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화
“첫 번째 마병단원 모집 때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에 공고를 전했습니다. 외진 지역들까지 소식이 전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햇볕이 비치는 아름다운 마병단장실.
종이 뭉치를 한 손에 든 채 앉아 있는 키시아르의 앞에 여러 사람이 시립한 채 차례대로 보고 중이었다.
첫 번째 보고자는 오랫동안 키시아르의 곁을 지켜 온 부관 나단 주커만으로, 그는 첫 번째 마병단원 모집 작업을 실질적으로 진행한 경험이 있어 두 번째 모집 작업에도 손을 보태는 중이었다.
본래는 마병단원들만의 힘으로 진행해야 할 일이지만 경험 없는 이들에게만 맡기기에 마병단은 아직 인력도, 여유도 다소 부족하다. 한 번의 초보적인 실수도 지금의 마병단에는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집단이 구성원의 초보적인 실수를 관대히 넘기고 바로 수습할 수 있으려면 모두에게 그만한 경험이 쌓여야만 하는 법이다.
때문에 키시아르는 두 번째 단원 모집을 펠레타 기사단과 마병단이 합동으로 진행하도록 계획을 짰다. 이번에 나단 주커만을 비롯한 펠레타 기사단에게 일을 배운 마병단원들이 세 번째 모집부터는 도움 없이도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미래를 길게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사실 나단 주커만을 비롯한 펠레타 기사단이나, 마병단이나 서로 불편할 만도 한 일이었지만 불만을 토하는 이는 없었다. 펠레타의 공작이자 마병단장인 키시아르를 사이에 두고 양립하는 두 집단의 사이가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몹시 좋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펠레타 기사단원들은 여태까지 마병단에 자주 방문했으며, 수확철 축제와 서부 파견 임무를 비롯한 여러 사건들에서도 가까운 위치에서 협동해 왔다. 게다가 그들은 마병단원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평민 출신이었고 자신들을 이끄는 키시아르를 주군으로서 절대적으로 따르고 존경하기도 했다.
때문에 성향이 비슷한 마병단원들과 펠레타 기사단원들 사이에는 특이하게도 거의 친구 같은 정이 다소 쌓인 상황이었다.
나단 주커만이 모집 공고와 관련된 보고를 모두 마친 뒤 뒤로 물러나자 이번에는 정과 부단장 칸나 완드가 나섰다.
“2기 모집과 관련하여 쏟아지는 문의 때문에 임시로 해당 업무를 맡고 있던 정과 전체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행정부 소속이 되기를 원한 타과 단원들도 오늘부터 바로 해당 업무에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여태까지 단원들은 능력 훈련을 하고 무언가를 배우는 일에 하루 대부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옥 훈련의 성과로 모든 단원들이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잘 알았다. 글자와 숫자를 모르는 이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때문에 키시아르는 잘 가르쳐 성장한 단원들을 이제 각자의 희망 사항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능력의 성질에 따라 신과, 술과, 정과로만 나누었던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구분이었다.
전투 능력이 미흡하고 행정 업무에 더 소질이 있는 이들은 본격적으로 그 부분을 맡고, 사람을 잘 다루는 이들은 단원은 아니지만 마병단에서 일을 하고 있는 각성자들을 이끌게 되었다.
전투에 뛰어난 단원도 물론 중요하지만, 마병단이 앞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일을 잘하는 이들을 뽑고 내부 구조를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건 키시아르가 이미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일이기도 하였으며 오랫동안 마병단의 성장을 지켜보았던 유더가 원했던 바이기도 했다.
키시아르는 마병단의 구조 변혁을 앞두고 유더에게 여러 번 의견을 들었다. 그 결과 완성된 이번의 대대적인 인사이동과 내부 변동은 유더가 이전 생에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전시켰던 사항들을 받아들여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완성된 상태였다.
“좋군. 차질 없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한동안은 계속해서 자세히 보고하도록.”
“네.”
키시아르의 평을 들은 칸나의 눈빛이 힘있게 빛났다. 전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었음에도 그녀의 눈빛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보다 더 할 수 있다는 의욕과 욕심으로 불타는 중이었다.
사실 이번 업무 분담 이후, 칸나를 비롯한 부단장들은 여태 이 모든 사소하지만 필수적인 일들을 키시아르가 대부분 혼자서 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먹는 식사도, 입는 옷도, 마병단 건물의 유지와 관리도 무엇 하나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음을 전에는 잘 몰랐다.
단원들이 짐을 나누어 들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단장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모든 일을 해 왔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의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칸나의 다음으로는 에버 벡이 나섰다. 그녀는 특유의 침착한 얼굴로 빠르게 보고를 시작했다.
“마병단 지부 설립 예정 지역의 귀족들이 예상대로 반발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하지만 예상보다는 그 수가 적기 때문에 1차 출발 예정은 그대로 진행해 주셔도 될 듯합니다.”
현재 키시아르는 재상과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도움을 받아 지부 설립 소식 발표와 동시에 그 토대를 다질 단원들을 1차로 먼저 각지에 보낼 예정이었다. 그들은 설립 예상지의 땅과 건물을 확보하는 한편, 해당 지역에서 마병단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인원들을 1차로 걸러 내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1차 파견 단원들이 일을 진행하는 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수도의 마병단 본부로 재차 연락을 보내면 이제 2차로 키시아르를 비롯한 단 내 수뇌들이 움직일 예정이었다.
키시아르는 이 사실을 딱히 비밀로 두지 않고 세상에 당당히 발표했다. 아직까지도 키시아르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예전과 지금 사이에는 몹시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이름을 드러낸 키시아르가 마병단장으로서 움직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제법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한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놀랍게도 이번에 황제를 대신하여 태양궁에 침입한 몬스터의 배후 조사 건을 맡게 된 카치안 황태자의 일도 한몫을 했다.
