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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82화 (482/805)

482화

다시 돌아온 대기실에서는 키시아르가 상인 몇 명을 붙잡아 두고 소파에 술판을 벌여 둔 채 우아하게 드러누워 무어라 떠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말이지, 내 보좌가 그때 아주 용맹하게 뛰쳐나가서는 단숨에 능력을 사용했는데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손짓 한 번에 절벽이 무너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 유더는 주제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망설임 없이 기척을 냈다. 죽을상을 한 채 키시아르의 곁에 공손히 앉아 있던 상인들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화색을 띠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저 저기 보좌님께서 오셨습니다, 전하!”

‘……보좌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어서 여기 앉으십시오!”

거의 10년 만에 만난 부모 형제라도 마주한 듯 달려온 상인들이 일제히 유더에게 악수를 청한 뒤 그를 키시아르에게로 떠밀었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유더가 누구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 된 태도였다.

“전하,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곧 맡기신 의상의 수선이 완료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시간이 벌써 그리 되었다니 아쉽군. 아직 이야기가 덜 끝났는데 더 듣지 않아도 괜찮겠나?”

“물론 저희도 귀한 말씀을 끝까지 듣지 못하게 되어 정말로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쉽습니다만, 지금 가지 않으면 일의 마무리가 늦어질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예, 저, 저희도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잘 가게.”

상인들이 일제히 인사를 하고는 물러나 사라졌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재빠른지 본업을 의심케 할 정도였다.

유더는 달콤하게 웃고 있는 사내의 곁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 봅니다.”

“그럴 리가. 내게 있어 즐거운 시간은 지금부터지.”

고개를 살짝 든 사내가 자세를 바꾸어 유더의 무릎 위에 머리를 뉘었다.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주정뱅이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붉은 눈 속에 사실 취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유더는 알았다.

“이리 늦게 돌아온 걸 보니 뭔가 알아낸 게 있긴 한가 보군.”

“예. 뜻밖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이라도 왔던가?”

“키올레 다 디아카가 왔더군요. 그것도 디아카 공작의 심부름으로 말입니다.”

키시아르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거 흥미로운걸. 좀 더 자세히 들어 볼까.”

유더는 키올레와 나눈 대화를 적당히 요약하여 설명했다. 광휘궁에 드나든다는 위장 치료사들은 이곳에 없으며 키올레가 그자들을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 디아카 공작의 쪽지 속 정보, 그리고 마지막으로 협력을 요청하고 나서 키올레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들은 부분까지.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 키시아르가 입을 열어 제일 먼저 물은 것은 다음과 같았다.

“키올레 다 디아카가 경고라. 그자는 그럴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을 텐데…… 상대측의 이중 함정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분하고 억울하여 뒤로 넘어가려 했던 키올레가 들었다면 두 번 쓰러지고도 남았을 말이었다.

“그리 확신한다는 건 보좌가 이전부터 그자의 입을 잘 막아 둘 수 있었던 ‘방법’을 이번에도 쓸 수 있다는 뜻이겠군.”

“…….”

정답이었다.

“뭐, 그렇다면 이전에 이미 네게 맡기고 더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으니 넘어가지.”

키시아르는 그 ‘방법’에 대해 더 묻지 않고 몹시 깔끔하게 수긍했다. 이전에 유더의 발현 사건 이후 같은 이야기를 했던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혹 디아카 공작의 쪽지에 있었다던 정보는 어떻게 입수했나?”

“예?”

“심부름을 빌미로 삼았다면 정보가 그냥 적혀 있지는 않았을 테고, 그걸 가지고 온 이 또한 지금의 이야기로는 내용이 뭔지 당연히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대로 화제가 넘어가는 줄 알았던 순간 별안간 훅 찌르고 들어온 말에 유더는 일순 멈칫했다. 일부러 쪽지에서 얻은 정보는 대충 뭉뚱그렸는데 그 짧은 사이 그 허점을 놓치지 않을 줄이야.

과연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유더는 이 난감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순수한 감탄을 느끼며, 이내 깊이 숨을 내쉬었다.

“…개인적으로 그 안의 정보를 파악할 만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이전이라면 이 상황에 처했을 때 좀 더 당혹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답을 내었을 때 상대가 보통 내놓을 결론이라면 유더에 대한 신뢰 붕괴나, 아무리 못해도 그에 준하는 일이 될 터라 여겼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네가 그 정보를 파악했다는 사실을 키올레는 알았나?”

