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52화 (452/805)

452화

키시아르는 약속대로 이논에게 그 일기를 주었지만 보좌와 함께 그것을 살피려 했던 일정이 본의 아니게 어그러졌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깊은 대화를 나눈 다음날, 유더는 일어나자마자 그에게 일기의 번역본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 무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직접 자필로 작성한 번역문이었다.

도대체 언제 그런 걸 다 쓰고 있었나 싶었는데 유더가 이논을 만나러 다녀왔던 몇 시간 사이 정독하며 작성해 두었던 필기본이라고 했다.

‘어려운 글을 읽을 때는 필기를 동시에 진행하며 보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되거든. 읽히는 대로 바로 쓴 초고에 불과하니 너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네.’

별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하던 이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번역본은 당장 읽을 여유가 없어 짐가방 속에 넣어 두었지만 돌아가는 대로 곧 살펴볼 생각이었다.

키시아르와 코엘트 남작의 대화가 거의 끝나가는 동안 마병단은 대부분의 짐을 마차에 싣고 떠날 채비를 마무리했다. 남은 건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과의 인사뿐이었다.

유더는 코엘트 남작보다 조금 더 늦게 찾아온 서부 마법사 연합의 수장, 미칼린 펀트와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그는 얼마 뒤 연구 보고를 위해 진주탑에 들렀다가 수도로 올라가 서부 관련 재판들에 참석할 예정이라며, 가능하면 그때 마병단 본부에 직접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물론 거기에 가면 타이스 율만의 얼굴도 봐야겠지만… 그 정도쯤은 참아야 하지 않겠소. 쯧.”

아마 그때 오면 헬렘도 만날 테지만, 그는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모습을 숨긴 또 다른 노마법사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헬렘은 아무래도 그와 직접 인사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던 듯했다.

“그건 그렇고 마병단 서부 지부가 여기 세워질 예정이라 들었는데 정말이오?”

“예. 부디 서부 마법사 연합에서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그야 당연한 것을. 마병단은 우리의 소중한 연구 지원자이자 사선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이지. 코엘트 남작은 빌름 그자보다 훨씬 말이 잘 통하니 앞으로는 걱정할 게 없을 거요.”

미칼린이 호쾌하게 웃으며 장담했다. 그는 빌름 남작의 파티가 열리는 날 거기에 오지는 않았었지만, 이후 일어난 사건과 소문의 난립 속에서 재빠르게 발 벗고 나서 마병단을 도와주었다.

친분이 깊은 귀족들에게 연락을 하여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막고, 코엘트 남작에게도 은근슬쩍 도움의 손길을 보태 준 덕에 유더는 그에 대한 인상이 전보다 더 좋아진 상태였다.

‘사실 빌름 남작이 다시 돌아오는 일을 막기 위해 더 열심히 나선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튼 적절히 잘 나서 준 덕분에 빠른 정리에 도움이 되었으니까.’

빌름 남작에 대한 마법사들의 원한은 아주 짙고도 깊었다. 서부 마법사 연합은 빌름 남작의 재판에도 증인으로 출석해 그가 다년간 그들에게 저질러 온 업무 떠넘기기와 대삼림에서 일어난 일들을 증언할 예정이었다.

미칼린은 빌름 남작이 부디 다시는 타이누에 돌아오지 못할 만큼의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주 길게 한 뒤, 주름이 다 사라질 만큼 속 시원한 얼굴로 키시아르를 향해 갔다. 이번 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운명이 바뀐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미칼린 펀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바뀐 이인 듯했다.

그 다음으로 유더와 작별 인사를 나눈 이들은 로벨과 마티였다. 그간 밤잠을 설치며 깊이 고민했던 듯 눈가가 어두웠지만 마티의 표정은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저… 로벨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해 봤는데, 일단은 공작님께서 제안해 주신 걸 받아들여 보기로 했어요.”

작게 속삭이는 마티의 말을 들으며 로벨이 안타깝고도 사랑에 빠진 사람다운 표정을 지었다.

“능력 적응도 적응이지만…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머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특히 루산 사제님과 함께 저흴 크게 도와주신 에문 님이 서부 지부를 맡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이대로 가면 면목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 부채감은 지니실 필요 없습니다만…….”

유더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제 답을 기다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리며 웃었다.

“소식을 들으면 에문을 포함해 다들 기뻐하겠군요. 물론 저 또한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서부 지부를 통해 연락 주십시오.”

에문은 핀과 함께 루산 사제를 가장 자주 도왔던 단원이었다. 그가 기억 잃은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돌보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던 마티는 그에게 크나큰 고마움과 빚진 기분을 안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존재가 지금은 별것 아닌 듯 느껴질지 몰라도, 유더는 그들이 서부 지부의 분위기를 키시아르의 뜻에 맞게 만드는 데 좋은 열쇠가 되리라 생각했다. 서부 토박이면서 나그란의 별에 대해서도 잘 아는 로벨과 비각성자의 심경으로 딱 부러지게 상황 판단을 할 줄 아는 마티의 조합은 그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지부에 도움이 될 터였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요.”

