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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55화 (655/805)

655화

“그래. 세상엔 다양한 호칭이 있으니까.”

다양한 호칭이라.

유더가 침묵하자 키시아르가 천천히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을 이었다.

“신분, 나이, 성별, 이름, 별명, 애칭, 관계. 전부 호칭이 될 수 있지. 여기서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다른 이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마병단에 지원을 하러 온 각성자인 척하며 내기 격투장에 접근하기 가장 좋은 건 뭘까.”

“글쎄요……. 전 어느 쪽이든 괜찮으니 정해 주시는 쪽으로 따르겠습니다.”

어차피 내기 격투장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일시적으로 찾아갈 때 남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목적에서 변경할 호칭일 뿐이다.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키시아르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슬쩍 미소를 지은 사내가 고개를 조금 기울여 다른 이들은 듣기 어려울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좋아. 몇 가지 후보를 추려 볼까. 일단 신분은 빼야겠지. 성별도 굳이 필요 없고, 나이…… 흠. 그 경우 내가 널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아니면 네가 나를?”

‘음…….’

이논을 형이라고 부를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는 키시아르라니. 외모의 액면가를 따져 별로 맞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듣자마자 이렇게 소름이 돋을 줄이야.’

유더가 미간을 찌푸리자 키시아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남는 건 이름과 관련된 쪽, 아니면 관계인데.”

“…….”

키시아르의 눈이 지그시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사실 말이야, 이번에 꿈에서 네가 내 이름을 똑바로 부른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나?”

“…제가 그랬습니까? 언제…… 아.”

발정기가 끝난 직후 함께 꾸었던 이전 생의 단장 임명식 꿈.

그때 유더는 꿈속의 키시아르가 사라지고 나서 모습을 드러낸 지금의 키시아르를 보며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있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

속으로는 늘 아무렇게나 불러 댔음에도 입 밖으로 내어 말한 적은 거의 없는 그 이름.

“발정기 이후의 그때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때 실은 굉장히 전율을 느꼈거든. 좋은 의미로 말이네.”

유더에게는 그것이 키시아르를 이름으로 불렀다기보다는 사실 질문에 대한 답을 말했다는 감각 쪽에 더 가까웠기에 그리 깊이 생각지 않았는데, 본인은 그 일이 굉장히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이전 게임에서도 나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나?”

“아뇨. 그때는…….”

유더는 조금 난감하게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전 생에 키시아르를 부르는 호칭은 그리 일정하지 못했다. 처음엔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단장님이라 부르면 되었지만 유더가 단장이 된 뒤에는 공작님이라 불러야 했음에도 그렇게 부르는 게 입에 잘 붙지 않았다.

그때마다 지적하는 키시아르에게 얼마나 짜증과 분노가 일던지, 나중에는 신분이고 뭐고 그냥 당신이라고 불러 댄 적도 제법 많았다.

‘황족 모독죄로 넘겨 보시든가 하는 마음이 없었다고는 못하지.’

그러나 키시아르는 ‘단장님’ 이외의 호칭은 뭐든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유더의 작은 반항은 흔적도 없이 가볍게 넘겨져 무시당하고 끝이 났다.

그가 죽은 뒤로는 그런 부분을 신경 쓸 이도 없으니 그냥 대놓고 이름을 마음대로 지칭했다.

세간에는 마지막 남은 황족의 죽음을 조용히 넘기기 위해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 키시아르 라 오르는 반역 혐의를 받고 그로 인해 죽은 자였다.

반역 혐의를 받은 자는 신분도, 지위도 허락받지 못한다.

그가 한때 자신의 윗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거의 지우듯 살았기에 더욱 예의를 지켜 지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영향이 남아 지금도 속으로는 키시아르의 이름을 막 부르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인가. 마음 속으로야 누구를 어떻게 부르든 알지 못하면 그만이었다.

“…이름을 부른 적은 물론 없습니다. 단장님, 혹은 공작님이라고 불렀고…….”

“그리고?”

대답하기까지 시간을 너무 오래 끈 탓인지 키시아르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으리란 걸 다 안다는 듯 물었다.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이실직고했다.

“화가 날 때, 가끔 당신이라고 부른 적은 있습니다. 별로 신경도 안 쓰긴 하셨습니다만, 아무튼 적절하지 못한 일이긴 했죠.”

“맙소사.”

“…….”

“정말 짜릿하군. 그걸로 하지.”

“진심이십니까?”

유더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꺼려진다면 이름 쪽으로 할까?”

“귀하신 분의 이름인데 알아듣는 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물론 진짜 이름은 안 되지.”

