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2화
유더는 돌아오자마자 그의 몸을 열어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반대로 유더 또한 수많은 힘을 썼으니 치료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더가 수많은 이들을 때려눕히면서 얻은 거라곤 고작 긁힌 찰과상 몇 개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가 정말로 멀쩡하다는 걸 확인받지 않으면 자신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사내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사이좋게 쉬고 일어나 의원과 사제에게 겉보기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받은 뒤에야 지금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제게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하셨을 테니 더 미루시는 건 안 됩니다.”
“음… 간식이라도 먹고 나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말하려 했지만…… 그렇다면야.”
키시아르가 얌전히 상의 자락을 열고 긴 의자 위에 누웠다. 유더는 장갑을 벗고 드러난 몸 위에 손을 얹었다. 힘을 끌어올리자마자 손등 위의 검붉은 핏줄이 훅 확장되며 순식간에 어깨 위까지 거침없이 번졌다.
번지는 속도만큼이나 힘이 움직이는 속도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유더는 얼마 지나지 않아 키시아르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나무 뿌리처럼 여기저기 뒤엉켜 있는 네 가지 기운과 가운데 뭉친 채 붉은 기운으로 보호받고 있는 그릇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비로웠다.
‘황제를 치료한 이후로 이 정도는 이제 일도 아닌 것 같군.’
그 경험 이후 확실히 붉은 돌의 힘을 움직이는 게 더 쉬워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유더의 속을 모를 사내가 도리어 염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힘들지 않나?”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이전보다 힘들지 않은 건 유더 뿐만이 아니었다. 키시아르 쪽도 예전에 비해 확실히 편안해 보였다.
유더는 드러난 몸 안을 흐르는 색색깔의 힘들을 빠르게 살폈다.
키시아르의 몸 가운데 부분에 자리 잡은 그릇의 상태나 크기 자체는 전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이전과 다른 점은 몸에 번져 있는 기운의 총량이었다.
금빛을 띤 마력과 푸른빛을 띤 오러는 잘 보이는 데 비해 신력과 각성자의 힘은 전보다 존재하는 양이 적었다. 이전에는 엉망일지언정 네 개의 힘이 차지한 범위가 서로 엇비슷했던 걸 생각해 보면 균형이 깨졌다 보아도 될 만한 상태였다.
‘아마 이번에 신력과 각성자의 힘을 많이 썼기 때문에 이렇게 됐겠지.’
보통 사람은 한 개의 힘도 가지기 힘들지만 키시아르에게는 네 개나 되는 힘이 존재한다. 때문에 각 힘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늘 까다로운 노력을 해야만 했다. 이 힘의 균형이 깨지는 건 곧 그의 그릇도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그릇의 상태 자체는 솔직히 놀랄 만큼 괜찮아 보인단 말이지.’
키시아르의 그릇은 얌전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주변을 두른 붉은색 각성자의 힘에도 딱히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면밀히 살피고 난 뒤 유더는 뭔가를 깨달았다.
‘엉킨 부분들이… 줄어들었어.’
키시아르의 몸을 처음 열어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네 개의 힘이 마치 식물 뿌리처럼 가닥가닥 뒤엉켜 몸 이곳저곳의 흐름을 막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묶인 것처럼 정체되어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흐름이 막혀 부풀어 올라서는 보기만 해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지닌 힘이 많고 대단하더라도 내부가 그리 엉망진창인 상태인데 뭘 어쩌겠는가. 그가 전례 없이 대단한 힘을 지녔음에도 평생을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힘이 흐르는 경로나 몸 곳곳이 제법 깨끗했다. 한 가지 힘밖에 없는 다른 이들처럼 아주 정돈된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하면 그렇다는 소리였다.
‘괜찮아진 기분이 든다던 게 정말 기분 탓이 아니었다고?’
네 가지 힘 간의 균형이 맞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몸에 부담을 끼칠 일도 없을 것이다. 뭘 했다고 이렇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키시아르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유더는 놀라움을 느끼며 더욱 집중하여 기운의 흐름을 살폈다. 더 자세히 보니 배 아래쪽에 주로 자리잡고 있는 각성자의 힘의 전체적인 양은 줄었을지언정, 키시아르의 그릇을 보호하는 붉은 힘은 전보다 조금 더 두터워진 듯도 했다.