“아뇨.”

“혹 다른 이가 이후에라도 알아차릴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담담히 흘러나간 뒤, 유더는 여전히 제 무릎에 누워 있는 사내의 얼굴을 응시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관능적이면서도 더없이 현명해 보이는 그 얼굴을.

그리고 마침내 그가 유더와 시선을 맞춘 순간, 기다렸다는 듯 전신을 관통하며 흘러내린 짜릿한 감각이 심장을 향하여 일시에 달려들었다.

“……그래, 그렇군.”

키시아르의 눈동자 속에 분노나 의심, 혼란 같은 감정은 전혀 없었다.

그건 그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을 답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는 서부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금도 자신의 힘으로 생각해 보고 ‘답’을 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고요하게 이쪽을 바라보면서.

보이는 것을 넘어선 진실을 향하여 저를 쫓고 있는 사내의 눈빛에서 유더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살아 있는 키시아르를 실감했던 때와 같이 뜨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미약하게 가슴이 저린 듯도 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유더는 그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었던 사항 중 하나를 이번 기회에 털어놓기로 문득 마음먹었다.

“단장님.”

“응?”

“제가 키올레 다 디아카에 대해 이토록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별것 아닙니다.”

붉은 눈이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을 이해하려는 듯 느리게 깜박였다.

“키올레 다 디아카는 하르탄에서 저와 서약서를 썼습니다. 그가 디아카 공작에게 그런 서약서를 쓴 경위를 들키지 않고도 홀로 서약에서 자유로워질 방법을 찾아낼 만큼 똑똑해지지 않는 한, 그자는 저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

“그리 대단한 방법도 아니지요.”

처음에는 단지 키시아르가 알면 귀찮아질까 싶어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그다음에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이쪽에서도 말하지 않기로 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먼저 내어줄 수 없는 답 대신 그것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치 그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듯이, 마침내 키시아르가 놀랄 만큼 환한 미소를 터트렸다.

“그래. 그게 바로 그자를 다룰 수 있었던 비밀이었군.”

“예.”

“협박 정도로도 충분히 통했을 텐데 서약까지 했다니. 내 보좌까지 괜히 피해를 본 건 아닌가?”

“아닙니다. 서약 내용은 총 셋으로, 지켜야 할 부담은 그쪽에만 존재하는 방식으로 작성했습니다.”

유더는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그 세 가지 서약의 내용을 읊었다. 하나, 키올레 다 디아카는 하르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둘, 키올레 다 디아카는 유더 아일을 비롯한 모든 타인에게 앞으로 일방적인 명령 및 결투 신청, 모욕적인 언행을 가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셋, 키올레 다 디아카는 앞으로 스스로 가능한 능력 범위 내에서 유더 아일을 돕는다.

그 모두를 들은 키시아르는 진심으로 몹시 즐거워했다.

“그때 이후로 점점 더 그자가 철이 들었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짜하게 퍼졌다기에 사실 대충 그 비슷한 걸 했을 거라 짐작은 했었지. 하지만 이리 들으니 정말로… 내 예상 따위보다 더 재미있었군.”

“소문이 그렇게 퍼졌었습니까?”

“그래. 그런 상황에서 그자에게 그런 서약을 받아낼 생각을 하다니, 정말로 네가 아니라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일이야. 너무나 유더 아일답다고 해야 할까.”

다시 한 번 웃음을 흘린 뒤, 키시아르는 유더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손가락에 남아도는 헐렁한 반지가 똑같은 반지를 낀 이에게 이끌려 부드러운 입술 끝에 맞닿았다.

“……고맙네. 오늘 알게 된 것 중 최고의 소식이었어.”

입맞춤은 손가락에서 손바닥으로, 그리고 마침내 소매에 가려 있던 손목으로 올라갔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살 안쪽에 지그시 입술을 묻은 사내가 유더를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쳤다.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지만, 지난 며칠간 접촉에 익숙해진 몸은 그것만으로도 아주 쉽게 반응을 일으켰다.

“음… 그러면 나머지는, 돌아가서 이야기할까?”

이곳보다 훨씬 아늑하고 따뜻한 곳에서. 농염한 목소리가 이전보다 한결 낮고 유혹적으로 울렸다. 몇 번을 경험해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 순간만은 디아카 공작이 꾸미고 있을 음모도, 수상한 치료사들의 정체도 전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유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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