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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45화 (645/805)

645화

남쪽이라. 유더는 반사적으로 제국 남부를 떠올렸다가, 이내 글쓴이가 지칭한 지역이 그보다 훨씬 더 아래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남쪽이라면…… 혹시 사막 이남 쪽을 말하는 걸까요.”

“나는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네. 대멸망을 막아 낸 직후에는 전 대륙에 살아남은 사람 수가 지금 제국의 수도에 사는 인구보다도 적었다고 하지. 그때는 나라와 국경의 개념조차 지금과는 달랐고, 지금과 같은 국경 체계가 확정된 건 3대 황제 때에 이르렀을 때였어.”

그러니 초대 타인 공작, 오블릭 반 타인이 지칭한 ‘남쪽’은 진짜로 대륙의 남쪽인 사막 이남을 뜻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 키시아르는 그렇게 판단한 듯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왜 굳이 남쪽을 언급했을까. 그건 의문이 남는군.”

온갖 지식을 다 알고 있는 키시아르조차 그 말이 내포한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예상 가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기 위하여 몬스터가 어디서 오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던 이의 마지막 결론이 지칭한 ‘남쪽’. 그가 그곳에서 보려 했던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또 그보다 훨씬 먼저 경전을 들고 제국을 떠났다던 루마도 혹시 남쪽으로 갔었던 걸까.’

에제인 왕자는 루마로 추정되는 눈먼 현자가 넬라른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 현자가 정말 루마라면, 그는 제국을 떠난 뒤 어디서 눈이 멀어 어떻게 넬라른까지 가게 되었던 걸까. 넬라른이 그 여정의 끝이었을까?

‘그래서 루마는 결국 시간을 돌리는 방법을 알아내긴 한 걸까.’

“남쪽에 대해서는 나단이 돌아오면 한번 물어보는 게 좋겠군.”

유더는 생각에 잠겨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었다.

“그분이 남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아십니까?”

“우리보다는 잘 알겠지. 나단의 본래 가문은 남국에서 부족을 지키는 ‘마샤’……. 그러니까 제국으로 치자면 기사 출신이거든.”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유더가 눈을 조금 크게 뜨자 키시아르가 미소와 함께 부연 설명을 짧게 해 주었다.

“오래전, 제국 남부에서 남국과의 무력 분쟁이 크게 일어났었지. 지금은 모래 전쟁이라 불리는 사건이야. 그때 제국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남국과는 이후로도 줄곧 사막을 사이에 두고 여러 번의 작은 충돌들이 계속 있었네. 나단의 부모는 십수 년 전쯤 일어났던 분쟁 때 포로가 되어 잡혔다고 하더군.”

유더는 가케인에게 들었던 모래 전쟁을 떠올렸다. 그의 조상인 명장 주레리 장군이 나서 제국을 승리로 이끈 이후에도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단은 포로가 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노예 신분으로 별궁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조그만 꼬마였지만 한 번도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멋진 녀석이었네. 내가 여름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특별히 그곳에서 요양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만나지 못했겠지.”

이 이야기는 나단 주커만에게서도 들었다. 유더는 그가 담담한 얼굴로 ‘9살 때 여름을 나기 위해 남쪽 별궁에 왔던 2황자 키시아르가 발 하나 제대로 못 씻기는 덜떨어진 하인이었던 자신을 거두어 주었다’고 말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같은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도 느낌이 많이 달랐다.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 만남으로 인해 나단 주커만의 삶이 바뀌었고, 지금과 같은 위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허드렛일을 하던 노예 하인에서 고귀한 황자의 시종으로, 친구로, 그리고 마침내는 펠레타 공작의 부관이자 기사단의 일원으로.

누구나 ‘작다’고 말할 정도였던 꼬마는 이제 함부로 그렇게 칭할 수 없을 만큼 키가 큰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내가 알기로 나단은 부모와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는 못했으나 남국에서의 삶과 그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제법 들었다고 하더군. 어쩌면 이 이야기를 듣고 짚이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을 모두 패고 고장 난 집안 문짝 수리까지 마친 뒤 돌아온 나단 주커만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듣고 나니 생각나는 게 있기는 하군요.”

