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47화 (547/805)

547화

“그건… 설마 각성자의 힘입니까?”

“정확히는 각성자의 힘에 오러를 섞은 물건이라네. 이러한 형태를 만들어 내기에는 오러가 가장 적격이거든.”

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힘을 압축하여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한 것으로, 키시아르가 지닌 힘이라면 모두 섞을 수 있는 듯했다. 사내는 대행진 때 비밀로 넘기고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스스럼없이 모두 설명해 주었다.

“일전에 비슷한 걸 본 적이 있겠지? 그때는 공기를 튕기며 오러를 섞고, 거기에 ‘밀어내는’ 힘을 살짝 사용했기에 빠르게 쓸 수 있었지만 이렇게 둘 이상이 섞이면 만드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심력이 소모돼.”

말은 너무나 간결하게 들렸으나 실제로는 조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해낸 적 없는 놀라운 일을 했다고 말하면서도 키시아르의 표정은 그저 태연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네. 간단해 보이지만 힘이 많이 소모되는 녀석이라 실제로는 힘 조절을 연습하고 내부의 균형을 맞출 때나 거의 쓸 뿐이니까.”

“내부의 균형을 맞춘다는 건 뭡니까.”

“내가 지닌 힘들 사이에서 어떤 한 가지만 너무 비중이 커지거나 적어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작업이라네. 마법을 많이 쓰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다른 힘들도 그만큼 뽑아내 주는 편이 좋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똑같이 하지.”

키시아르는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 그러자 붉은빛을 띤 구슬은 사라지고, 이번에는 금빛과 푸른빛이 도는 힘의 구슬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더 주먹을 쥐었다 펼 때마다 색도, 느껴지는 위압감도 전혀 다른 구슬들이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계속되던 행동이 끊어진 것은 마지막으로 처음 불러냈던 것과 같은 붉은 구슬을 다시 불러냈을 때였다.

지금까지 저 사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 왔는지, 그 고통스러운 시간의 결과물이 저 작은 구슬 안에 모두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 힘을 자신의 혈육을 살리기 위해 쏟아부으려 하고 있었다.

고요히 마주한 시선. 그저 그뿐. 오가는 말은 없었음에도 유더는 그보다 더한 감정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치솟은 의지, 그 자체였다.

***

“나한, 나한이 돌아왔다!”

거칠고 황폐한 남부의 사막. 그 사이에 감추어진 나그란의 별들이 모인 마을에 때아닌 고함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를 막 통과한 한 사람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멀리서 보아도 헷갈릴 수 없을 만큼 몹시 눈에 띄었다. 한쪽 얼굴을 뒤덮은 선명한 화상 흉터와 다른 한쪽 얼굴에 자리한 매끈하고 차가운 피부. 옷으로도 감출 수 없을 만큼 확연하게 드러난 전신의 부상 흔적과 오싹하리만큼 퀭하게 응시하는 시선을 보며 모두 감히 쉽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얼어붙은 채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을 한번 죽 돌아본 나한은 잠시 후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왜 다들 그런 얼굴이지? 내가 죽은 줄 알았나?”

그제야 모든 이들이 주박에서 풀려난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나한을 평소 기껍게 따르던 이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였고, 그를 꺼리던 이들은 서로 놀라움과 꺼림칙함이 가득한 시선을 교환했다.

마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이들과 나한이 회의를 위해 사용하는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건 한바탕 난리가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어떻게 된 거야, 나한. 우리는 당신과 다른 형제자매들이 꼼짝없이 모두 마병단에 잡혀 죽었다고만 생각했어.”

“불운하게도 죽지 않았지. 다른 형제자매들 중에는 나처럼 돌아온 이가 없었나?”

“그래. 너뿐이야. 당시 거기에 있었던 네가 그걸 모른다고?”

“그때 우린 모두 흩어져 있었으니까. 나도 돌아오는 게 고작이었고.”

담담히 대답한 나한을 보며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뭐가 그리 당당해? 너 혼자 살아 돌아온 게 자랑이야? 널 믿고서 거기까지 간 다른 녀석들의 생사는 알 수도 없는데 너만 살아남았다는 게 말이 돼?”

“매크. 진정해.”

“진정? 이게 진정할 문제야? 저 자식 때문에 우리 서부 거점은 완전히 박살이 났어! 그토록 잘 지냈던 녀석들이 너 하나 믿고 따라갔는데, 돌아와서 고작 한다는 말이 자기도 모른다는 것뿐이라니!”

