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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41화 (441/805)

441화

묘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로벨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붉은 돌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각성한 이들 중 하나였다. 저를 두려워하는 가족과 친지를 피해 고향을 떠난 뒤, 천신만고 끝에 자신을 도와주는 각성자들을 만났는데 그곳이 바로 나그란의 별이었다.

그가 막 합류했을 때의 나그란의 별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다. 로벨은 나그란의 별에 완전히 몸을 의탁하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현자를 만났고, 그때 나한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자를 그때 만난 적이 있었단 말입니까?”

로벨의 이야기 속에서 알게 된 의외의 정보에 눈을 가늘게 뜬 유더가 물었다.

“네. 하지만 아주 잠시뿐입니다. 그때의 그는 현자님을 몹시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로 유명했습니다. 듣기로는 현자께서 죽어가는 그를 구해 주셨다더군요.”

로벨의 말에 의하면 호산라 또한 그때부터 이미 나한과 함께였던 듯했다. 두 사람이 로벨보다 먼저 나그란의 별에 들어왔기에 언제 처음 합류했는지는 몰랐다. 다만 현자가 이 집단에 이름을 붙이기도 전부터 그를 뒤따랐던 초기 각성자들 중 몇몇이 그들을 남쪽 사막 근처의 도시에서 구해 왔다 떠드는 말을 얼핏 들었을 뿐이었다.

당시는 나그란의 별에 합류하는 이들의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면 눈에 띌 것을 염려하여, 막 거점을 만들던 때였다. 로벨은 자신처럼 서부 출신이며, 평온히 숨어 살기를 원하는 이들과 함께 대삼림 내에 위치한 거점으로 향했다.

그 뒤로는 가끔씩 거점들 사이에 오가는 소식을 접하며 최대한 평화롭게 지냈다. 나한이 다른 각성자들의 구출과 합류를 위해 눈에 띄게 노력하고 있다는 소문이 간간히 들렸으나 로벨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병단의 출범 소식도, 그 이후 점차 조금씩 각성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일도 그들과는 연이 없었다.

그랬던 로벨의 작은 세계가, 이번 일을 거치며 완전히 뒤바뀌었다.

“제가 아는 나그란의 별은 조직이라 할 만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모인 이들끼리 도움이나 주고받던 곳이었지요. 현자께서는 저 같은 이들에게 스스로를 지킬 힘을 북돋아 주셨지, 능력으로 다른 이를 함부로 대하라 하신 적은 없습니다.”

막 합류했던 시절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 상대임에도 로벨은 현자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에 대해 아는 게 지금 말한 정보 이상은 없는 듯 보이는데도 이야기할 때 보이는 눈빛은 온전히 진심이었다.

현자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하지 않으려 노력하던 가일과 두일 형제에 비해 훨씬 허술한 반응에서 조직 내부에 깊이 속해있지 않았던 자다운 티가 나지만, 방식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내보이는 순수한 존경심만은 똑같았다.

‘일단 현자라는 이가 나한과 달리 자신의 정보를 감추려 드는 성향이 있어 보이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있는 자인가?’

“비록 제가 이번 일로 인해 동료라 믿었던 녀석들과 수없이 척을 지게 되었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만… 그분만은 정말 좋으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일에 대해 알고는 계실지 모르겠군요.”

글쎄. 현자가 이번 일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

로벨의 말대로 현자가 정말 좋은 이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유더는 그의 말보다 자신이 거쳐 온 이전 생의 경험을 조금 더 믿었다. 이전 생과 많은 게 달라졌다 해도 나그란의 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내분만은 이미 눈앞에 드러난 지 오래였다.

한때 현자를 맹목적으로 따랐다던 나한.

나한이 지나치게 과격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텐데도 그를 딱히 손대지 않는 현자.

‘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애매하게 연결된 그 둘 사이의 무언가가 분명 이전 생에 일어난 내분과 파멸의 열쇠가 되었으리라. 유더의 경험과 감이 그 진실을 알아야만 나한을, 그리고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현자라는 자의 정체가 이전 생에 내가 보았던 자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반드시 알아내고 싶고.’

