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카치안 황태자의 흔적을 찾기 위한 여정에서 뜻밖에도 새로이 얻게 된 큰 수확.
유더는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나단 주커만이 자리를 비우는 시기를 틈타 키시아르에게 ‘가시덤불의 마린’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전달했다. 키시아르는 마린이 카치안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싸우다 스러졌던 붉은 들판 폭동 쪽에 더욱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 ‘왕의 패’에 대한 불만이 엄청났었던 모양이군. 그런 일들이 이후로도 계속 있었나?”
“아닙니다. 가장 크게 들고 일어났던 사건이 그때였고, 이후로는 규제가 엄격해지고 재해가 많이 일어나면서 그렇게까지 큰 규모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붉은 들판 폭동이란 거대한 페투아멧과 몬스터 떼로 인해 박살이 나 버린 서부의 유민들과, 불법 격투장과 마약의 난립으로 살기 힘들게 된 남부 제국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않은 황제와 귀족들에게 항의한다는 목적을 내세우며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머릿수가 늘어나니 당연히도 통제가 불가능해졌고, 황제만을 노린 마린처럼 조금씩 다른 목적을 지닌 이들도 합류하면서 결국에는 제국 전역의 무력이 집합하여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유더는 자신의 사형 집행 죄목 중 하나로 지목되었던 그 사건을 새삼 떠올려 보았다.
그의 죄목에 붉은 들판 폭동이 들어간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당시 폭동을 진압한 후 했던 뒤처리에서 마병단이 다른 집단들에 비해 간결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병단은 쓸데없는 고문 대신 정보 추적에 능한 각성자들을 이용해 죄의 경중을 판단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엮였다고 판단된 자들은 풀어 주기도 했다. 그것을 두고 유더의 정적들은 ‘능력’의 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유더가 폭도들과 내통하여 풀어 준 게 분명하다고 비난했다.
물론 그건 비난한 당사자들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저 나오는 대로 내뱉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당시 카치안 황제가 유더의 손을 들어주며 논란이 사그라지긴 했으나, 결국 그 일은 유더의 수많은 죄목에 한 줄의 역사로 남겨졌다.
‘어쨌거나…… 그 진압이 효과가 있긴 했지. 이후 사람들이 두 번 다시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지 않고 완전히 조용해졌으니까.’
날이 갈수록 재해가 심각해지면서 사람들은 불만 표출보다 안전한 곳에 사는 귀족들에게 바닥을 기어서라도 생존하는 데 더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치안 황제도 그때 이후로…….’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그는 사건이 모두 마무리된 뒤 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타국들과 교류를 했고, 정력적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과시했다. 특히 붉은 들판 폭동 진압 때 도움을 주었던 남국의 부족과는 더욱 왕래가 잦아졌으며, 가짜 현자에게 처음으로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믿는 신하라고 공언하곤 했던 유더를 때로 도가 지나치게 경계하곤 했던 것도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듯싶었다.
때문에 유더 또한 자연히 마병단을 떠나 다른 곳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반복되는 거대한 재해에 관심을 가지는 시기도 늦어졌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듯 보여도 한편으로는 많은 것이 바뀐 사건이었다.
“아…… 그런 거군. 이해했네.”
모든 말을 들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축이 서부와 남부라면 서부 쪽은 이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상관없을 테고, 남은 남부가 중요해지겠군. 네가 전부터 남국인 상인들과 불법 격투장에 유독 관심을 보인다 싶었었는데, 그 이유였나?”
“네…… 뭐, 그런 셈입니다.”
대답하면서 유더는 남국인 상인들의 수상해 보이는 정체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았다.
이전 생에는 재해 대비와 마병단 건사가 중요해 타국과 관련된 외교나 정치 같은 부분은 상대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그런 부분까지 관심을 두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이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던 데다 황제 또한 유더가 시킨 일 이상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남국은 붉은 들판 폭동 때도 시기 좋게 잘 끼어들어 이득만을 얻어 갔다. 그게 과연 아무런 숨겨진 뜻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을까.
이젠 답을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키시아르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걱정 말게. 이번에도 서부와 마찬가지로 잘될 테니까. ‘붉은 들판’이란 이름이 다시 생겨나지는 않을 거야.”
“…….”
붉은 들판 폭동에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마지막 전투가 일어났던 거대한 들판이 전투가 끝난 이후 피와 붉은 독 가시덤불로 뒤덮여 온통 새빨갛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이후 본래의 이름을 잃고 ‘붉은 들판’으로만 불리게 되었으며, 다시는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위험한 곳이 되었다.
