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여긴…….’
“이전에 이곳에 왔을 때 내가 했던 약속을 아직 기억하나?”
벽이 시작되는 곳을 향하여 다가간 키시아르가 오래된 돌에 손을 짚으며 돌아보았다. 밤바람이 불어와 옅은 갈색으로 변한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리고는 사라지는 광경이 마치 꿈처럼 멀었다.
유더는 그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이전에 이곳에 왔을 때, 유더는 저 벽에 새겨진 수많은 검흔 중 키시아르가 남긴 것은 없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아직껏 초대 황제가 남긴 검흔보다 더 긴 검흔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지만 키시아르라면 혹시 모르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키시아르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다고 말하며 웃고는, 원한다면 나중에 한번 시도해 보겠노라 약속해 주었다. 본래는 신검과 그의 관계가 발표된 이후 보여 주겠다고 했었지만, 정작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 발표되었을 때는 그들이 이미 서부에 있었기에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보여 주고 싶었어. 이제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쁘군.”
그리고 지금, 그는 다시금 그 약속을 지키겠노라 말하는 중이었다.
그간 수많은 일을 겪느라 정작 그가 검흔을 남겼다면 어땠을지 궁금해했던 유더조차 반쯤은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키시아르는 조금도 그때의 대화를 잊지 않았다. 그 사실이 새삼스레 놀랍게 여겨졌다.
그토록 많은 정보들을 기억하고 처리해 나가면서도 그의 내부에 그날의 작은 약속 하나가 계속해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때의 유더 아일은 몰랐던 것들이 지금은 전율이 일 만큼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웃고 있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응시하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검이 없어도… 가능합니까?”
“검? 검이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
웃음을 흘린 키시아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저기 있군.’ 하고 중얼거린 사내는 곧 근처의 풀숲을 뒤져 뭔가를 주워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은 누군가 버리고 간 듯한 나무 막대기였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디의 누군가가 신검 오르의 새 주인이 되었다는 발표가 난 이후에, 갑자기 이 벽에 도전자가 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신검을 모욕했다고 생각하여 화가 난 이들은 이 항의가 제법 멋진 방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덕분에 수도 치안경비대는 목검 쓰레기 치우는 일이 늘어 골치였다더군.”
한 번 사용한 뒤 깨져 버린 목검을 도로 들고 가는 이는 거의 없으니까 말이야. 키시아르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그가 신검의 주인이라는 발표가 난 이후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리라는 건 서부에서 마주친 빌름 남작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설마 그 여파로 이런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기가 막히는군.’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가 든 나무 막대기를 자세히 보았다. 버려진 목검은 제대로 깎지 않은 탓에 손잡이와 날 부분의 구분조차 의미가 없어 보였고, 끝은 볼품없이 깨지고 갈려 너덜거렸다.
검이라기보다는 둔기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 막대기를 키시아르는 가볍게 쥐고 몇 번 휘두르며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검이 생겼으니 문제없겠지.”
“……정말 그걸로 하실 겁니까?”
“그래. 이거면 충분해.”
재활용할 수 있는 건 재활용해 주는 게 좋잖나. 농담처럼 말하고 있으나 키시아르의 눈에서 실제로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소드마스터쯤 되면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실제로도 이전 생에서 유더와 맞붙었던 타국의 소드마스터가 깨진 검날을 주워 거기에 검기를 씌우고 다시 달려드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깨진 검은 검이고, 저 막대기는 목검이라 불러 줄 수준도 되지 못한다. 아이들 장난감 같은 막대기가 키시아르의 검기를 버틸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안 터지기만 해도 다행일 것 같은데.’
다행히 주변에 사람은 없다지만, 검기를 버티지 못한 막대기가 터지기라도 하면 그 여파를 제일 먼저 받을 이는 키시아르였다.
유더가 언제든 제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긴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시아르는 벽면에 남겨진 수많은 검흔들을 눈으로 훑으며 막대기를 어깨에 걸쳤다. 여유로운 맹수처럼 적당한 위치를 찾고 있는 걸음에서는 어떤 불안이나 걱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쯤이 적당하겠군.”
그가 선 곳은 벽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 새겨진 모든 검흔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검흔은 역시 벽이 만들어진 원인이 된 초대 황제의 검흔, ‘제왕의 검흔’이었다.
