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화
나단 주커만이 약이 든 짐꾸러미를 들고서 목표했던 곳에 당도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심을 다하여 움직이는 소드 마스터의 육체란 평범한 사람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고 강력한 법이었다.
그는 묘한 향과 피 냄새가 아직까지도 풍기는 장소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묻어 버린 용병에게 꽂혀 있던 유더의 검이 나뒹구는 자리 뒤쪽에서 희미하게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은 아까 키시아르가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던 장소였으며, 각성자가 아닌 나단 주커만의 코로도 맡을 수 있는 향이 풍기는 곳이기도 했다. 남국인 기사는 짐꾸러미를 움켜쥔 채 조용히, 그러나 저벅이는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몇 발짝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발걸음이 이어질 때마다 점점 더 긴장감이 날카롭게 신경을 찔렀다. 언제든 적이 튀어나온다면 벨 수 있도록 다른 한 손을 검집에 얹은 채, 그는 언덕 끝에 서서 아래를 향하여 시선을 내렸다.
긴장감이 최고조로 치솟으며 전신의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참 적절한 때에도 왔구나, 나단.”
지친 듯 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 억눌린 목소리가 어둠을 삼킨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그것이 제 주군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나단 주커만은 빠르게 검집에서 손을 떼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전하.”
“여기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그의 발 바로 아래, 나무끼리 뒤엉킨 공간이었다. 나단 주커만은 황급히 짐 속에서 잠시 빛을 낼 수 있는 마도구 구슬을 꺼내 들고 그곳을 향하여 조심스레 내려갔다. 침식되어 깎인 절벽 아래의 빈공간처럼, 그곳에도 교묘하게 만들어진 움푹한 공간이 존재했다.
희미한 빛에 드러난 키시아르는 유더 아일을 안은 채 그곳에 몸을 기대어 앉은 모습이었다.
깊고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는 사내의 얼굴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표정했다. 아까 타이누에서 보았던 2성 발현자처럼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도, 몹시 힘겹게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게 좋겠어. 유더가 조금…… 평소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통에 빠진 맹수처럼 작게 헐떡이던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새로운 침입자의 접근을 인식한 듯 사나운 눈을 쳐들었다. 열기에 침식된 새카만 눈동자는 나단 주커만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 거칠게 반들거렸다. 그의 앞에 서자 익은 과일나무 바로 아래 선 듯 향이 아주 짙게 풍겨 잠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헐떡대는 와중에도 거부감이 짙게 드러난 그 눈빛을 보자 아무래도 곁에 쉽사리 다가가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단 주커만은 두 사람 모두를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느리게 몸을 숙이며 입을 열었다.
“명하신 대로 제가 아일 경을 데려가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약을 먼저 먹이시겠습니까.”
그건 키시아르의 상태를 가늠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의 명을 따라야 하는지, 아닌지가 그 답에 따라 갈릴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침묵을 지키던 키시아르가 아주 작게 웃었다.
“……먼저 먹이는 쪽이 낫겠지. 꺼내 다오.”
나단 주커만은 약을 꺼냈다. 그러자마자 그가 건네려 하지 않았음에도 손안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약이 보이지 않는 실이라도 달린 것처럼 허공으로 이끌려가 키시아르에게로 뚝 떨어졌다.
키시아르가 약을 감싼 종이 포장을 풀며 제 품에 안긴 이를 불렀다.
“유더.”
유더 아일의 시선이 돌아갔다. 평소보다 몇 배는 기민한 모습으로 숨을 크게 헐떡인 사내가 무어라 웅얼거렸다.
“…자꾸, 그때…도…참고……. 이번에는…….”
반쯤 잠겨 맹수처럼 그르렁대는 소리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게 확연히 느껴지는데도 키시아르는 개의치 않고 그를 부드럽게 얼렀다.
“그래. 알아.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일단 이걸 먼저 먹어 보게. 하는 데까지는… 그래도 해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게 나란 인간인 것을.”
“…….”
“이것만 해 보고 안 되면 그때는 정말로 따를 테니……. 응?”
유더의 몸이 조금 멈칫한 틈을 타 키시아르는 약을 입에 털어 넣듯이 물었다. 잠시 후 그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고개를 내렸다. 웅얼대던 목소리가 먹혀 들어갔다. 나단 주커만은 주군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지켜보는 대신 시선을 깊이 내렸다.
“으음…… 으……. 흣…….”
약을 먹이는 것을 거부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입맞춤에 응하는 것인지 모를 듯한 느낌으로 창백한 손이 허우적거렸다. 그 손에 제 손을 내어 준 키시아르가 흘러나오는 호흡까지 모조리 삼키며 몇 번이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황족 출신 공작이 직접 약을 꺼내어 성인 남성에게 먹이는 모습이라니. 직접 앞에 있는 게 아니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잠시 후 키시아르가 비로소 깊은숨을 흘렸다. 빛에 드러난 입술에 젖은 물기가 번진 모습이 음외한 분위기를 풍겼다.
