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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80화 (680/805)

680화

어제까지만 해도 지하 3층에 갇혀 있던 각성자들은 서로를 마주하면 무조건 싸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마련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친분도, 대화도 모두 무의미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서로를 죽이는 게 아니라 구하기 위하여 능력을 쓰고 있었다.

“거기! 조심해요!”

“아, 고맙… 고마워요.”

“아니요… 뭘…….”

몬스터가 내뻗은 다리에 잡힐 뻔했던 각성자의 곁에서 또 다른 각성자가 자신의 힘을 발휘해 구해 주었다. 도움을 준 이도, 받은 이도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으나 고맙다는 인사는 잊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나누던 인사에도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로를 돕는 과정에서 점차 시선을 맞추는 시간이 늘어나니 기이하게도 간질간질하고 뜨거운 감정이 가슴속에서 자라났다.

그건 말하자면 같은 적을 상대하고 같은 고난을 겪어 온 이들을 향한 전우애라 할 만한 감정이었다.

키시아르가 처음 그들에게 서로 적이었다는 사실을 잊으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은 반응하지 않았던 그 말을 각성자들은 어느새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죽어서나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격투장 무대 바깥에서 어깨를 맞대고 열심히 몬스터를 상대했다. 처음 해 보는 방식의 전투임에도 키시아르가 지시한 대로만 하면 놀랄 만큼 효과를 발휘했다. 간혹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익숙지 않아 위험에 빠지는 이도 있었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들보다 앞서 최전선에 나서서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우고 있는 마병단의 두 사람이 그야말로 일당백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특별할 것 없는 검 한 자루만 들고 있을 뿐인데도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공격은 그 어떤 각성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자랑했다. 아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왔던 이들처럼 서로가 서로의 등 뒤를 지키며 누구보다 많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무얼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고 시선이 절로 붙잡힐 정도였다.

키가 큰 사내가 접근하는 몬스터의 다리를 묶어 두면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구불대는 다리 사이에 파묻혀 안 보이는 약점을 정확하게 찾아내어 찔렀다. 반대로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부서지고 널브러진 기물들을 움직이고 불과 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몬스터의 접근을 막아 내고 있으면 다른 놈들을 죽이고 돌아온 키가 큰 사내 쪽이 간결한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베어 넘겼다.

검은 머리칼의 사내는 검 이외의 방식으로는 몬스터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아도 그의 힘은 적에게 충분히 위협적으로 작용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키 큰 사내가 그의 움직임과 딱 들어맞는 한 쌍의 무기처럼 부드럽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대화 한마디 오가지 않음에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보조하는지, 각성자들 대부분은 그들이 검 외에 대체 무슨 능력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이들인데도 싸우는 방식이 묘하게 비슷한 듯 느껴지는 건 아마 같은 마병단 소속이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고 압도적인 싸움을 이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키이이익……!”

마침내 대부분의 몬스터가 쓰러지고 단 한 마리만이 남았다. 그것은 각성자들의 소리 공격에 교란당해 가야 할 방향을 잃고 날뛰다가 검은 머리칼의 사내와 키 큰 사내가 양옆에서 동시에 퍼부은 합동 공격에 당해 죽었다.

“와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쓰러지자 각성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환희의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안았다.

주변은 엉망이었으나 건물이 더 부서지지도, 각성자들 사이에서 희생자가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유더는 환호성을 지르는 각성자들을 돌아보다 검을 도로 검집에 넣었다. 돌아본 곳에 서 있던 키시아르가 그를 향해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유더는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은 전투의 여파를 느끼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펄펄 끓는 피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팽팽 돌며 심장을 거세게 두드리는 감각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율과 쾌감을 선사했다.

그건 당연히도 키시아르 라 오르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마병단에서 여러 훈련을 진행해 왔으나 그와 이런 식으로 단둘이서 호흡을 맞춰 싸운 적은 없었다. 이전 생을 포함해도 당연히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맞대어 본 등의 감각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고, 곁을 스치는 체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전투에 깊이 몰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키시아르는 검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낡고 녹슨 검 한 자루와 밀고 당기는 힘만으로도 유더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었다.

그가 직접 전투에 나선 경험이 극히 적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직접 나서서 전투를 해 본 건 거의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고 말하면 이상한가?”

그때, 키시아르가 유더의 생각과 거의 다르지 않은 말을 조용히 속삭였다.

