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87화 (487/805)

487화

“…제가 여자 쪽 춤도 같이 배웠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하. 나처럼?”

“예.”

춤을 출 수 있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면서 뭘 믿고 그리 확신하듯 말하느냐는 속뜻을 알아차렸을 키시아르의 눈이 스르르 휘었다.

“글쎄. 그러진 않았을 것 같은걸. 함께 춤을 춰 보면 그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지. 춤은 생각보다 상대에 대해 많은 걸 알려 준다네.”

노래라도 부르듯 말을 끝낸 사내는 유더가 무어라 답하기 전에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한 바퀴 돌았다. 옷감을 사이에 두고 두 몸이 완전히 맞닿음과 동시에 이유 모를 아찔한 감각이 스쳤다.

유더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그 감각을 가라앉힌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단장님이 보시기에 저는 남자 쪽 춤만을 배웠고… 그 외에는 또 뭘 보셨습니까.”

“음… 생각보다 더 오래전에 배운 것 같다는 점일까. 아니면 배운 이후에 춤을 거의 춰 보지 않았거나. 기본 동작은 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계속 조금씩 느리게 따라오는 게 그 증거지.”

“…….”

“더 말할까?”

너무나 정확하여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어디까지 추론하고 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유더는 그의 손을 잡은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자신을 깊이 관찰하고 있는 붉은 눈을 도전적으로 마주했다.

“네.”

키시아르가 그리 답할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는 즉시 한쪽 다리를 들어 유더의 무릎 뒤쪽에 얽어 끌어당기면서 맞닿은 몸을 함께 휘었다. 제 몸으로 유더를 나단 주커만의 시야에서 가린 사내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몇몇 동작이 내가 배운 방식과 굉장히 비슷해. 같은 춤이라도 가르치는 이에 따라 사소한 부분이 달라진다는 걸 생각하면 몹시 흥미로운 발견이지.”

말을 끝내는 순간 몸이 정확하게 한 바퀴를 돌아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마치 처음부터 예측했던 듯 오차 없이 이루어진 동작이었다.

키시아르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춤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으나, 유더의 머릿속은 무언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가득했다.

‘…동작이 비슷하다고?’

그야 그럴 수밖에 없을 터다. 유더는 눈앞의 사내에게 춤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말을 듣고도 대체 어디가 같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전혀 모르겠군. 남들도 다 이렇게 추지 않던가?’

키시아르는 제 말이 정답임을 이미 알고 있는 이의 눈빛으로 유더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 심장이 크게 뛰다가, 별안간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군요.”

“그래.”

키시아르가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격정적으로 절정부를 향하여 달려가던 바이올린 선율이 마침내 고점을 찍고 느리게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연습을 끝내고 한 발짝씩 물러서서 인사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수고했다, 나단.”

키시아르는 활을 내린 나단 주커만에게 그간 악기 연주는 안 해도 관리를 아주 잘한 모양이라며 칭찬을 건넸다. 유더 또한 나단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주커만 경 덕분에 잘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나단 주커만의 눈빛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아닌 듯 미묘하게 흔들렸으나 그는 이내 악기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유더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주커만 경께는 전부 알리셨습니까?”

“그렇다고 해야 하나. 눈치가 워낙 빠른 녀석이라 먼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대부분은 이미 알아챈 것 같더군.”

“괜찮을까요.”

“괜찮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주 요청까지 받아들여 준 건 다 생각이 있어서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정말로 반대하거나 싫었다면 지금 같은 반응은 절대 보이지 않았을걸.”

나단이 알고 보면 얼마나 염려가 많고 고집이 센 녀석인지 아느냐며 키시아르가 웃음을 섞어 투덜거렸다. 유더가 보는 나단 주커만은 키시아르의 말이라면 그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명이라도 반드시 수행해 낼 기사이나, 정작 키시아르가 평가하는 그의 성격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유더는 조만간 한 번 그를 만나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겉옷을 걸치고 평소의 차림으로 되돌아온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오늘의 일정과 계획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오늘은 오전 훈련이 모두 마무리되는 대로 디아카 공작의 쪽지에서 얻어낸 정보의 출처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때문에 오후 늦게까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혼자서 말인가?”

