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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87화 (687/805)

687화

하지만 의외로 거기서는 현자가 큰 도움을 주었다.

‘예전에 알던 이들이 이곳에 조금 있습니다. 아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자에게도 각성 이전의 시기가 있었을 테니 본디 아는 사람이 있기야 할 터다. 하지만 그게 수도에 있는 사람들이란 건 몹시 놀라웠다.

랭바튼을 비롯한 젊은 각성자들은 현자가 각성 전에 수도에 살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때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저 그뿐, 현자가 정확히 어떤 이름이었으며 어떤 사람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자는 수도 내에 나한의 동료들로 보이는 이들이 어느 구역에서 모습을 드러냈었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 근처에서는 나그란의 별 소속만이 쓸 수 있는 신호용 문장이 그려진 벽도 찾아냈다.

‘나한도 현자님을… 우릴 찾고 있었던 거야.’

그것이 현자를 잡기 위한 함정은 아닐까, 믿어도 되는가, 아닌가를 두고 수많은 의견이 오갔다. 하지만 결론을 내린 건 결국 희생을 자처한 현자였다.

‘이 사람은 스스로의 목숨은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다만 나한이 다른 형제자매들을, 그리고 나그란의 별 전부를 위험으로 몰아가는 길로 가려 한다면 그것을 막고 싶을 따름입니다.’

젊은 각성자들 모두 그 말에 경의와 존경심을 느꼈다. 랭바튼은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그리고 현자를 목숨 바쳐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한 측이 남긴 신호 근처에 새로운 신호를 남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한 쪽에서도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한 뒤 그들은 비밀리에 새로운 숙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 날짜가 바로 오늘이었다.

“저기다.”

새로운 숙소가 가까워지자 모두 긴장했다. 나한 쪽이 침범한 것을 알게 된 뒤 바꾼 새 숙소는 그들도 거의 처음으로 와 보았다.

예전이라면 동료들을 만나는 거니 오히려 반가웠을 텐데, 지금은 온몸에서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우리가 먼저 숙소에 도착해 놈들을 맞이하기로 했는데… 혹시 몸을 숨긴 놈 하나가 거기에 먼저 숨어들어 와 있다면 어떡하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니, 설령 있더라도 우리가 질 거란 생각은 안 해. 그렇지만……. 젠장! 디에먼 놈이 이상한 소릴 하니 나까지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네.’

나한 놈 하나 때문에 그간 너무 많은 게 어그러져 버렸다. 그놈 때문에 남부의 본 거점에 있을 동료들 사이도 파탄이 났고, 그 사이를 틈타 이상한 집단이 끼어든 듯한데도 직접 보러 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자에게 위협까지 가한다면 랭바튼은 정말 절대로 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셈이었다.

‘현자께선 너무나 선량하셔서 나한 같은 녀석에게도 늘 기회를 주려 하시지. 하지만 난 아니야. 그놈은 우리 집단의 악이야. 오늘이 아니라도 반드시 없애야 할 놈이라고.’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랭바튼과 다른 젊은 각성자들의 마음속에는 나한을 향한 경계와 배척의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게 이상하다는 사실도, 그리고 디에먼의 예감이 사실 그리 틀린 건 아니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심호흡을 했다. 혹시나 그들을 수상하게 보는 이나 적이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곤 평범한 행인들뿐이었다. 근처 과일 가게에서 열심히 말린 과일을 사라며 호객을 하고 있는 목청 큰 남자의 고함까지 들은 뒤 랭바튼은 조용히 숙소로 들어갔다.

“허, 약사님 아니었으면 저놈들이 오늘 여기로 오는 줄도 모르고 계속 다른 데만 찾을 뻔했네요.”

현자와 젊은 각성자들이 들어선 숙소 너머. 방금까지 랭바튼이 지켜보았던 과일 가게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열심히 호객을 하고 있던 데브란 하르투데가 들고 있던 말린 사과 절임 병을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는 모자를 눌러쓰고 물건을 살지 말지 고민하는 손님처럼 서 있던 이논이 있었다.