“정말입니까.”

“남쪽에 사는 이들은 스스로를 ‘달의 자식들’, 혹은 ‘별’이라고 지칭합니다. 그쪽 전설에 의하면 아주 오래전에는 달의 자식들이 온 세상의 주인이었다고 하더군요. 신성한 검과 활을 받아든 위대한 전사들이 그것으로 삿된 것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죽음을 물어 죽이고 돌아온 늑대, 어둠을 꿰뚫어 보는 부엉이를 부리며 오래도록 평화를 지켰다고 합니다.”

나단 주커만이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듯 허공을 보았다.

“하지만 그 평화는 욕심 많은 이들로 인해 밤의 장막이 점차 무거워지면서 꺠졌고, 전사들은 더 이상 신성한 검과 활을 쓸 수 없었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입니다.”

“검과 활이라.”

키시아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코끝을 울렸다.

“제국을 비롯해 사막 이북의 국가들은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지만, 오러를 사용하는 검술의 기원이 실은 남국에서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제법 신빙성 있게 존재하지.”

“네. 남국인들 또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신성한 검과 활에서부터 이 세상 모든 무기의 기원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그곳에서는 어린아이라도 모두 알고 있다더군요.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활로 오러를 쓸 줄 아는 자들도 예전에는 존재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고 나단 주커만이 덧붙였다. 그러나 유더는 활로 오러 비슷한 것을 잘도 사용하는 마병단의 각성자들을 떠올리며, 그게 마냥 헛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키시아르 또한 같은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자. 어찌 보면 결국 그 이야기도 사자 오르헤나 마법의 시초가 된 대마법사 루마의 일대기와 비슷해. 신성한 검과 활의 전사가 세상에 나타나 역경을 이겨내고 신비한 힘을 드러낸 것이지.”

하나하나 꼽아 보며 손가락을 접은 키시아르가 네 번째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네. 오블릭 반 타인이 몹시 알고 싶어 했을 바로 그 부분과 관련되어 있지. 뭔지 알겠나?”

유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나단 주커만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른 어떤 공통점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죽음에서 되돌아온 이.”

“그래, 맞아.”

키시아르가 수긍했다.

“지금까지의 세 이야기가 각각 마력, 신성력, 오러의 기원이 된 이들의 이야기라 생각해 보게. 그들의 곁에는 항상 죽음에서 되돌아온 이가 관련되어 있어. 오르헤는 스스로 찢긴 사지를 회복하여 죽음에서 벗어났고, 루마는 아직 확실치 않으나 주변에 그 비슷한 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그리고 신성한 검과 활의 전사에게는 죽음을 물어 죽이고 돌아왔다는 늑대가 있었군.”

나란히 접힌 네 개의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공통점이라면 오블릭 반 타인이 굳이 남쪽까지 가고 싶어 한 이유 정도는 되지 않겠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유더는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며 어떤 전율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마력. 신성력. 오러.

세 가지 힘과 비교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을 각성자의 힘.

그리고 죽음에서 되돌아온 유더 아일.

경전이, 전설이, 오래된 기록들이 이야기하는 까마득한 과거와 현재 사이에 반복적으로 존재하는 공통점들을 과연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고 넘길 수 있을까.

‘……우연이라 보기는 힘들지.’

불현듯 거대한 바닷속에 홀로 내던져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목도하고 있는 듯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제 스스로 쥐고 나아가는 중이라 믿었던 말고삐가 알고 보니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유더는 그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돌려 저와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 대화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놀랍도록 마음이 안정되며 편안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지. 과거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면 내가 왜 돌아왔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알게 될 수 있을 테고.’

처음에 이 마을에 올 때만 해도 그저 초대 타인 공작의 남은 흔적이나 조금 찾으리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실체를 까고 보니 이곳에는 여태 알던 바보다 더욱 깊고 놀라운 정보가 담겨 있었다.

‘완전한 답을 찾진 못했지만, 이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큰 수확이다. 앞으로는 알아봐야 할 것이 더 많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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