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화
“요즘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 들었는데, 잠깐 이야기를 좀 할 수 있겠나?”
호산라는 가빠지는 호흡을 간신히 진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 온 이래 마병단장 키시아르는 한 번도 그를 직접 심문한 적이 없다. 호산라는 그 이유가 자신의 가치가 그만큼 별 볼일 없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레짐작하여 오히려 안심했다.
하지만 그가 하필 지금 기사를 대동하고서 여기에 온 건 왜일까.
마병단장이 굳이 이 시간에 여기까지 홀로 와 자신을 찾을 만한 이유라면…… 혹시 나한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아까 가일과 두일이 말했던 이야기 정도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심장이 가쁘게 마구 뛰어 댔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기절하겠군. 차라도 먼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나단. 차를 준비해라.”
“네.”
“아, 아, 아닙니다…….”
호산라는 나단 주커만 쪽을 감히 쳐다보지 못한 채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 건, 필요, 필요 없습니다.”
저 기사가 차를 타는 게 마병단장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떤 의미로는 더 무서울 것 같았다. 그가 내놓은 차를 한 모금이라도 마신다면 그 즉시 며칠 내내 악몽을 꾸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호산라의 필사적인 목소리와 파랗게 질린 얼굴을 잠시 응시하던 키시아르는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차를 가져오라던 명을 도로 취소했다. 호산라는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키시아르의 시선에서까지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
“…….”
침묵 속에서 키시아르는 그저 떨고 있는 호산라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호산라는 한참이 지나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사내를 머뭇거리며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정통으로 마주친 시선 앞에서 잠시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아…….’
이토록 가까이에서 마병단장을 본 건 처음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누군가의 외모 따위는 조금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는데도 눈앞의 얼굴을 본 순간에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없이 편안하게 꼬아 올린 무릎. 그 위로 겹쳐 올린 우아한 양손.
고압적이리라 예상했던 눈빛은 의외로 부드럽고 침착했다. 그는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이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그저 언제까지고 그렇게 앉아 자비롭게 기다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기도, 불쾌함도 없이 지그시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
이상하게도 머리가 아득하게 멍해지며 몸의 떨림이 점차 가라앉았다.
두려움조차 잊고 한참을 멍해져 있던 호산라는 사내가 문득 눈을 휘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경악이 뇌를 작게 두드렸다.
‘내가 무슨 짓을……. 감히 마병단장을 똑바로 쳐다보다니.’
호산라가 당혹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키시아르가 웃으며 물었다.
“감상은 잘 했나?”
“저, 는 아무것도…….”
“뭐, 내가 잘생긴 건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으니 이런 일은 익숙하네. 오죽하면 내 보좌조차도 단장의 장점은 잘생김뿐인 것 같다며 몸소 인정해 준 적도 있었지.”
“…….”
“여간해서는 뭔가를 쉽게 인정하는 이가 아닌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말을 하더란 말이야. 정말 귀엽지 않나? 그러니 지금 자네가 이렇듯 넋을 놓은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거야.”
뭘까. 호산라의 머릿속이 일순 혼란에 물들었다.
여전히 무섭기는 한데, 들려온 말이 너무나 고상한 말투인 데 비해 내용은 이상하고 경박하기 짝이 없어 아주 기묘하게 느껴졌다.
지금 누가 누구를 귀엽다고 한 것인가? 제가 뭘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호산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을 사내가 그린 듯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럴 때는 청자도 함께 동조해 주어야 모처럼 잘생김을 자랑하는 맛이 나지 않겠나? 혼자 떠드는 건 아무리 나라도 조금 쑥스러운데.”
“그…. 아…….”
호산라는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 아닌 대답을 흘리다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자신의 잘생김을 뻔뻔하게 자랑 중인 저 사내가 정말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 마병단의 수장이자 황족 출신 공작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병단장이… 저런 성격이라고는 들은 적이 없는데…….’
“자, 내가 왜 여기에 왔을지 짐작하는 바가 있나?”
혼란에 빠져 있는 호산라에게 사내가 질문을 했다.
“저와 굳이 이야기하실 부분이 있다면… 나한 님에 대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래. 그자가 최근 수도에 나타나기는 했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야.”