유더의 미소를 본 두 사람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더니, 갑자기 훅 누그러진 분위기로 웃으며 떠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기억을 되찾은 소수의 비각성자들이 루산을 둘러싸고 아쉬움의 눈물을 찍어 냈다.

“사제님. 언젠가 나중에 또 오셔요! 그때는 더 나아진 모습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구먼요.”

“이 은혜는 정말 죽어도 못 잊을 겁니다.”

“제가 뭘 했다고… 아이고……. 이건 대체 언제 다 만드신 거예요, 어르신들? 제가 제발 좀 쉬시라고 몇 번을…….”

그들이 짠 모자와 장갑, 직접 깎아 만든 작은 선물을 받은 루산도 눈시울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서로 몇 번이나 인사를 하면서도 아쉬움에 차마 손을 놓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조그만 고양이를 품에 안은 에버가 칸나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유더는 오랜만에 보는 니폴렌 반 타인의 편안해 보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프루엘레와 떨어졌음에도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키지 않은 고양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에버의 방에서 조용히 보냈다.

뒤늦게 합류한 칸나는 귀여운 고양이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상당히 놀랐지만, 금방 적응하여 니폴렌을 아무렇지 않게 잘 대해 주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을 바로바로 파악하고 대응하는 칸나를 니폴렌 또한 몹시 편안히 여기는 듯하다고 들었다.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버리려 했던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새끼 고양이가 조그만 입을 벌려 늘어지게 하품을 쩍 했다. 깨처럼 작지만 제법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와 어떡하지. 하품하는 것도 너무 귀여워 미치겠어!”

칸나가 지나친 귀여움에 몸서리를 치며 어쩔 줄 모르는 동안, 고양이가 문득 코에 난 수염과 귀를 쫑긋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반응했다. 그 끝에는 아주 어색해 보이는 웃는 표정을 지은 붉은 머리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니폴렌 반 타인을 이곳에 맡기고 간 장본인이자 그의 큰형인 프루엘레 반 타인이었다.

그는 약속대로 타인 가 내의 후계자 승인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자마자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오자마자 마병단이 도로 수도로 떠날 상황이라 보람이 없다 여길 만도 했으나 그에게는 동생의 무사함을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상관없는 문제였다.

다만 새로 인사를 나눈 칸나와 아직 낯을 익히지 못한 탓인지, 에버와 칸나가 함께 있을 때만은 저렇게 접근을 묘하게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으, 흠흠. 하아. 후우.”

유더는 프루엘레가 아주 크게 결심한 표정으로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정중한 태도로 그녀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다가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치안 유지 일을 돕는 동안 서부의 주민들과 친분이 쌓인 다른 마병단원들도 여기저기서 다양한 이들과 손을 맞잡거나 어깨를 부딪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못마땅한 듯 멀리서 지켜보는 자들도 존재했으나 그런 이들도 차마 앞에서는 대놓고 무어라 말하지 못하였다.

아쉬움의 한숨 속에도 미래를 향한 희망과 웃음이 깃들어 있다는 건 이전 생에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그 낯설고도 평화로운 광경을 지켜보던 유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짐을 그득 실은 마차의 행렬 중앙에 끼어 있는 어느 검은색 짐마차 쪽으로 향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특별함도 엿보이지 않는 그 마차 안에는 놀랍게도 짐이 하나도 없었다. 그 빈 공간을 대신 차지하고 누운 이는 마병단과 함께 수도까지 올라가게 될 단 한 명의 나그란의 별, 호산라였다.

‘아직도 깨지 못했나…….’

외상은 모두 깨끗이 나았고 내상도 거의 다 나아가는 중이라 판단했으나 호산라는 떠나는 날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능력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 본 게 처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며칠이 더 지나도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깨워야 할지 몰랐다.

유더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마차 문을 닫고서 자리에 앉았다. 이전에는 잠깐씩밖에 보지 못해 딱히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1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마르고 허약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유더는 루산이 그를 살피며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본래도 몸이 그리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더 그랬겠죠. 그래도 이동 능력자라니 움직이는 데 큰 문제는 없었을 것 같지만요…….’

그 말대로 호산라의 한쪽 다리에는 몹시 큰 흉터가 있었다. 루산은 그 상처가 선천적이거나 생긴 지 오래된 건 아닌 듯하다고 말했다. 여러 번 치료를 시도한 흔적이 있지만 결국 다리를 절게 된 건 치료에 전념하기 어려운 환경과 본래부터 허약했던 건강 탓이 큰 것 같다고도 추측했다.

‘안타깝지만 때를 놓친 터라 이미 이대로 굳어져 버렸어요. 제가 신성력을 계속 부어 넣으면 좀 더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아주 절지 않게 되는 건 힘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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