‘그리고 희미해서 확신하긴 어렵지만… 그릇에 흘러들어오고 나가는 다른 기운의 흐름에도 붉은 힘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군. 그렇다면 이 변화는 키시아르의 각성자의 힘이 전체적으로 더욱 강해졌기 때문인가?’
관찰을 하려다 보니 어느샌가 고개가 점점 기울었다. 그것을 깨달은 건 유더의 손이 닿은 복부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며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열성을 다해 살피는 건 좋지만… 그대로 가다간 코끝이 배에 닿겠는걸.”
유더는 어깨를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정말 거의 그 수준으로 가까이 맞닿은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기꺼워서 문제였지. 그래서, 상태는 어때 보이나? 그럴 정도로 놀라운 부분이 있었나?”
고개를 조금 움직이면 키시아르도 자신의 내부를 볼 수 있겠지만,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유더만큼 자세히 볼 수는 없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제 많이 사용하신 신성력과 각성자의 힘이 줄어든 상태임에도 그릇의 상태가 전보다 좋습니다. 특히 몸속에 엉켜 있던 기운의 흐름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정돈된 것 같더군요.”
그 말을 하는 동안 유더의 손이 닿은 부위에 위치한 붉은 기운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마치 그 손안에 든 힘이 자신과 동류임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래? 확실히… 요즘 힘을 쓰기가 점점 더 편해진다고 느끼긴 했었지.”
“아무튼 그릇에 나쁜 영향을 미친 건 아닌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아마 보좌 덕분이 아닐까 싶은데. 함께 있으면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되니까.”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실없는 농담에 대꾸하며 힘을 거두려던 중, 문득 이논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키시아르와 몸을 섞은 이후 유더의 혼이 놀랄 만큼 안정되었다고 말했다. 혼의 안정이라는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들 사이의 불가사의하고 보이지 않는 연결이 강화될수록 그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면 키시아르 또한 같은 영향을 받지 않을까?
게다가 유더는 붉은 돌의 살아있는 매개체나 다름없는 몸이니 그 ‘안정’의 영향이 키시아르의 신체와 기운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격투장에서 신성력을 많이 써서 힘들어했을 때도 접촉 이후로 괜찮아지지 않았었던가?’
어쩌면 이건 그냥 넘기지 말고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유더는 그것을 조금 간결히 요약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추측을 들은 사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실제로 그때 급격히 상태가 안정된다고 느낀 건 맞으니까. 시험해 볼 가치는 있어 보이는군.”
시험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뻔했다. 이전과 같은 신체 접촉이다. 가장 쉬운 건 물론 입맞춤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야 늘 괜찮고말고.”
“그러시다면 살짝 입만 맞춰 보겠습니다.”
“좋아. 눈을 감고 있을 테니 준비되면 하게. 고전 소설에 나오는 기사의 키스를 기다리는 미인이 된 기분이라 굉장히 두근거리는군.”
그런 말을 보통 입맞춤 받을 당사자가 스스로 하던가? 그렇지만 키시아르라서 놀랍지 않았다.
유더는 아무 말 없이 키시아르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힘을 거두지 않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벌써 몇 번이나 해 본 행위인데도 눈을 감은 채 미소짓고 있는 입술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익숙함 대신 조심스러운 긴장감이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유더는 길게 가느다란 숨을 내쉰 뒤,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일순 뜨거운 저릿함이 전신을 가볍게 훑고 지나가며 손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
이렇게나 작은 접촉인데도 매번 불꽃이 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어째서일까.
긴장한 접촉을 그대로 느꼈을 키시아르 쪽은 아마 우습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그 생각은 이내 어디선가 솟아올라 스르르 몸을 감싸는 향을 느낀 순간 녹아 사라졌다.
딱히 향을 갈무리하지 못할 만한 몸상태가 아님에도 약속이나 한 듯 두 개의 향이 동시에 피어오른 건 두 사람 모두 같은 순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유더는 입술 안으로 파고들어 얽히는 움직임에 한참 응한 뒤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젖은 입술로 눈을 뜨며 제 뺨을 어루만지는 사내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어떤 예감을 느꼈다.
앞으로 수백 번, 수천 번의 입맞춤을 더 하게 되더라도 키시아르 라 오르를 상대로 한다면 매번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여기에 있는데.
“……이거, 내 눈에도 보이는 걸 보니 더 시험해 보지 않아도 결과는 확실하겠는걸.”
유더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다시 시선을 내렸다.
키시아르의 몸속 기운들은 방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의 말마따나 결과는 더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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