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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17화 (517/805)

517화

그간 유더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묘하게 삐걱대며 뒤로 물러나거나 혹은 그를 피했던 칸나였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은 복잡한 시선이 유더를 지그시 응시하다가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사라졌다.

유더는 그녀를 위하여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칸나. 내가 취한 뒤로 정확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까.”

정신을 처음 차렸을 때 칸나에게 파티가 모두 끝났다는 말과 키시아르가 황후의 수석 시녀를 보낸 이유를 듣기는 했다. 그러나 이후 더 자세한 설명을 듣지는 못했다.

파티가 끝난 건 좋지만 끝까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잘 끝났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단장님이 네 상태를 보고 가신 뒤로는 아무 문제도 없었어. 다들 즐거워했고, 너하고 내가 황후 폐하의 사람을 만나느라 파티가 끝난 이후에도 잠시 더 머무르다 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고는 신기해했지. 지금은 대부분 마병단으로 돌아갔어.”

키시아르가 없는 사이 칸나가 유더의 곁을 계속 지켜야 할 이유를 만들기 위해, 황후는 유더뿐만이 아니라 칸나에게도 관심을 보이는 척을 하기로 했다.

칸나 완드는 사라인 대삼림에 묻혀 있던 거대한 마정석 광맥의 실체를 면밀히 조사한 공을 인정받아 에버 다음으로 상을 받으러 나간 이였으므로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감히 휴게실에 찾아오려 하는 이도 없고, 유더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마병단의 모두가 안심한 가운데 파티도 무사히 끝났으니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

“황태자와 다른 귀족들 쪽은?”

“속까지 확신하긴 어렵지만… 드러내 놓고 너에 대해 묻는 사람은 없었어.”

“그래…….”

그 정도라면 괜찮았다. 키시아르가 유더의 빈자리를 충분히 가리고 파티를 마무리한 게 분명했다. 잘되어 가던 일에 제가 초를 쳤을까 싶어 날카로운 긴장을 내심 품고 있었던 유더는 비로소 한결 편안해진 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 조금 지끈거리던 머리가 맑아졌다.

‘내가 갑자기 왜 이렇게 심각하게 취했는지도 알고 싶은데… 그 부분은 칸나보다는 키시아르를 만났을 때 말하는 쪽이 낫겠지.’

갑자기 취기가 올라왔을 때는 제대로 무언가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반쯤은 몽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그를 찾아왔다가 돌아간 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했다.

마음을 안정시키던 키시아르 특유의 싸한 향이 아직도 이 공간 안에 은은히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

저야 누워만 있었다지만, 칸나는 자신 때문에 별안간 파티도 다 즐기지 못한 채 이곳에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 계속 묘한 태도를 보이던 참이었으니 보이는 것보다 더욱 불편한 기분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솔직하게 사과하자 칸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붉게 변한 눈가와 귀, 꽉 다문 채 살짝 떨리는 입술을 보며 유더는 그녀가 역시 감정을 상당히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음을 알았다.

“사과하지 마.”

“하지만 나 때문에 파티를 즐기지 못한 건 맞잖아.”

“처음부터 별로 즐겁지 않았어. 나한테서 마정석 광맥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캐내 보려고 눈이 벌게져서는 쓸데없이 말 걸던 사람들을 피하는 것보다 여기 있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그런 짓을 했다고? 누가?”

감히 마병단의 부단장을 상대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귀족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반문하자 칸나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작게 웃었다.

“누군지 알면 가서 또 때려잡아 주게? 됐어. 그러길 바라서 한 말 아니니까.”

“내가 했다는 걸 들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백 가지도 넘어. 이름을 모르면 인상착의라도 말해.”

“됐다니까.”

강하게 고개를 저은 칸나가 잠시 후 시선을 조금 피하며 중얼거렸다.

“싫다는 게 아니고, 어차피 그렇게 귀찮게 군 사람들한테는 나도 내 힘을 써서 다 쫓아내 줬으니까… 너까지 나설 필요 없다는 뜻이야.”

“…….”

마병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제 아버지를 만날까 두려워하여 황궁에 방문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칸나는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재차 깨닫게 될 줄이야. 유더의 표정을 본 칸나의 표정이 방금보다 조금 더 밝아졌다.