키시아르가 개구진 웃음을 흘렸다.

“부모님이 부르던 이름이 있네. 가끔 정체를 숨기고 바깥에 다닐 때 썼던 것.”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유더는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애칭이 있으셨습니까?”

황족은 애칭을 만들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완벽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태자’나 ‘천칭의 황제’처럼 별도의 칭호로 불릴 수는 있어도, 평민들이 만드는 것과 같은 애칭은 없다고 알고 있었다.

“애칭이라기보다는…… 글쎄. 부모님만 사용한 아명에 가까우려나 싶군. 형님 폐하께서도 이젠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니까. 내가 태어난 곳이 곳이다보니 기록으로도 남겨진 적이 없지.”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약간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는 어머니께서 만드신 거야. 황궁의 전통이나 예절 중 쓸데없는 부분들은 과감히 무시하고, 필요하다 생각하는 부분들은 반대에 부딪치더라도 반드시 행하는 분이셨는데 그것도 그중 하나였지.”

“……애칭이 말입니까?”

“고작 네 글자짜리 이름이긴 하지만 아이에겐 길어서 알아듣기 어려우니까. 평민이나 하는 짓이라며 반대당해도 사랑이 담긴 이름을 불러 주는 시기가 있는 편이 아이에게도 좋을 거라 하셨다더군.”

전대 황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쩐지 키시아르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시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아킷.”

“…….”

“그것을 또 줄여서, 킷.”

유더는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몹시 낯설고도 묘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참고로 형님 폐하의 아명은 루켈이네. 어머니는 ‘루-’라고 길게 부르셨지. 어떤 방식으로 지어졌는지 대충 감이 오나?”

“……그렇군요.”

졸지에 황제의 비밀 아명까지 알게 되어 버렸다. 그것도 엄청나게 귀여운 아이가 연상되는 어감이라 유더는 제가 그 이름을 안다는 사실을 케일루사 황제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는 어떻지? 할아버지와 함께 살 때 불렸던 다른 이름은 없나?”

“없었습니다. 워낙 짧은 이름이니까요.”

유더는 대답한 뒤 아주 오랜만에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거의 잊었던 옛 기억이 문득 조금 기억이 나는 듯도 했다.

“음… 산에서 놀다 돌아왔을 때 너무 너저분해져 있으면……. 아니, 아닙니다.”

“말을 시작한 뒤에 아니라고 말하면 듣는 이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진다는 걸 알고서 고문하는 건가?”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재차 입을 열었다.

“……흙투성이 강아지는 집에 들어올 수 없으니 나가서 씻고 오라고 하셨던 적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흙투성이 강아지라……”

키시아르가 음미하듯 중얼거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귀엽군. 널 정말 아끼며 키워 주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드는걸.”

보는 사람마저 근질거릴 만큼 따뜻한 눈빛이었다. 유더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예, 뭐……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래도 안 어울리는 호칭이란 건 저도 압니다.”

“그럴 리가. 지금 부르라고 해도 부를 수 있겠는데. 어차피 유더라고만 부르면 네가 화제의 유더 아일이란 걸 그쪽에서 알아보는 이가 나올 수도 있으니 나도 이 기회에 강아지라고 불러 볼까?”

아무리 키시아르가 자신을 마냥 좋게만 본다는 걸 알고 있다지만 이건 정말 선을 넘었다. 반쯤은 농담임을 알아도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필요하다면 다른 이름도 있지 않습니까.”

“유드레인?”

유더는 조금 멈칫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전에 그가 그 이름으로 불렀을 때 느꼈던 충격은 이제 없었다. 그 사실이 이 순간 명확히 체감되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지어 준 자신의 또 다른 이름.

지금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테니 가명으로 그보다 적절한 건 없을 터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시죠, 아킷 님. 저녁을 먹기 전까지 할 일이 많습니다.”

“아니지. 그냥 아킷. 그리고 어투도 지나친 존대는 위화감을 주니 완화하고. 상호 호칭은 ‘당신’으로.”

자. 다시 불러 볼까? 키시아르가 따라 일어나며 보란 듯 시켰다.

유더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법 뒤에 숨겨져 있을 키시아르의 붉은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 아킷. 됐습니까? 이제 가죠.”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웃음이 피어났다. 변용을 한 상태임에도 흐드러지듯 시선을 사로잡는 미소에 주변의 몇몇 이들이 흘끔 시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 당신이 그렇게 불러 주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걸.”

키시아르가 손을 내밀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나중에는 다시 한번 내 진짜 이름을 불러 줄 날도 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거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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