벽의 끝에서 끝까지, 족히 수십 명쯤은 손을 잡고 나란히 서야만 감쌀 수 있을 듯이 긴 검흔은 그간 천년의 세월이 흐르며 곳곳이 무뎌지고 부식되었으나 여전히 보는 이에게 엄청난 압도감을 선사했다.
사람이 검 한 자루로 남겼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천천히 목검을 들어 벽의 한 점을 가볍게 겨눈 키시아르가 문득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유더.”
“네.”
“초대 황제께서 저 검흔을 남기게 된 이유를 알고 있나?”
“모릅니다.”
“수도를 건설하던 도중이었다지. 모든 과정을 지휘한 대마법사 루마는 마지막 남은 벽을 모두 쌓고 나면 이곳을 떠나겠다고 밝히고 실제로 짐을 싸서 떠나려 했네. 그는 모두가 모르는 사이 사라지려 했던 모양이지만, 마지막 벽을 지나기 전에 황제와 황후께서 사실을 알고 뒤쫓아왔지.”
키시아르가 든 검 끝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황제께서는 마지막 완성을 앞둔 성벽을 검으로 베어 대마법사의 앞길을 막았고, 덕분에 대마법사는 떠나려던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왔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 제왕의 검흔은…….”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며 키시아르의 등 뒤에서 부드럽고도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간절함의 증명인 셈이야.”
앞도, 뒤도, 주변도,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간절했다는 증거이자 증명.
키시아르의 양손을 타고 흘러내리듯 솟은 푸른 기운이 나무 막대기를 단단히 감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막대기 전체를 감싸고도 멈출 줄 모르고 점점 더 짙어져, 끝내는 막대기보다 좀 더 긴 길이로 껑충 뛰어올랐다.
검기 한 줌 내지 못하고 죽는 이가 부지기수인 세상에서 저토록 밝고 선명한 기운이라니.
심지어 그가 쥔 막대기는 검기로 그렇게 감싸였는데도 터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유더의 전신이 그 기운에 반응하듯 전율하며 솜털 끝까지 바짝 일어섰다.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엄청난 광경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내 간절함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볼까.”
키시아르는 목검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가, 내쉬는 호흡에 맞추어 방향을 바꾸어 옆으로 움직였다. 검을 익힌 그 누가 보더라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교본처럼 완벽한 준비 자세가 완성되었다.
보기에는 너무나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저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유더는 알았다.
검을 배우는 모든 이들 중 수련을 멈추지 않고 매일 꾸준히 할 수 있는 이는 열 명 중 하나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버릇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교본 그대로의 완벽한 자세를, 흐트러짐 하나 없이 한 시간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가 다시 천 명쯤 모여도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터였다.
재능이 아니라 오로지 타협 없는 연습으로만 완성될 수 있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키시아르 라 오르의 등 뒤에 서려 있었다.
대체 얼마나 연습했을까. 저 경지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디고, 다시 아무도 모르도록 억눌렀을까. 보는 것만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 무게가 무거워서, 차마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키시아르가 숨을 들이마시며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팔이 움직이며, 깨진 목검의 끝이 허공을 가로로 가르고, 그 뒤를 잇듯 새파란 검기가 소리 없이 어둠을 밝히며…….
“…….”
푸른 빛이 오래된 성벽의 잔해를 달빛처럼 고요하게 뒤덮었다.
날카롭고도 부드럽게 벽을 가르고 사라진 빛이 사라진 뒤, 유더는 한발 늦게 땅을 울리는 진동 속에서 제왕의 검흔 바로 위쪽에 남겨진 새로운 검흔을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제왕의 검흔과 거의 오차 없이 비슷해 보이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흔적이 벽을 선명하게 뒤덮고 있었다.
무어라 말로 할 수 없는 감각에 손과 발끝이 잘게 떨렸다. 키시아르는 검기를 거둔 막대기를 늘어뜨린 채 자신이 남긴 검흔을 그저 말없이 보고 있었다.
몸을 섞었을 때 잠시 느꼈던 것처럼 감정이 공유되는 일이 이 순간 운 좋게 일어나지는 않았기에, 유더는 키시아르가 이 순간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른다 해서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을 직접 보고, 키시아르 라 오르를 지켜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아. 참았던 숨을 감정에 뒤섞어 막 내뱉자, 그 소리에 반응하듯이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유더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소년 같은 얼굴로 웃었다.
“……주변이 슬슬 시끄러워지고 있는데, 도망갈까?”
그의 말대로 이변을 감지한 주변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유더는 아무 말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키시아르가 웃으며 그의 손을 쥐고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