“괜찮으십니까.”
“괜찮기를 바라야겠지.”
자신의 안위를 묻는 질문을 향한 대답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사내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
“발견하기 직전까지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서부에서 받은 그 축복이 효과가 있기는 했더군. 돌아가면 그 각성자를 무슨 일이 있어도 수도로 데려와야 할 것 같아.”
“…….”
“그런데 말이야…… 남의 심장을 여러 번 떨군 이가 정작 정신을 차리자마자 뭐라고 했을지 짐작하겠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도 키시아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을 억누르는 무언가를 잠시나마 뿌리치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참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혼을 내더군. 네가 올 걸 기억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위험할 뻔했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고 있으나 키시아르의 눈빛은 한없이 보드라웠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무언가를 머금고 있는 아슬아슬한 모습과는 반대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약이 효과가 있는지 기다려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발현 때를 떠올려 보면 어떨지 모르겠군.”
키시아르는 유더 아일이 2성 발현을 했던 때에 대해 나단 주커만에게도 정도 이상으로 자세히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상태가 좋지 않아 파티장에서 격리 후 예전에 머물렀던 작은 궁에 여파가 꺼질 때까지 머물도록 했다는 것만이 설명의 전부였다.
하지만 키시아르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그때의 유더 아일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약이 잘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단 주커만은 유더 아일이 타인에게 넘겼을 마법사의 약을 조금 아쉽게 떠올렸다. 지금 그게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터다.
하지만 저 남자라면 아마 다시 돌아가도 저보다 더 급한 이에게 약을 내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시아르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입술 끝을 서늘하게 올렸다.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단. 네게 내릴 명을 수정하마.”
“무엇입니까.”
후우. 유더를 닮은 열기를 머금은 주군의 숨결이 울려 퍼졌다. 곧 풀릴 족쇄를 뒤흔들고 있는 맹수를 앞에 둔 듯한 예리한 느낌이 나단 주커만의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유더는 내가 옮길 테니, 너는 오두막까지 가는 길을 안내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라.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면 짐을 두고…….”
끊어질 듯 이어지던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잠시 후 이전보다 더욱 깊이, 그리고 참지 못한 사나움이 배어 나오는 숨결 속에서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주변을 수습 후 목적지로 먼저 떠나라. 나는 나중에 뒤를 따르겠다.”
나단 주커만은 그 명이 뜻하는 바를 침묵 속에서 깨달았다.
유더 아일의 발정기가 가까워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건 떠나기 전부터 이미 예정된 바였다. 때문에 키시아르는 본래대로라면 유더가 발정기에 돌입하는 대로 즉시 자신과 분리한 뒤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을 짜 둔 상태였다.
그러나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유더의 발정기가 터지고, 키시아르는 자신의 계획을 꺾었다. 그는 처음으로 부하에게 온전히 뒤를 맡기고 여기서 제게 일어난 돌발상황을 온전히 끌어안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보호도 필요로 하지 않고서 홀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로지 제 품에 있는 이의 뜻에 응하고 온전히 그만을 위할 시간을 가지기 위하여.
“…….”
주군을 두고 가는 부관이라니.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향해야 할 목적지는 황태자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한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주민이 몇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 지금 막 발정기에 돌입했을 유더 아일을 데리고서 눈에 띄지 않게 진입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일 테니, 어쩌면 이 방도가 더 좋을지도 몰랐다.
키시아르와 유더의 안전을 나단 주커만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어려우리란 점만을 제외한다면 그러했다.
그러나 나단 주커만은 ‘변하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주군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너도 변하기를 바란다’던 말 또한 함께 머리를 두드렸다.
나단 주커만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잠시 후 충직한 기사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키시아르의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로 드러났다. 수면제를 먹이고 나서 잠시 잠잠해지나 싶었던 유더 아일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르렁대기를 반복했다. 괴롭게 달아오른 호흡이 이전보다 한층 더 강해지자 키시아르가 고통스럽게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그러나 그의 얼굴 위로는 알 수 없이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결론은 나왔군.”
나단 주커만은 자신의 주군이 처음으로 참는 것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늘어진 유더를 추슬러 안은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기증이 이는 듯 고개를 젓는 바람에 나단 주커만이 부축하려 했으나, 그는 눈빛 하나로 그 도움을 거절했다.
비각성자인 나단 주커만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인내를 유지하며 기어이 유더를 제 품에서 놓지 않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한 사내가 땀이 맺힌 이마를 돌렸다.
“안내해라.”
나단 주커만은 거침없이 빠르게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에서 유더를 안고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주군의 목소리와 기척이 느껴졌으나 약속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작은 오두막 앞에 짐을 내려놓은 뒤, 그곳을 지나쳐 숲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희미하게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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