“예?”
호산라가 고개를 쳐들었다. 키시아르가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다’라고 말했으나 그의 귀에 들린 건 앞의 한마디뿐이었다.
맙소사. 나한이 살아 있었다. 게다가 수도까지 왔다는 걸 보면 장거리 이동을 버틸 정도로는 몸이 멀쩡한 모양이었다. 호산라는 뜨거워지는 눈가를 느끼며 입가를 막았다.
“나, 나한 님이 수도에……. 그게 정말인가요.”
“그가 살아 있다는 건 이미 확실했으니 놀라울 일은 아니지. 중요한 건 그가 무엇 때문에 잘 도망치던 것조차 접고 여기까지 왔는지가 아니겠나?”
순간 호산라의 머릿속에 가일과 두일이 했던 이야기가 또다시 스치고 지나갔다.
요즘 수도에서 목격되었다던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
현자를 따르는 측근들과, 현자로 추정되는 이의 인상착의.
만약 현자가 정말로 여기에 와 있다면, 나한이 뒤를 이어 나타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게 과연 온건한 용무일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
“혹 이미 들었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수도에 나그란의 별에서 온 각성자들이 제법 드나들며 귀족들 사이에서 황태자의 치료사로 이름을 날리는 중이네. 그중에는 자네들이 현자라 부르는 자도 있는 것 같더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를 쫓듯 나타난 나한. 이 두 상황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 보는 건 타당한 추측이겠지.”
그렇지 않나? 마병단장이 웃으며 말했다.
‘현자님이, 황태자의 치료사……?’
일순 호산라의 머리가 현기증으로 아찔하게 돌았다.
현자가 나그란의 별을 지키기 위해 언제부턴가 높으신 분들과도 어느 정도 연을 이어 두기 시작했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 연 덕분에 나한도 도움을 받아 아페토 공작가에 잡혀 있던 각성자들을 구해 오지 않았던가.
그때 나한이 그 도움을 받아들인 건, 현자가 ‘이건 그저 나그란의 별을 지키기 위한 비밀스러운 수단 중 하나일 뿐, 우리를 돕는 귀족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정체는 알지 못한다. 그들과 이 이상 연을 이을 생각도 없다.’고 장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현자가 정말 귀족들과 연을 끊기는 했었을까?
얼마 전, 황태자의 측근 중 한 사람이 나한과 그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두통을 치료하라 명했던 때가 떠올랐다. 명목상으로는 두통 치료이지만 사실상 병증으로 두문불출한다는 황태자를 위해 그들을 불러들여 먼저 시험해 본, 지독히도 위험한 수작질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 나한이 호산라에게 무어라 물었었던가.
‘호산라. 현자는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할까. 황태자 말이야.’
그리고 호산라는 무어라 답했었나?
‘그분은 좋은 분이시니까… 이런 위험한 일로 저희를 두 번 부르시진 않겠죠. 아마도요…….’
‘그래. 그러길 바라야겠군.’
그때는 그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크게 중요하다 여기지 않았다. 나한이 황태자나 귀족들과 더 연관될 마음이 없다는데 다른 이들이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한과 자신이 사라진 뒤 굳이 현자가 수도까지 올라올 이유라면…… 그가 귀족들 사이에서 정말 치료사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면, 그럴 만한 원인으로 짐작되는 건 그때의 일뿐이었다.
나한의 능력도 사실상 치료를 위한 능력은 아니다. 현자와 그의 측근들이라고 비슷한 흉내를 내지 못할 건 없었을 터다.
‘내가 너무 억측을 하는 걸까.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그래서 나한 님이 만약 남부 거점에 도착하신 이후 그걸 알게 되었다면.’
호산라가 아는 나한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반드시 직접 현자를 만나 의도를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수도에 그를 잡아들이려 눈을 새파랗게 뜨고 있는 마병단원들이 얼마나 많은지 개의치도 않고서.
호산라는 나한이 현자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듯 보여도 거기에는 그만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걸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현자의 인간됨에 감화된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나한은 그 누구보다도 나그란의 별과 각성자들을 위해서라는 목적에 충실했다.
더러운 권력을 손에 틀어쥐고 있는 자들에게 자비와 아양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동료들을 구하고 자생하겠다는 목적과 꿈.
