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바쁘다니요. 뭔가 오해를 하셨군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키시아르가 유들유들한 얼굴로 웃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한량 펠레타 공작다운 미소였지만 황후는 그 웃음에 속지 않았다.
“아일 남작을 홀로 보내기 싫어 따라온 게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그것도 있습니다만, 모처럼 새벽궁에서 황후 폐하를 뵐 수 있는 근사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것도 오늘의 방문 이유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함께 말씀드립니다.”
어이가 없을 만큼 솔직한 대답임에도 키시아르의 웃는 얼굴과 말솜씨는 환상의 조화를 자랑하여 분위기를 조금도 식게 만들지 않았다. 유더는 물 흐르듯 유려한 언변으로 황후와 대화를 나누는 키시아르를 보며 새삼스레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먼저 두 손을 든 건 황후 쪽이었다.
“되었습니다. 공작께서 함께 온 이유는 알겠으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그만 아일 남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황후가 들고 있던 부채를 내젓자 키시아르가 씩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유더는 이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 느꼈던 약간의 긴장감이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임을 느꼈다. 황후 또한 그런 모양이었는지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보다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아일 남작. 파티 이후로 건강에 문제는 없었나요?”
“예. 염려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군요. 초대에 흔쾌히 응해 주었다는 말을 듣고 기뻤으나 혹 대삼림의 영웅에게 괜한 욕심으로 무리를 시키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었지요.”
황후는 파티 때 왜 자신이 키시아르와 유더에게 도움을 주어야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더가 조금도 퀼로체트의 후유증을 겪고 있지 않으며 몹시 멀쩡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안도한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남작을 만나려 한 이유는, 남작이 그간 해 온 일들에 대해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황궁은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지만 백 마디의 소문도 직접 듣는 한 마디만은 못한 법이니까요.”
황후가 유더에게 듣고 싶은 정확한 부분이 어디인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으나 유더는 잠자코 ‘예.’ 하고 대답했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게 궁금하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래요. 그렇다면 우선 남작이 마병단에 오기까지의 삶과 여정이 듣고 싶군요. 깊은 산속에서 살다 수도까지 왔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그럴 마음을 먹게 되었죠? 그때부터 이미 마병단 입단 시험에 붙으리라 확신했었나요?”
‘과연. 거기서부터 묻는 건가.’
유더는 작게 숨을 들이마신 뒤 표정의 변화 없이, 그러나 예의를 지켜 정중히 답변했다.
“말씀대로 제가 살던 곳은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도 반나절을 가야 하는 외딴 산골짜기였습니다. 함께 살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사람을 만날 일이 극히 적어져 각성한 이후로도 제 능력의 수준을 실감하기 어려웠지요.”
그러다 우연히 마병단 모집 소식을 접했고, 스스로의 수준을 파악하고 싶은 욕심에 수도로 오게 되었다는 답변에 황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예의에 밝아 보이고 몹시 침착한 성정으로 보였기에 남작의 실제 나이를 알고 나서는 부끄럽게도 상당히 놀랐었죠. 듣기로는 젊은 나이임에도 동료 단원들을 가르칠 정도로 능력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던데, 그런 부분도 각성을 하며 깨우친 것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부는 제 능력을 시험해 보며 깨달은 부분이 있으나, 그 외의 많은 부분은… 예전에 다른 이를 통해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른 각성자를 만나 배울 일이 있었단 말인가요?”
“예.”
키시아르의 시선이 유더의 얼굴 위로 와 닿았다. 유더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 비슷한 이야기는 이전에 사라인 대삼림에서 칸나와 가케인을 비롯한 동료들에게 잠깐 한 적이 있으니 키시아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터였다.
다만 그때와 달리 유더의 비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깊은 부분을 추측하고 있을 지금의 그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할지는 짐작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었죠? 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여러 사람?”
“…한 사람이었습니다.”