“아닙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이전에 주셨던 임명권을 쓸 생각입니다.”

서부로 떠나기 전,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직속으로 두어 자유롭게 함께 일할 수 있는 단원 5인을 선정할 수 있는 임명권을 받았다. 현재까지는 후보만 존재할 따름이었으나 수도로 돌아왔으니 본격적으로 그것을 써 볼 때였다.

“그간 생각해 본 결과, 마병단 내에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이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더군요. 조력자 후보는 거의 정해 두었습니다.”

“좋군. 어떤 이들과 함께 갈 생각이지?”

“서부에서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 준 가케인, 적의 방심 및 침투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준 핀과 힌, 그리고… 의료부 소속이라도 괜찮다면 이논도 넣을 생각입니다. 나머지 한 자리는 아직 생각 중입니다.”

능력만이라면 지미도 출중하지만 지미는 아직 너무 어렸다. 얼굴은 똑같이 어려 보여도 영악함만으로는 마병단 최고를 자랑하는 엘더 남매와 비교하면 솔직함과 순수함이 몹시 큰 아이라 정보 수집에는 맞지 않을 듯했다.

키시아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면 데브란 하르투데도 생각해 보게. 이번에 수도에 남아 있는 동안 스티버와 함께 정체를 위장해 타인 공작의 정보 수집을 전담한 게 그거든.”

“그랬습니까?”

“그때의 이야기를 그에게 한번 자세히 들어보고 결정해도 나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유더는 서부에서부터 생각했던 또 하나의 사항도 입에 올렸다.

“주커만 경을 비롯한 펠레타 기사단이 사라진 나한과 남국인 상인들을 지금까지 계속 추적하고 있는 중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에 대한 부분도 함께 맡고 싶나?”

과연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는 상대였다.

“예. 실은 핀이 타이누에 있는 동안 제 부탁을 통해 개인적으로 그자들이 묵던 곳을 살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벌어지던 일과 관련된 증거는 발견하지 못해 넘겼습니다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런 일을 했었다니, 재미있군. 좀 더 자세히 들려주겠나?”

키시아르의 눈이 반짝였다.

유더는 임명권을 통한 조력자 선정과 관련하여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를 설명한 뒤, 핀이 찾아냈던 정보를 말했다.

“그자들의 소지품에 별똥별과 지평선, 검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핀이 그려서 보여 준 형태를 토대로 개인적인 조사를 거친 결과, 남국에 해당 문장을 사용하는 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조사란 물론 스스로의 기억을 뒤진 것을 말했다.

“과연. 그 부족에 대해 조사하면 그자들과의 연관성이나 흐름을 추적할 수도 있으리란 거군. 고작 다섯이서 거기까지 가능하겠나?”

“핀과 저 단둘이서도 여기까지 알아냈으니 불가능할 건 없지 않겠습니까.”

담담히 대답한 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할 말은 조금 더 직접적인 미래를 담고 있기에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자들의 배후를 알아내는 일은 타인 공작을 잡기 위해서도 중요하겠지만, …저는 그 이후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라.”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은 키시아르가 유더의 말을 고요히 따라 읊었다.

“단장님께서도 이전에 말씀하신 바가 있으나, 그자들이 저지르려 했던 계획은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들어진 작업입니다. 성공했다면 제국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었겠지요. 연결 고리였던 타인 공작이 물러난다 해도… 저는 그자들이 결코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남국인 상인들은 언뜻 보기에는 타인 공작의 평범한 하수인으로, 밑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꿀을 빨다 수틀린 상황이 발생하자 도망친 자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더의 눈에는 오히려 타인 공작이 그자들의 멍청한 꼭두각시처럼 비쳤다.

아마 타인 공작에게 남국인 상인들에 대해 묻고 조사한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내기는 힘드리라.

‘마음껏 부리던 남국인 상인들이 사실 대단한 무력을 지닌 각성자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자에게 뭘 알아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내 보좌의 눈에는 타인 공작보다 오히려 추적 중인 그자들 쪽이 훨씬 더 크고 위험한 적으로 보인다는 뜻이군.”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인 채 걸터앉은 책상 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들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 믿고 맡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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