마치 생각이 읽힌 것만 같은 이런 일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유더는 그를 바라보다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눈을 조금 크게 떴던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잠시 후 확연하고도 시원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일순 유더는 웃고 있는 사내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여겼다. 지금처럼 피가 덜 식은 상태에서 그 얼굴을 마주했다간 참지 못하고 홀린 듯 입을 맞췄을지도 몰랐다. 사나운 만족감과 허기진 갈망이 동시에 그의 배 속을 긁었다가는 스르르 사라졌다.

그건 때마침 멀리서 들려온 비명 때문이기도 했다.

“끄아아악!”

유더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힘에 의해 출구로 향하려던 움직임이 가로막히고 내내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던 누키조와 그의 부하들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칼에 찔린 채 쓰러진 누키조가 보였다. 그를 찌른 건 함께 도망치려던 부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누키조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우릴 제물로 바쳐……?”

몬스터와의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누키조는 자신이 위험해질 것 같을 때마다 부하들을 대신 죽을 자리로 떠밀어 겨우겨우 몸을 피했다. 그를 칼로 찌른 이는 마지막까지 남았으나 결국 그런 식으로 몬스터의 다리에 대신 붙잡혀 죽을 뻔했던 이였다.

그는 맥없이 죽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저를 몬스터 앞으로 떠밀려 드는 누키조와 몸싸움을 벌였다. 혼란스러운 싸움 속에서 둘 다 죽을 뻔했던 위기가 여러 번 스쳐 지나가다가, 누키조보다 조금 더 젊고 완력이 더 강했던 부하 쪽이 먼저 기회를 잡았다.

그는 때마침 각성자들과 유더, 키시아르가 적절히 몬스터를 전부 처리해 준 틈을 타 누키조를 밀어 넘어뜨리고 떨어져 있던 칼을 주워 힘껏 찔렀다. 가슴 한복판을 제대로 찌른 치명상이었다.

그는 유더와 키시아르가 가까이 다가오자 죽여 마땅한 누키조를 자신이 처리했으니 부디 살려 달라 말하며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유더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꼴딱대는 누키조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업자득이군.’

“사, 살…려…… 줘……. 제발…….”

자신의 곁에 다가온 유더를 인지한 누키조는 피가 샘솟는 구멍을 손으로 막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강처럼 흘러나오는 피와 찔린 자리를 보아하니 지금 당장 루산 정도의 치유력을 지닌 사제가 나타난다 해도 목숨을 건지기란 어려울 듯했다.

유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누키조가 쉭쉭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네놈이 원하던 정보, 아, 알려 줄 테니까……. 그 듀번, 계집들……!”

“…….”

“이름… 리, 리지나……. 몸을, 안 보이게, 해서…… 같이 도망칠 게 뻔해 허락하지 않았……. 아까 밖으로 나갔는데…… 나, 날 살려 주면 누군지 알려 줄…….”

버르적대며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누키조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기다려 보아도 더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유더는 그의 호흡이 멎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하던 도중 그대로 눈을 부릅뜬 채 사망하다니, 그야말로 허망하고도 비참한 죽음이었다.

유더는 누키조의 시체를 내려다보다 곁에서 여전히 항복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의 부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키조의 말에 의하면 리지나라는 이가 투명화 능력을 지닌 각성자라는데, 그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그 부하는 리지나가 각성자라는 사실까지는 잘 몰랐으나, 그녀에 대해서는 상당히 잘 알고 있었던 이였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구하기 위해 아는 바를 모두 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리지나의 본명은 큐레이지나였다. 듀번 출신이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 자체는 듀번에서 제법 흔했기에 본명을 들은 이들은 그녀의 출신지를 암암리에 짐작했다고 했다.

“그년은 누키조의 말 아니면 누구의 말도 안 들었습니다. 누키조의 말을 잘 들어야만 지하 3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승진할 수 있다며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했죠. 그런 것치곤 일을 잘 못 해서 자주 맞았지만…….”

리지나는 귀빈을 모시는 업무는 그럭저럭 잘했지만, 새로운 각성자들을 끌어들이는 업무에는 열의가 별로 없었다. 그녀가 담당한 각성자들은 이상하게도 격투장에 온다고 해 놓고 오지 않거나, 혹은 금방 이상한 점을 깨닫고 탈출하려 난동을 부리기 일쑤였다.

때문에 그녀는 자주 누키조에게 얻어맞았다. 가끔은 뼈가 부러질 때까지 맞기도 했지만 그녀는 울거나 도망치지 않고 보는 이들이 질릴 만큼 악착같이 누키조의 말에 순종했다.

‘지하 3층으로 내려갈 권한. 뢰네브와 큐레이지나의 능력……. 그래. 이제 대충 짐작이 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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