이 빠르겠군.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쪽이 일하는 데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으니까.”
“진심, 으로 하는, 말이야?”
머리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소리치며 유더의 뺨을 탁 놓은 이논이 어휴 하고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온갖 험한 말이 그의 입 사이로 마구 흘러나왔다.
“진짜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처음이야. 정말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그냥 좀 보통 놈들처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안 되냐? 왜 하고많은 일 중에 사서 이런…… 그리고 나도……. 빌어쳐먹을!”
“미안.”
유더는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그러자 이논이 사과하지 말라며 다시 한번 뺨을 꼬집어 늘렸다. 여태까지는 그가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불꽃처럼 이글대는 노란 눈동자를 보니 아무래도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안 되겠어. 앞으로 넌 날 형님이라고 불러라. 받는 건 개뿔도 없이 속만 태우고 있는데 그 정도 대접은 받아야겠어.”
“…….”
“왜, 그것도 싫어? 어쩔 수 없어. 할아버지나 아저씨 같은 건 내가 싫으니까 그냥 형님 해.”
입을 조금 벌린 채 대답하지 않는 유더를 보며 이논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유더가 대답하지 못한 까닭은 그의 말이 이전 생의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논과의 인연은 이전 생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뒷골목에 쓰러진 유더를 그가 발견하며 시작되었다. 그는 뒤쫓아온 추적자들을 피해 자연스레 유더를 약방에 데려온 뒤 제 동생인 척하며 숨겨 주었고, 그 사건 이후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형님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물론 유더는 그 놀음에 박자를 맞춰 주지 않았지만 그들의 인연이 묘하게도 계속되면서 어쩔 수 없이 형님이라 부르라는 강요도 그만큼 자주 들어야만 했다.
‘치료 한 번 해 주기가 뭐 이리 힘드냐, 응? 네가 짐승이야? 왜 남이 주는 건 무조건 경계부터 하고 난리야? 이게 얼마나 비싼 약인지 아냐? 그렇게 몸 상하는 일 말고도 세상에는 다른 할 일 많아. 그냥 형님 약방에서 짐이나 나르라니까?’
처음에는 이논을 믿지 않았다. 그의 외모도, 환경도 너무나 수상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년간 인연이 이어지자, 적어도 그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내치지 않는 성정이란 것만은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논의 약방은 수도의 가난한 이들에게 늘 열려 있는 곳이었다. 말투는 험해도 대가를 거의 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약을 주는 그를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좋아했다. 신전이나 의원을 찾을 정도의 여력도 없는 이들에게는 그곳만이 유일하게 편히 찾을 만한 의지처였다.
이논은 유더에게도 치료해 준 대가를 받지 않았다. 그는 많은 돈을 내려놓고 가려 한 유더에게 몹시도 단호한 얼굴로 그러느니 그냥 형님 대접이나 제대로 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편지에서도 그러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또, 오랜 시간을 넘어 그가 유더에게 같은 말을 했다.
“…….”
“어린 녀석이 어디서 혼자 다 감당해 먹으려는 나쁜 버릇만 배워서는…….”
유더는 투덜대는 이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