그들이 여기에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오래전 수도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칼 엔파일’이란 이름의 관리가 갑자기 재차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이논이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칼 엔파일은 나그란의 별을 이끄는 현자가 각성자가 되기 이전 가졌던 이름으로 추정되는 이름이었다. 몇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예전에 알던 이들에게 몇몇 정보를 요청한 뒤 답을 받아 떠났다.

그가 알기를 바랐던 정보는 요즘 수도를 돌아다니는 수상하고 위험한 특정 집단의 목격 위치였다. 그중에는 한쪽 얼굴에 온통 화상 흉터를 입은 사내의 인상착의도 포함된 상태였다.

현자가 나한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친밀한 정보원들에서 해당 이야기를 들은 이논은 그렇게 확신했다.

본래대로라면 그 소식은 유더에게 제일 먼저 보고되었겠으나, 지금 그는 남부에 있었다. 때문에 유더가 떠나기 전 전달했던 정보부 지침을 따라 나머지 정보부원들이 그 소식을 듣고 협력을 위해 모여들었다.

이논이 알아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수도 어딘가의 벽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려 놓은 의문의 문장의 위치도 전부 알아냈다. 물론 그 의미는 나그란의 별 소속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었을 테지만, 마병단에는 손가락만 대도 수많은 정보를 읽어 낼 수 있는 칸나와 전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 몇 명이 있었다.

‘이게 남겨진 건 새벽에 비가 살짝 내렸던 날이야. 그렇다면 3일 전이겠네. 이걸 그렸던 사람은 엄청난 불안과 경계, 의심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의미는… 만남을 위한 약속이었던 듯해. 흠. 현자와 나한이 서로 만나려나 봐? 정확한 시일까진 안 읽히는데 그건 가일과 두일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

칸나의 조언에 따라 찾아간 가일과 두일은 아주 순박한 얼굴로 정보부원들이 내민 그림을 보고 반가워했다.

‘아, 이 그림…! 배운 적 있는데! 이 동그라미 모아 놓고 작대기 그은 건 개수에 따라 며칠 뒤인지 뜻하는 거니까 5일! 그 옆의 태양 모양은 낮이랬어요. 그리구 그 아래 거는…….’

형제가 알려 준 바에 따르면 현자와 나한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정보부원 중 한 사람인 데브란은 그곳 근처에 자신이 정보 수집을 위해 위장 취업을 했던 가게 중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아주 알차게 써먹을 방법을 생각해 냈다.

“때마침 이 가게에서 제가 일을 한 적이 있었어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겨울이 다 되었다 보니 할 일이 적어서 주인 아저씨가 다른 곳에 일하러 나가신 참이라 사람도 없었고 말예요.”

“맞아. 네가 부업을 하도 열심히 하길래 마병단은 이제 때려칠 생각인가 싶었었는데 설마 이런 데서 쓸모가 생길 줄이야! 우리도 깜짝 놀랐다니까.”

“그러니까 말야.”

으쓱대던 데브란의 뒤쪽에서 과일 상자 뒤에 웅크리고 있던 힌과 핀이 벌떡 일어나 그를 놀렸다. 그들은 몸집이 작은 덕에 쌓인 과일 상자 뒤에 어렵지 않게 숨을 수 있었다.

“가케인! 거긴 괜찮아? 좀 버틸 만해?”

엘더 남매와는 반대로 큰 키와 눈에 띄는 잘생긴 외모를 숨길 곳이 없어 과일 가게 한켠의 아주 작은 창고에 들어가 있던 가케인이 살짝 문을 열고 눈썹을 누그러뜨린 채 머쓱하게 웃었다. 얼마나 몸을 구겨 넣었는지 옷이 먼지투성이였다.

“으응, 버틸 만해. 난 괜찮아.”