“내가 능력을 썼다는 걸 들키지는 않을 정도로 잘 조절했으니 걱정 마. 기껏해야 마병단이 생각보다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많이 알고 있었다는 정도의 경계심만 살 테니까. 그 정도면… 그렇게 나쁘진 않잖아.”

“……그래. 잘했어.”

결국 할 수 있었던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칸나가 왜 저를 피하는지 묻고 싶긴 했지만 아직까지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서둘러 말을 꺼내는 건 망설여졌다.

이전에는 무언가 말하고 싶으면 그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고 바로 말했었는데, 새삼 저도 많이 변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유더.”

그리고 마치 유더의 그러한 망설임을 이미 알기라도 하는 듯이 칸나가 입을 열었다. 막 눈을 떴을 때에 비해 훨씬 누그러진 그녀의 얼굴 위로 유더가 느끼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요즘 널 조금… 피한 거, 알고 있었지?

“응.”

입술을 지그시 깨문 칸나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게…….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널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게 잘 안 되어서… 아니, 어쨌든 그게 네 잘못…은 아냐.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오늘 이 말을 먼저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이제야 하게 되네.”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유더의 탓은 아니라니. 여러모로 이상한 소리였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네가 나와 말조차 나누지 못하고 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굳이 참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해 주면 안 될까.”

“정말로 네가 뭘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야.”

“욕을 해서 나아질 것 같으면 그렇게 해도 괜찮아. 무기를 써도 좋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대체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내가 너한테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전에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라고 했던 걸 잊었어?”

칸나가 기막혀하며 물었다. 찡그린 눈가에 어쩔 수 없는 이를 보는 듯한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맺혔다. ‘아 정말.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든 그녀의 얼굴에는 유더를 향한 변하지 않은 친밀함이 남아 있었다.

“……하긴, 그런 사람이니까 유더 네가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 미친 남작 같은 사람을 상대하다 이렇게 된 거겠지.”

“…….”

갑작스레 당한 공격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키시아르에게 들을 터라 생각했던 말을 미리 듣고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난 그런 네가 정말 좋아, 유더. 그래서… 네가 너무 걱정돼.”

“이제 괜찮아졌으니 걱정하지 마. 아까 그건 그냥 취기였어. 시간이 지나니 멀쩡해졌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길게 내쉰 칸나가 또다시 으으 하고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손으로 박박 문질렀다. 알 수 없는 고뇌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확연했다.

“칸나. 정말 내 문제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내게 말하는 게 그렇게 불편하다면 그냥 단장님께 말씀드리는 건 어때.”

“아니야!……. 아니지만… 그래! 말할게. 이건 그냥, 내 문제야. 내 능력 때문이라고.”

차라리 키시아르에게 먼저 상담하는 쪽을 권하자마자 격렬한 거부와 함께 고개를 쳐든 칸나가 속사포처럼 소리쳤다.

“네 능력?”

그 순간, 유더는 등을 타고 훅 내려가는 싸늘한 소름을 느꼈다. 칸나가 이토록 괴로워하며 제 능력 탓이라고 말할 만한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혹시, 내게서 뭔가 읽었어?”

칸나의 능력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조절을 잘하지 못하게 되면서 주변의 정보를 때로 갑자기 읽어 버릴 때가 있다는 고민 상담을 들었을 때, 어쩌면 유더 자신조차 읽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의 능력이 사람 자체를 읽거나, 기억을 확실하게 들여다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변명을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더 빨랐다.

“……으으으!”

칸나가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을 위하여 진주로 만든 핀을 꽂아 예쁘게 빗어 넘겼던 단발 머리칼 사이로 붉게 변한 귀 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더 자신에게서 읽어낼 만한 정보라면 당연히 이전 생과 관련된 것뿐일 터라 생각했는데, 그 반응은 어쩐지 묘했다.

‘……이전 생과 관련된 편린을 읽어낸 게 아닌가?’

그때, 느리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가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들어가도 되겠나?”

키시아르의 도착이었다. 칸나가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는 벌떡 일어나 문가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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