“의견을 솔직히 들려주어 고맙네. 많은 도움이 되겠어.”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기회에 해도 좋아.”

“저, 그렇다면… 송구하오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긴장감으로 손을 꽉 맞잡은 채, 로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병단에서 이번에 잡힌 녀석들에게 바로 중벌을 내리지 않고 철저히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파악하고, 다친 부위도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걸 들은 뒤부터, 만약 나한의 말만 믿고서 대삼림에서 일찌감치 도망가지 않고, 마병단을 만나 이야기를 한번 나누어 보는 쪽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이곳에서 머물며 몰랐던 사실들을 더 알게 되고 나니 그때의 선택이 더 아쉬웠습니다.”

마병단이 나그란의 별을 뒤쫓기 시작한 시작점은 나한 때문이었다. 나한을 찾기 위해 나그란의 별을 찾았을 뿐, 아무도 해치지 않은 평범한 각성자들까지 같은 조직에 속했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거나 벌할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로벨과 같은 이들은 나한이 저지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평소처럼 각성자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마병단과 마주쳐 사상자가 나왔고, 그로 인해 나그란의 별 전체가 위험해졌다는 이야기 정도가 본래 알던 정보의 전부였다.

“이번 일이 끝난 뒤부터 각성자를 대하는 서부 사람들의 시선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유더 님께서 제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으셨다면 평생 몰랐을 일이지요. 하지만 이전의 저처럼 그런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아직 나그란의 별 내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로벨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나 마티와 같은 일을 반복하여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삭이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가 나간 뒤, 키시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더는 방금까지 오간 대화를 되짚어 보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다음 순서는 주커만 경입니다만… 불러도 되겠습니까.”

“보좌는 혹 각성자가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대답 대신 뜬금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유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어땠었더라.’

각성자가 나타난 지 2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의 키시아르와 달리, 유더에게 있어 그때는 이미 10년도 훨씬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 다시 생각해 보려면 시간이 제법 걸렸다.

각성하기 이전의 유더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산속 생활에 조금 질린 상태였다. 가끔씩 바깥의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사로잡혔다가도, 목적도 없이 집을 떠나는 게 저어되어 그냥 살던 대로 또다시 하루를 보내던 나날들이었다.

막 각성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가족이 없으니 그의 힘을 보고도 반응을 보여 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고 생활도 이전과 똑같았다. 기껏해야 나무를 패거나 산을 다닐 때 조금 편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우연히 마병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유더는 각성한 이후의 2년을 그렇게 아무런 재미도 없이 혼자 쏘다니면서 보냈다.

‘각성한 이들이 많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실제로 주변에 각성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 내 힘이 뭔가 특별할 거라는 생각도 안 했던 것 같고.’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내 보좌답군.”

오랜 생각 끝에 내뱉은 결론을 들은 키시아르가 농담처럼 답하며 낮게 웃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게는 그것이 대단한 행운이자 목숨의 구명이었지.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니기도 해.”

“…….”

“아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제 살펴본 일기의 내용 일부가 떠오르더군.”

갑작스레 흘러나온 초대 타인 공작의 일기와 관련된 말에 유더의 속눈썹 끝이 순간적으로 작게 흔들렸다.

“그 시대는 마법이란 것이 제대로 체계를 잡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가 아니겠나? 때문에 마법사들이 겪은 혼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만한 부분이 적혀 있더군. 상당히 놀랍지만, 아까 우리가 들은 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내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초기 마법사들의 삶이 적혀 있는 건 일기이니 당연하겠지만, 그게 지금 각성자들이 겪고 하는 말들과 비슷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오늘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니… 어쩐지 일기를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야.”

고개를 든 사내가 유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밤, 우리가 할 일을 끝낸 뒤 같이 한번 살펴보겠나?”

이 말은 일기에 대해 유더가 보인 흥미를 알고 있기에 던지는 소리일까.

어제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그래도 묵직하게, 유더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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