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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91화 (691/805)

691화

문이 닫힌 뒤 키시아르는 바로 자세를 풀고 고개를 젖혔다. 거꾸로 뒤집힌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붉은 눈이 유더를 향해 장난스레 반짝였다.

“거꾸로 봐도 멋지군, 내 보좌. 헤른의 1공녀가 너를 제법 관심 있게 눈여겨보던데, 알아챘나?”

마이라가 대화하던 중간중간 키시아르의 뒤에 선 유더의 얼굴을 흘긋 살피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까지 듣고 있는 모르는 상대에 대한 경계가 대부분이었다. 키시아르의 곁을 홀로 지키고 있다는 사실과 인상착의를 통해 정체를 짐작 정도는 했을지도 모르지만, 직접적인 소개를 나누지 않은 이상 먼저 알은척을 할 이유는 없다.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

알면서도 저리 말하는 건 그저 키시아르의 농담이자 버릇이었다. 그의 말만 들으면 가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유더 아일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때 유더의 대응은 대부분 못 들은 척하는 것이기에, 평소처럼 그냥 그 말을 넘기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헤른 1공녀의 제안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유더가 반응하지 않고 넘겨 버려도 개의치 않은 사내가 씩 웃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말대로 나쁜 제안은 아니지. 2공자가 올 수도 있지만 오지 않을 확률도 그만큼 크니 큰 변동 사항이 없다면 아마 1공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거야.”

그럼에도 하루의 시간을 이야기한 건 무엇 때문인가. 키시아르는 그 이유를 곧바로 알려주었다.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한 건 보좌가 1공녀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네.”

“…….”

“현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건 ‘이전 게임’뿐이니까. 마이라 엘 헤른을 이전에 본 적이 있나?”

역시나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어차피 이야기할 생각이었기에 유더는 자리를 옮겨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네. 본 적이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 그때는 어떤 역할을 했지?”

“역할이라 할 만한 부분조차 없었던 게 특이사항이라면 사항일 겁니다.”

유더는 자신이 기억하는 이전 생의 마이라 엘 헤른. 아니, 마이라 라 오르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치안이 황제가 된 뒤 일어났던 황후 자리 쟁탈전.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른 헤른의 고귀한 딸, 마이라.

하지만 불운한 첫날밤 이후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고 궁에 갇혀 볼 수 없었다는 말까지 하고 나니 더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게 이전 생의 그녀의 전부였다.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억하는 건 이상입니다.”

유더가 아는 건 그 정도뿐이었지만, 키시아르는 그 사소한 정보만으로도 행간에 숨겨진 많은 것들을 유추해 냈다.

“그렇다는 건 이전 게임의 마이라는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군. 뿐만 아니라 다년간 모욕을 당했음에도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버림받았어. 그 아이가 헤른에서 굉장히 희귀한 적녀임을 생각하면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단순히 가문이 몸을 몹시 사리고 있었다고만 여겼습니다만… 그리 말하실 정도입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 주었다.

“아까 들었겠지만, 마이라 1공녀는 헤른에서 35년 만에 태어난 적녀라네. 본래 남부의 상속 풍습은 첫째에게 재산을, 둘째에게 인맥을, 막내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것인데도 적녀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자마자 가장 강력한 후계자 후보가 되었을 정도이니 헤른에서 1공녀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지.”

남부의 그 풍습 이야기는 예전에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가케인에게 들었었던가.’

“본래 마이라 1공녀는 첫째가 아니라 세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네. 하지만 어릴 때 손위 형제들이 죽어 1공녀의 이름을 받게 되었지. 내가 알기로 현 헤른 공작가의 일원들 중에는 본래 넷째이자 막내였던 2공자가 더 전통에 맞는 후계자라 보는 이들이 많긴 하지만, 1공녀의 자질과 적녀라는 희귀함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1공녀 본인도 작위 욕심이 넘쳐 보이니 해 볼 만한 싸움이지.”

“…이해했습니다. 1공녀가 일방적으로 밀릴 위치가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는 위치가 되었던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군요.”

