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55화 (455/805)

455화

나무를 깎아 만든 긴 탁자 주변에 둘러앉은 이들이 그 말에 일제히 술렁였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잡힌 이들은 전부 죽게 되는 건가? 그, 가일과 두일 형제처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곳을 떠나야 해?”

“-전부 나한 때문이 분명해.”

팔 전체에 가시가 돋아난 여자가 큰 소리로 나한의 이름을 언급하자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어지간한 이라면 중압감을 느껴 입을 다물 만도 했겠지만 그녀는 태연히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수도에서 그 난리를 피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서부까지 가서는 에르시를 돕겠다는 이유로 계속 머물렀잖아. 내가 마병단이라도 발견하자마자 잡았겠어. 다 예견된 일이지!”

“…….”

잠시 조용해졌던 분위기를 깨트린 건 그녀의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젊은 청년이었다.

“말을 이상하게 하는군. 나한이 거기로 간 건 서부 거점의 이사를 돕기 위해서였다는 걸 잊었어?”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말에, 곁에 앉아 있던 소심한 인상의 사내가 어깨를 움찔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자리를 잘못 골랐다 생각하는 표정이 확연했다. 그러나 팔에 가시가 난 여자는 그 말에 지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이사를 도우려 간 거라면 결론이 나자마자 그들과 함께 돌아왔었어야지. 그자가 거기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위험한 짓을 꾸미고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동료를 내쳤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여기 나뿐만은 아니야.”

“내치다니? 내가 들은 것과는 완전히 다르군. 그 형제는 스스로 이곳을 뛰쳐나갔다고……!”

“그만!”

빈정거림을 넘어 언성이 완전히 높아지기 직전, 상석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안경 쓴 남자가 상판을 거세게 두드리며 두 사람을 막았다.

“현자님께서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 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 가장 끝에 앉은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여태껏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량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그제야 머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 사람은 괜찮으니 하고 싶은 말은 뭐든 해도 됩니다. 그러려고 모인 게 아닙니까.”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오히려 순식간에 싸우던 기세를 잃고 얌전해졌다. 팔에 가시가 돋은 여자와 나한을 두둔하던 남자가 모두 죄송하다는 말을 중얼대며 침착함을 되찾고 나자 안경 쓴 사내가 현자를 향하여 물었다.

“현자님, 저희는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사실상 모두 묻고 싶었을 질문이었다. 간절한 시선을 받은 ‘현자’는 난처한 미소와 함께 코끝에 걸린 낡은 안경을 올렸다.

“음… 일단 지금 들어온 소식은 모두 ‘잡힌 것 같다’는 불확실한 정보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호산라 형제가 그곳에 있는데 우리 형제자매들이 그리 쉽게 붙잡혔을까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나한 형제가 그곳에서 에르시 자매를 도우려 노력했다는 말만 들었을 뿐, 확실한 건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 행동 자체는 누구보다도 나그란의 별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지요. 그는 그런 사람이니 말입니다.”

“…….”

참으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나직하게 이어지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듣고 있는 동안,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은 불안하게 날뛰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음을 느꼈다. 나한을 두둔하던 이들조차 그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한 형제를 그곳에 보낸 건 저이니, 이 사람이 책임을 지고 모두에게 사과해야 마땅할 겁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현자님.”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현자는 그들의 목소리가 사그라진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때문에 이 사람은 일단 나한 형제의 연락이 들어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 보겠습니다. 서부에 보내 둔 다른 형제가 있으니 그쪽에서 좀 더 제대로 된 소식이 돌아오기를 기대해 보지요.”

“만약 정말 나한을 포함해 모두가 잡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말로 본거지를 또다시 옮겨야 하는가? 공포와 불안에 물든 사람들의 눈빛을 돌아본 현자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접한 이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을 만큼 다정한 웃음이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여기에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 이 사람도 이전의 일들을 겪으며 나름대로 준비를 해 놓았으니까요.”

“준비…요?”

“사실 몇 달 전부터 우리 형제자매들의 힘에 도움을 받은 인연으로 이곳을 도와주고 있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나한 형제도 아페토 공작가에서 많은 분들을 구해 올 수 있었지요.”