그런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음에도 키시아르 라 오르는 늘 유더가 드러내지 않은 가장 깊숙한 부분을 건드리는 말을 적시에 하고는 한다. 흔들리는 줄도 모른 채 유더의 가슴 속에서 파도처럼 흔들리던 감정들이 그 말을 들은 순간 더없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이번에는 당신이 있으니 그렇게 되겠지.’
유더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부드럽게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을 유더는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발정기가 지난 이후 처음 닿는 접촉은 어쩐지 이전과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똑같은 접촉인데도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한편으로는 농밀한 느낌이 있었다. 그 낯선 감각이 유더에게 발정기가 정말로 끝났다는 사실과 더불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한 무언가를 불러일으켰다.
분명 키시아르가 제 곁에 있고 가장 가까운 곳에 붙어 있는 걸 아는데도 더 닿고 싶었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자라 갈증이 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키시아르의 붉은 눈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이 일렁였다.
“……다음 목표지인 초대 타인 공작의 흔적이 남은 마을까지 이 속도대로라면 하루쯤 더 걸릴 거야. 피곤하지는 않나?”
“네. 괜찮습니다. 단장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아주 멀쩡하지만…… 걱정해 주니 기분이 좋군.”
키시아르가 보란 듯 유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부드럽게 비볐다. 지금쯤 마병단 계단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을 고양이 니폴렌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양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는 한데…….’
불경한 생각을 하며 유더의 눈이 슬그머니 부드럽게 풀렸다. 그가 손을 뻗어 금빛 머리칼 사이로 슬쩍 손끝을 내리자, 키시아르가 보란 듯 자세를 바꾸어 더 쓰다듬기 좋도록 몸을 웅크렸다.
황족 출신 공작이 하기에는 너무나 체통 없는 짓거리라 할 만했으나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동안 몸 안쪽 깊은 곳에서 지난 며칠간의 열기를 기억하듯 슬그머니 기어 올라오던 근지러운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나단 주커만이 돌아오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앉아 있었다.
***
“나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수도의 7구역.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이들이 사는 어두운 곳에 나한을 비롯한 여러 각성자들이 모였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그리 좋지 않았다.
“현자님이 마병단까지 돕기로 한 거라면 너와 다른 형제자매들이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려. 거점으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여기 남을 수도 없어.”
그들도 수도 곳곳에 나붙은 공문을 보았다. 마병단의 새로운 단원 모집에 협력하기로 했다는 ‘나그란의 별’의 이름을 본 순간 충격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현자 측에서 그 이름의 주체가 나한이라 생각했듯, 나한을 따르는 각성자들 또한 현자가 마병단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나한을 더 따르기에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젊은 각성자들은 상당히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어제 6구역 근처에서 네조를 본 놈이 있어. 우릴 찾는 게 분명해. 어떻게 하지? 나서야 할까?”
그들은 본래대로라면 현자 측 각성자들이 나오는 즉시 낚아채어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수도로 올라온 이후 나한의 상태가 계속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던 데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함부로 움직이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쪽 팔과 몸 곳곳에 붕대를 감은 채 반쯤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나한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서부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 나한은 줄곧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중에서도 최악의 상태인 듯 보였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로 독하게 버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을 먹고 움직일 때는 전과 다름없이 잘도 움직이지만, 그게 과연 언제까지 갈까. 만약 그가 갑자기 죽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불안이 번지는 사이, 드디어 나한이 눈을 떴다.
화상으로 얼룩진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눈빛을 죽 훑었다.
“-글쎄……. 이 일이 정말로 현자 측에서 한 일인지는 모를 일이지.”
“그게 무슨 뜻이야?”
“그쪽에서 우리를 왜 이리 찾는 건지 생각해 봐.”
“…….”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이도, 이해하지 못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만은 공통적으로 확실하게 느꼈다.
“아무튼, 기다렸던 대로 나오기는 한 모양이니 만나야겠지.”
“정말 만날 거야? 상황을 확실히 파악할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면 마병단에 호산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라도…….”
“아니. 그건 됐어. 시간을 더 끌 생각도 없고.”
나한이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검은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차가운 눈동자가 선언했다.
“확인은 그간 할 만큼 했지. 이제 현자를 만나 직접 확인할 시간이다. 네조가 나타났다는 곳으로 안내해.”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