잠깐 숨는 거라면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었겠지만, 이건 기약 없는 기다림이기에 쓸데없이 힘을 뺄 수가 없었다. 가케인은 심드렁한 얼굴로 레몬 절임을 지그시 응시하는 이논을 보며 내심 부럽다고 생각했다.

‘약사님도 외모가 뛰어나신 편인데… 이상하게도 왠지 남의 눈에 띄진 않으시지. 혹시 그것도 무슨 요령이나 능력인 걸까? 나도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 힘들겠지만 나한 쪽은 아직이니까 조금만 더 참아.”

엘더 남매가 가케인을 위로하는 사이, 여태 말이 없던 이논이 별안간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쪽도 오는 것 같군.”

“네? 어디요?”

이논이 대답 대신 눈짓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들이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들의 가운데 서 있는 사내의 얼굴에 있는 흉터를 어렴풋이 알아본 순간 엘더 남매는 빠르게 도로 상자 뒤로 주저앉았다. 가케인 또한 바람같이 모습을 숨겼다.

예리한 눈빛을 숨긴 데브란이 웃는 얼굴로 다시 호객을 시작했다.

“아, 그러지 마시고 이거 한 병 가져가시라니까요. 겨울에는 집에만 있느라 피부가 상하고 몸이 약해지는 거 아시죠? 그런데 이 말린 사과껍질 절임 하나만 꾸준히 챙겨 먹어도 그럴 일이 없거든요. 제가 이걸 팔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손님 얼굴색이 좋지 않으셔서 그럽니다.”

억지로 웃는 얼굴을 꾸며 내지 않은 표정과 서글서글하고 투박한 목소리 덕인지, 데브란의 말은 같은 말을 해도 기이하게 신뢰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 번쯤 사 먹어 보고 싶게 만드는 발언을 귀신같이 한다는 점에서 그가 왜 상인들에게 사랑받는 직원이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와, 데브란. 사실 장사를 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엘더 남매가 쑥덕대는 사이, 나한과 그의 동료들이 과일 가게 앞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려 했었다.

“그래? 사과껍질 절임이 그리 좋다고? 얼마요?”

공교롭게도 데브란의 호객이 너무 효과를 발휘한 탓에, 나한을 따르던 이들 중 한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다행히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데브란은 모처럼 등을 타고 땀이 나는 기분을 느꼈다.

혹시나 나한이 예전에 동부에 갇혀 있던 그를 기억할까 싶어 평소보다 얼굴에 검댕을 더럽게 칠하고 모자까지 눌러 썼는데도 긴장을 늦추기 어려웠다.

‘아니 이런 젠장. 가던 길 그냥 갈 것이지!’

“예 손님. 동화 3개만 받습니다.”

오랫동안 상점 일에 길들여진 그의 입과 머리는 훌륭하게 따로 놀았다.

“3개? 조금 비싼 것 같은데…….”

“좋은 병을 써서 그럽니다. 병은 다른 걸 담을 때 쓰셔도 좋죠.”

“음…….”

“펩! 거기서 뭐 해! 빨리 와!”

사내가 고민하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나한의 동료가 외쳤다.

“곧 갈게!……. 그거 하나 줘요.”

데브란은 재빠르게 사과 절임을 그에게 넘겼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듯 멈춰 서 있던 나한이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먼저 현자 측이 들어갔던 어느 벽돌집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곧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잘했어 데브란.”

데브란이 깊은숨을 내쉬자마자 나머지 동료들이 일제히 숨겼던 몸을 드러내며 그를 칭찬했다.

“저 안에서 저놈들이 무슨 얘길 할지 정말 궁금하네.”

“얼마나 기다리고 들어가면 되려나?”

엘더 남매가 눈을 위험하게 번득이며 웃자 가케인이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 데브란이 정리한 다음 접근해 봐야지.”

그러나 그들이 접근할 시간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데브란이 펼쳐 놓은 장사를 모두 정돈하고 앞치마까지 벗었을 때, 그 집에서 큰 굉음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로 정보부원들의 시선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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