아페토 공작가라는 말에 많은 이들이 놀란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한이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아페토 공작가의 본저에 들어가 갇혀 있던 각성자 다수를 구해 온 건 모두 알았으나, 거기에 그런 배경이 있는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때의 인연을 통해 얼마 전, 우리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는 아주 특별한 분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수도의 가장 중앙에 계신 분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곳까지 도움을 요청해야 할 만큼 절박하고 힘들며, 고통을 겪기에는 아직 많이 어리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수도의 중앙에는 황궁밖에 없다.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 중 어리다는 말을 들을 만큼 젊고 비밀스러운 권력자는 누구인가.

그건 한 사람뿐이었다. 차기 태양이 될 황태자, 카치안 라 오르.

눈치 빠르게 그 정체를 알아차린 이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설마…….”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일단 그 부탁을 받아들여 보고자 합니다.”

서부에 있던 나한과 다른 동료들이 붙잡혔을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보다 훨씬 큰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그저 이 상황 자체에 겁을 집어먹은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어떤 이들은 숨죽여 감춰 왔던 그들의 힘을 필요로 하는 권력자의 이야기에 짙은 흥미를 드러냈다.

현자는 각각의 생각에 잠긴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단순히 우리 모두를 보호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가진 힘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게 누구든 이 사람은 기꺼이 나서고 싶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제게 힘을 보태 주실 분이 있다면, 언제든 편히 찾아와 주십시오.”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 이상 입을 여는 이가 없었기에 회의는 그대로 끝이 났다. 많은 이들이 안심하여 편안해진 얼굴로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도중, 중간에서 내내 소심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내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빠져나온 회의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곁을 지나던 각성자 한 명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여, 포기를 모르는 디에먼! 설마 현자님께 다시 가 보려고? 왜? 이번 일에도 또 지원하게?”

“어, 어. 아니. 나는…….”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제 그만 좀 포기해. 네가 남의 능력을 복사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하지만, 본래보다 훨씬 뒤떨어지게 발현되는 걸 굳이 계속 쓰려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네가 가일과 두일의 능력을 복사했어도 결국 녀석들의 자리는 메이가 가져갔잖아. 이젠 그냥 평범하게 살아도 괜찮지 않아? 네 힘이 필요할 때가 오면 어련히 알아서 부르시겠지.”

“…….”

디에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에게 말을 건 각성자는 어깨를 두드리고는 악의 없는 얼굴로 멀어져 갔다.

***

마병단의 귀환길은 진격하는 불길처럼 빠르게 이루어졌다.

물론 실제 속도는 별 차이가 없었으나, 분위기가 그러했다는 뜻이었다. 모든 일을 잘 끝마치고 돌아가니 마음에 부담감이 없고, 부담감이 없으니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하루 종일 걷고 뛰어도 단원들은 힘든 줄 모르고 웃었다.

떠난 지 며칠이 지났을 때는 대삼림 쪽에서 출발한 이들도 무리에 합류했다. 오랫동안 울창한 숲속에서 햇빛도 제대로 못 보고 뛰어다니느라 피부가 몹시 희어진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마병단원들은 즐겁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유더 또한 가케인과 지미, 그리고 다른 사라인 대삼림 담당 단원들에게 둘러싸여 한바탕 정신없는 재회를 했다.

“유더. 이제 정말 완전히 회복된 거 맞구나! 너와 눈을 다시 마주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 진심으로 다행이야.”

“혀엉! 유더 형! 있잖아요, 저 오늘 밤에 대련 한번 해 주면 안 돼요? 그동안 능력이 엄청 발전했다고 다들 그랬거든요? 보면 진짜 깜짝 놀랄걸요!”

부상의 여파로 아직까지 몸에 붕대를 감고 있기는 해도 표정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밝아진 가케인과, 키가 그사이 또 제법 자란 지미가 양옆에서 신나게 이야기를 해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곁에서는 오랜만에 다시 하나가 된 엘더 남매가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돌아가는 대로 능력 한 번 상대해 보기다, 핀.”

“내가 더 잘할걸.”

“무슨 소리야. 내가 더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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