유더가 아무리 지난 생에서 남부럽지 않은 작위를 얻어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다지만 이런 정보에는 필연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정보는 태어날 때부터 그 세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기 어렵다. 헤른 공작가의 1공녀가 수십 년만에 태어난 적녀라거나, 그 덕에 그녀가 기존의 상속 체계마저 흔들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날 때부터 귀족이 아닌 이상 어찌 알겠는가.

귀족들이란 자신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아주 작은 것까지도 대단한 비밀처럼 꽁꽁 싸매고 감추려 하는 자들이다. 그 비밀을 알 자격을 가지는 이는 그들이 인정한 울타리 안의 존재뿐이었다.

10년 넘게 마병단장으로 지냈음에도 유더는 자신이 그들 울타리 밖의 존재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유더 또한 다른 이들을 자신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낸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 혹 이전 게임에서 헤른 공작이 누구였는지 기억하나?”

키시아르의 질문에 유더는 희미한 기억을 짜냈다. 그가 기억하기로 이전 생에 카치안 황제의 황권이 높아진 이후로 공작들은 영 기를 펴고 다니지 못했는데, 헤른은 그중에서도 유독 얼굴을 내밀지 않은 편이었다.

‘아니… 애초에 카치안 황제의 황권이 약할 때도 얼굴을 잘 비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지금과 같군.’

건강을 이유로 항상 남쪽에 머물며 수도에 얼굴을 비치지 않던 헤른 공작은 남부 대지진 이후 병이 깊어져 사망했는데, 당장 작위를 물려받을 직계 후계자가 없어 분위기가 한동안 좋지 않았다.

결국 작위를 받은 이는 나이 어린 사촌 조카로, 대부분의 일은 그의 부모가 넘겨받았다. 그들은 이전까지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존재감이 있던 이가 아니라 헤른도 이제 시골뜨기가 다 되었다는 비웃음을 받았다. 그걸 알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공작과 그 가족들은 딱 한 번 수도에 얼굴을 비추고는 내려가 다시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워낙 연이 없던 이들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들으면 날 것도 같은데…….’

유더의 설명을 들은 키시아르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그렇다는 건, 현 2공자도 결국 공작 작위를 승계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단 거군.”

“예.”

“헤른에는 유독 명이 짧은 이들이 많으니 크게 특이한 일은 아니야. 현 공작만 해도 본래는 승계받을 위치가 아니었는데도 나머지 형제들이 다 일찍 죽는 바람에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 하지만…… 마이라 엘 헤른이 황후가 되지 않고 헤른에 남아 있었더라면 굳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임엔 틀림없어.”

“그렇다면…….”

“마이라가 지지 세력을 모두 잃고 황후가 된 건 헤른 내에서 누군가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란 추측이 가능해지는군. 그렇지 않아도 현 헤른 공작은 수년간 외부에 제대로 나서질 않아 굴을 파고 숨어 있는 여우와 다름없다는 평을 받곤 했지. 그와 더불어 공작 작위 승계권에 들어갈 만한 이들에 대해 조사해 봐야겠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이라 엘 헤른이 원하는 대로 그녀의 이름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한 뜻을 압축하여 키시아르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같은 결과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건 유더가 그와 전술 게임을 하며 했던 말과 같은 뜻을 담고 있었다.

자신이 했었던 말임에도 키시아르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새삼스레 가슴이 찌릿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자신과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을 고양되게 만들었다.

“네.”

유더가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자 키시아르가 이전보다 조금 더 크게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유더는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려면 앞으로 더 바빠지실 테니, 오늘 쉬는 동안 하려던 걸 어서 해야겠군요.”

“음…….”

“누우십시오.”

사실 키시아르와 그가 이 바쁜 와중에 잠깐의 휴식을 얻은 건 다름이 아니라, 키시아르의 건강을 체크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비록 키시아르가 스스로 괜찮다 말하기는 했으나 그가 하룻밤 새 엄청난 힘을 사용하고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힘겨워했던 건 사실이다. 유더는 돌아오자마자 그의 몸을 열어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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