펠레타 공작이 마병단 2기 모집을 발표함과 동시에 황제의 이름으로 황태자에게 그런 일을 맡겼다는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흘러나온 게 과연 우연일까?
여태까지 황태자가 황제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하기 그지없는 명제였다. 그런 황태자가 황제를 위하여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맡았다는 사실에 수많은 귀족파 인사들이 동요했다.
디아카 공작 측도 당혹을 금치 못한 듯 평소와 달리 곧바로 이렇다 할 반응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들은 멀쩡히 달려 있는 줄 알았던 손발이 갑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머리를 두들긴 정도의 충격을 맛보았으리라.
그러나 귀족들이 느낀 충격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황제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서면이 아닌 본신을 드러내어 회의에 잠깐 참석했다. 몇 분 안 되는 참석이었고, 그것조차 곧 죽을 듯한 기침과 함께 끝났지만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기는 충분했다.
‘황제가 이제 정말 다 죽어 가는 것인가? 아픈 모습을 숨기고 치료를 받는 것조차 포기할 정도로?’
‘세상에. 마병단이 이리 급히 2기 모집을 하는 이유도 역시 그 때문일까?’
‘황제가 차후의 거취를 두고 황태자와 은밀하게 거래를 했다는 말이 돌고 있다. 태양궁에 침범한 몬스터 처리 건은 그 시작일 뿐…….’
‘한번 디아카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황태자가 두 번은 못 할까. 몸이 회복되자마자 황제의 손을 잡은 걸 보면 역시 이건…….’
당연히도 그 기침은 연기였고, 황제가 노린 것도 이러한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케일루사 황제도, 키시아르도 이번 일이 디아카 공작과 그의 든든한 지지자들에게 엄청나게 유의미한 한 방이 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머리가 멀쩡하다면 황태자가 곧 변명을 할 테니 어떻게든 수습은 될 터였다.
하지만 이 공격이 일단 먹혔고, 잠시나마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는 게 중요하다.
카치안 황태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디아카 공작가의 완벽한 수족이 아니다.
지금의 황제가 죽게 되면 당연히 디아카 공작가의 시대가 열릴 줄로만 알았던 이들이 처음으로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이번 일에는 의미가 충분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자들이 이 충격에서 수습될 즈음이면 폐하께서 새로운 충격을 한 번 더 안겨 줄 테고, 그 혼란을 틈타 마병단 2기 모집과 지부 설립은 반대 없이 잘 마무리될 예정이지.’
유더는 키시아르의 뒤에서 다른 이들의 보고를 들으며 앞으로 있을 일들을 생각했다.
마병단 2기 모집과 지부 설립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된다. 유더가 보기에 황제와 황태자 건은 마병단이 내실을 다지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키시아르가 공들여 빚은 미끼였다.
마병단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칼을 갈았던 이들도 이 놀라운 미끼에는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터다.
한 나라의 황제를 미끼로 쓰다니. 기가 막힌 일이지만 황제도, 키시아르도 그런 일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사실 미래의 마병단이 가지게 될 위상을 생각해 보면 지금보다 더 최적의 시기는 또 없었다.
‘현재까지는 모든 일이 잘 흘러가고 있는데…… 딱 하나. 나그란의 별이라는 변수가 조금 신경 쓰이는군.’
유더는 급하게 달려온 정보부원들이 제게 쏟아 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그들은 현자가 머물던 숙소에서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을 많이 가져왔다. 거기에는 서부에서 사라진 뒤 여태 잡을 수 없었던 나한이 멀쩡한 모습으로 수도에 나타났다는 놀라운 정보 또한 함께였다. 현자가 현재 황태자의 곁에서 머물고 있기에 나한과 마주치지 않았다지만, 언제까지 그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한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엘더 남매와 가케인은 하나같이 나한과 그의 동료들이 현자 측에게 대단히 적대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리 놀랍지 않은 보고였다.
‘이전 생과 많은 게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나그란의 별 내부의 분열은 그대로 계속되는 건가.’
나한은 같은 각성자를 여간해서는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건 이미 맞붙어 본 유더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현자, 그리고 나한. 둘 다 몹시 위험한 자들이다. 유더는 키시아르를 따라 곧 수도를 떠나야 했기에 가능하면 변수를 남겨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저번 식사 자리가 끝나기 전, 키올레 놈에게 몰래 신호를 남겼으니 눈치가 있다면 곧 찾아오겠지.’
유더는 이전 황가 가족들의 1부 식사가 끝나고 카치안 황태자가 떠나기 직전, 다른 이들 몰래 키올레의 주머니 속에 바람의 능력을 사용하여 작은 쪽지를 밀어 넣었었다.
키올레를 제외한 이들이 보면 그걸 보낸 이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겠지만, 당사자라면 누가 보냈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철석같이 알아들었으리라.
‘아무리 키올레가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알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좌가 오늘 따로 건의할 안건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에 대한 부분을 이제 들어 볼 수 있겠군. 이야기할 수 있겠나?”
그때, 마지막으로 스티버가 했던 보고가 끝났는지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살짝 휜 눈은 유더가 방금까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유더는 나그란의 별과 키올레에 대한 생각을 싹 날리고 입을 열었다.
“아, 네. 새로운 지부 건립과 단원 모집에 앞서 반드시 했으면 하는 일이 있어 오늘 회의 전에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무엇이지?”
“마병단 차원에서 각성자용 힘 제어구를 만들어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