그건 그들이 사막에서 현자를 처음 만나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을 함께 지었을 때부터 계속되어 온 약속이었다.
그런데 나한이 그 약속이 깨졌다고 판단하게 된다면.
현자가 그것을 부정하지 않거나, 혹은 나한을 이전처럼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가 만나본 나그란의 별 출신 각성자들은 일관되게 나한과 현자의 불화를 이야기하더군. 그가 귀족을 존재 자체로 증오한다는 건 이미 우리도 알고 있네. 그런 이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황태자의 치료사가 된 현자를 도우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키시아르의 느릿한 말을 듣는 동안 목구멍이 바짝바짝 탔다. 마른침을 아무리 삼켜도 목구멍이 바늘을 삼킨 듯 따끔거리기만 했다.
“-어느 쪽이 이길 거라 생각하나?”
“……무, 슨 말씀이신지.”
“나한과 현자가 싸우게 될 시 누가 이길 것 같냐는 뜻이네.”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던 호산라의 어깨가 우뚝 멈추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현자님은, 저희를 아끼고 지켜 주십니다. 나한 님이 다소 거친 면이 있으시기는 하지만…… 그분도 저희를 위해 행동하고 계시니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습니다.”
“그런가? 장담할 수 있나?”
“…….”
“그렇다면 서부 사건 이후로 자네를 비롯하여 마병단에 잡힌 동료들을 찾으러 오는 이가 아무도 없는 건 왜일까.”
“그건……!”
“마병단이 무서워서라는 말은 말게. 그건 이 상황에서 답이 되지 않을 테니까.”
호산라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저는,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호산라. 내가 자네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기보다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조금 더 깊은 생각을 해 보겠어. 자네라는 발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 나한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좋을 거라 생각하지? 나한이 극도로 귀족을 싫어한다는 건 우리 마병단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것을 스스로 어긴 현자가 정말로 그에게 자비로우리라 생각하는가?”
호산라는 나직한 목소리를 피해 귀를 막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 상황이 평화롭게 해결될 거라 믿지 않으면서, 모순을 눈치채지 못하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
“나… 나가…….”
눈 안쪽이 미친 듯 뜨겁게 쑤셨다. 호산라가 헐떡이며 중얼거리는데도 키시아르는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자, 이쯤에서 한 가지만 물어보아도 되겠나?”
“…….”
“나는 이번 일을 알게 된 이후부터 단원들을 시켜 우리가 보호 중인 나그란의 별 출신 각성자들에게 모두 같은 질문을 한 번씩 해 보았는데, 아무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해 주지 않았거든. 아니, 애초에 질문 자체를 듣지 못했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으면 좋겠는데. 그러기 위해 왔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사내가 완벽한 모양을 띤 입술을 벌려 물었다.
“…….”
“자네는 현자의 능력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일순 모든 소리가 멈춘 듯했다.
분명 뭔가가 들렸는데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잠시 후, 호산라의 시야에 나단 주커만이 비쳤다. 그 남국인 기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별안간 치솟은 두려움이 먼지 가득한 공기 같았던 호산라의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는 섬뜩한 감각 속에서 방금 들은 말을 아주 희미하게 다시 일깨워 냈다.
공포가 오히려 머리를 맑게 만든다. 그건 아주 이상한 감각이었다.
‘아…….’
호산라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렸다. 그는 이유도 모른 채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현자, 현자님의 능력이라뇨. 그건…… 그건 제가……. 저는…….”
알고 있다. 굉장히 자연스럽게, 나그란의 별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힘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치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를 모두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입을 틀어막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이제야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찾아들었다.
‘대체 이게 뭐야…….’
“역시 대답하지 못하는군.”
키시아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다면 다시 만나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장신의 그림자가 침대 위로 드리웠다.
호산라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그 자리에 그대로 웅크려 있었다.
“정신을 뒤흔드는 능력을 깨부수려면 마찬가지로 정신을 뒤흔드는 혼란이 필요하다지.”
호산라의 방을 나선 키시아르가 여상스레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네 앞에서 겨우 질문을 인지할 수 있게 된 걸 보면 과연 효과가 있기는 한 모양이다, 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