유독 화를 낸 이는 서부 거점의 이사가 결정된 뒤 그곳을 떠나 남부로 온 각성자였다. 분노로 떠는 그의 몸에서 거대한 뿔과 가시가 솟아나자 나한의 옆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어나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라도 살아 돌아왔으면 다행이라 여겨야지, 우리를 위해 그 누구보다 헌신한 나한 형제를 대상으로 뭘 더 바라는 거야? 책임을 지고 죽기라도 하라고?”

“어이가 없군. 나한 형제가 그 형제자매들을 강제로 끌고 가기라도 했어? 에르시 자매를 도우려고 움직인 거잖아! 모두 스스로 결정하고 각오한 뒤 움직인 거야! 거기서 불운한 일이 생긴 건 모두 마병단 탓이지, 나한 형제의 탓이 아니라고!”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현자를 따르는 이들이 일어났다.

“너희는 매번 나한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하지. 하지만 이 모든 일에 나한의 책임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어?”

“현자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나서라고 말하신 적이 없는데, 왜 저 녀석만 매번 나서서 이런 일을 만드냔 말이야! 우린 평화롭게 살고 싶을 뿐인데!”

“누구도 네게 평화롭게 살지 말라고 한 적 없어. 나한과 우린 단지 그 평화를 얻지 못한 채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움직일 뿐이라고!”

그동안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물구멍이 완전히 뚫린 것처럼 언성을 높이는 이들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끼지 않은 이들이 겁에 질려 눈치를 보았다.

결국 나한을 둘러싼 회의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금방 파했다. 누구도 제대로 된 의견 교환을 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나한은 차가운 시선 속에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나섰다.

“나한 대장. 괜찮아? 서부 거점에서 온 형제자매들의 신경이 많이 예민한 탓에 분위기가 계속 안 좋았었어. 험한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 그런 사람들은 일부야. 다친 곳들은 어때. 치료도 제대로 못한 것 같은데… 누가 약 좀 가져와!”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한마디도 하지 않던 나한의 입에서 드디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이 직접 구해 왔던, 혹은 도움을 주었던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현자께서는 왜 보이지 않는지가 더 궁금한데.”

“아, 현자님께선…… 지금 여기에 없어. 그게…….”

나한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린 이들이 우물거리며 시선을 마주했다.

“이번 일을 해결하고 마을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수도에… 가셨대. 몇몇 사람들하고 같이…….”

“……수도?”

나한의 한쪽 눈이 움찔 움직였다. 그 작은 반응만으로도 어깨를 움츠린 이들이 이내 어렵사리 대답했다.

“어어, 응. 나는 자세한 건 몰라.”

“현자가 직접 수도에 갔다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더 자세한 걸 아는 형제는 없나?”

“셰이먼, 네가 그때 회의에 참석했었지?”

“그게…….”

셰이먼이라 불린 이는 불안한 얼굴로 나한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제가 알고 있는 정보가 몹시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는 이의 눈빛이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수도의 중앙에 있는… 아주 특별한 분이라고 했어. 이전부터 우리들을 도와주었던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알아듣지 못한 이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나한이 비각성자만큼이나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일제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나한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동료들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는 순간에도 그들의 주변에서는 차갑고 불안한 눈을 한 다른 각성자들이 마치 이방인을 보듯 살피며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자가 마을을 떠난 지는 얼마나 되었지?”

“꽤 되었어… 서부에서 너희가 전부 잡히거나 죽었을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온 다음 거의 바로 가셨으니까.”

“그래, 그랬군.”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사근사근하게 느껴져 오히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나한을 따르는 이들조차 순간적으로 오한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들은 재빠르게 나한을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그… 나한. 네가 이번 일에 우려를 표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현자님도 어쩔 수 없으셨을 거야. 우린 너까지 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걸……. 이 방법이 최선이라 말하는 그분의 뜻이 옳다고 생각했어.”

“그래. 일단 치료부터 마치고, 현자님께 연락을 해서 확인해 보자. 우리가 도울게.”

“호산라가 있었다면 바로 거기로 갈 수 있으니 편했을 텐데…….”

무심코 호산라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이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의 질책 어린 눈빛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리고 나한은, 놀랍게도 얼굴을 가린 채 웃었다.

“나한……?”

“왜, 왜 그래?”

“그게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을까?”

“뭐?”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직한 목소리 사이로 점점 온기가 사라졌다.

“머리가 아프군. 그래… 확실히 확인을 해야겠어.”

***

밤의 어둠이 내린 태양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이라도 한 듯 고요했다.

유더는 마차에서 내려 희고 웅장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오늘, 케일루사 황제의 운명이 갈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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