황후는 유더가 산속에서 살던 당시 기연을 만나 다른 각성자에게 여러 가지를 배운 모양이라 짐작하는 듯했다. 각성자가 나타난 이후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인적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거나 방랑의 길을 택하기도 했기에 그리 생각하면 아주 허무맹랑하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남작을 가르칠 정도의 인재였다면 마병단에도 도움이 될 듯한데, 어떤가요? 현재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나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유더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몹시 어두워졌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어딘지 먼 곳을 보는 듯 메마른 눈빛에 황후는 유더가 언급한 이가 이미 오래전 죽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녀는 상대의 좋지 않은 기억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사과하는 대신 조금 돌려 말하였다.
“그래요. 아쉽군요. 하지만 어떤 인연은 만남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지니는 법이지요. 남작이 그 만남으로 인해 지금 이곳에서 큰 뜻을 펼치게 되었으니 제국 전체가 그 인연에 고마워할 겁니다.”
유더는 몹시 낯선 말을 듣는 느낌으로 눈을 깜박였다.
‘제국 전체가 고마워할 인연이라.’
이전 생을 생각하면 누구도, 심지어는 키시아르 본인도 그리 여기지 않을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그때의 삶이 시간을 되돌려 돌아온 지금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분이 묘한 건 마찬가지였다.
황후는 화제를 돌려 마병단에 들어온 이후에 유더가 했던 일들에 대해 물었다. 붉은 돌을 회수하러 갔던 때 일어났던 일부터 시작해 서부 파견 임무와 타이누에서 있었던 사건들까지, 그녀의 질문 범위는 몹시 폭넓고도 자세했으며 생각 외로 깊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부분들에 대해 질문하면서도 유더를 가르친 상대가 누구인지 물었던 것처럼 특이한 부분을 찌를 수 있는 건 황후가 그만큼 편견 없이 폭넓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질문에 답하는 이가 불편해할 만한 선은 넘지 않고 부드럽게 질답을 이어 나가니, 조용하고 숫기가 없다고만 알려진 그녀의 대외적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게 여겨졌다.
‘성정 자체가 조용한 편인 건 맞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변화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군. 오히려 정보를 파악하는 능력이 대단한 편 아닌가.’
바람에 쓸리는 억새처럼 마냥 부드럽고 소담하게만 보여도 그것이 황후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어떤 부분에는 더욱 강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황후가 강함을 보일 수 있는 대상은 케일루사 황제와 관련된 부분이리라.
유더가 황후에 대해 파악하였듯, 황후 또한 유더에 대해 필요한 만큼은 파악한 듯했다. 그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으로 유더를 바라보며 이전과는 조금 다른 성질을 띤 질문을 했다.
“아일 남작. 다른 이야기지만… 듣자 하니 이전에 공작과 함께 폐하를 뵈러 태양궁에 왔었을 때, 조금 놀라운 이야기를 했었다지요.”
그녀가 유더를 부른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이것일 터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소식을 접하고 나서도 정말 가능한 일일지 확신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나 개인적으로는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어려울 만큼 희망적인 소식이기도 했어요. 폐하께서는 이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도 없는 듯 행동하셨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남작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그때와 지금, 남작의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을까요?”
황후는 태양궁에서 키시아르와 유더가 황제를 만나 식사를 했을 때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때 오간 이야기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으며, 오직 유더의 의견만이 알고 싶다는 뜻을 확연히 드러낸 눈동자가 깜박임 한 번 없이 또렷하고도 간절하게 빛났다.
유더는 황후가 꾹 깨문 아랫입술을 보며 여태까지 중 가장 신중하고도 분명하게 대답했다.
“예. 제 의견은 그때도 지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폐하를 위하여 움직일 생각입니다.”
“…….”
부채를 쥐고 있던 황후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공작은 어떻습니까.”
그녀의 시선이 유더를 넘어 조용히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키시아르에게로 향했다. 자랑스러운 무언가를 드디어 드러낼 기회를 얻었다는 듯 웃은 키시아르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제 의견 또한 변하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이전에 드린 말을 아무리 무시하시더라도, 저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제 보좌와 함께 움직일 생각입니다.”
“아일 남작의 의견대로라면 공작 또한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말인가요.”
“믿음이란 불가능을 두려워할 때 찾아오지 않는 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