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9화
“시신을 확인해 본 결과 2공자님이 맞으시더군요. 그리고 시신의 전신에는… 검으로도 마법으로도 낼 수 없을 기이한 상처가 가득했습니다.”
검으로도 마법으로도 낼 수 없을 상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 알아차렸다.
기사들은 그 상처가 각성자의 능력으로 난 상처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와 2공자가 전날 마병단에 향하려 했다는 점까지 합쳐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추리였다.
“-때문에 2공자님과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을 수색하고자 하오니 부디 허가하여 주십시오.”
말이 허가 요청일 뿐 표정은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유더는 기사의 딱딱한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절한다는 건 마병단 측에 범인이 있다고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짓이나 다름없으니 이쪽에서도 당연히 받아들이긴 해야겠지. 다만…….’
유더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 키시아르의 입에서 그대로 흘러나왔다.
“먼저 헤른 2공자에게 일어난 불운한 일에 조의를 표하네. 그의 억울함을 돕기 위해서라면야 마병단 또한 당연히 협조할 거야. 다만, 수색 요청 전 당연히 해야 할 일 하나가 빠진 것 같지 않나?”
기사를 바라보는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병단의 책임자를 만나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쪽의 입장도 충분히 듣고 조사한 뒤 수색 협조 요청을 하는 게 순서일 텐데. 혹 2공자가 이곳에 확실하게 발을 들였다는 증거가 이미 나왔는데 나만 모르는 건가? 아니면 혹 수색 과정에서 내 말은 그다지 들을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나? 어느 쪽이든 이것 참 섭섭한데.”
그래. 바로 이 점이 유더의 신경을 건드렸다.
2공자가 마병단으로 향하려다 시체로 발견되었다면 당연히 책임자인 키시아르를 비롯한 마병단원들을 조사한 뒤 수색 요청을 하는 게 다음 순서다. 당당하게도 조사 과정을 건너뛰고 내부 수색부터 하려는 건 마병단을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키시아르의 말을 들은 기사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제야 자신들이 지나치게 성급했다는 걸 자각한 눈빛이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펠레타 공작 전하.”
“지금은 마병단장으로서 여기 서 있으니 호칭을 제대로 불러 주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마병단장님. 일단 2공자께서 어제 마병단에 방문하려 하셨다는 건 그분의 시중을 드는 하인 여럿이 증언한 바였기에 당연히 이곳에 방문하셨으리라 섣불리 짐작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기사가 조금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2공자님을 따라갔던 시종과 말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에 어쩌면 그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여겨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혹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제가 경황이 없어 실례를 범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모두에게 익숙할 소문 속 펠레타 공작과는 조금 다른 키시아르를 마주하고 나니 이곳이 요즘 한창 상승세를 달리는 마병단이라는 게 뒤늦게 실감이 난 모양이었다. 사과가 아주 마음에 차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는 했다니 그래도 봐주기로 했다. 시종과 말의 흔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면 기사의 말마따나 조사보다 수색이 먼저라 판단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키시아르 또한 그렇게 판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사과를 받아 주지. 그러면 우리도 함께 수색을 도와 살피도록 해 볼까.”
굳은 얼굴로 들어선 기사들이 지부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단원들과 제국군, 지원자들이 무슨 난리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키시아르와 유더가 뒤에 버티고 있는 걸 보고는 이내 신경을 껐다. 다들 몹시 빠른 적응력이었다.
그러나 마구간, 창고, 별관을 비롯해 그 외 오래된 건물 곳곳을 돌아다녀도 못 보던 말이나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 라델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흠. 혹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지부에 누군가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여겼는데… 역시나 이렇다 할 흔적은 없어 보이는군.”
키시아르가 텅 빈 뒤뜰을 바라보며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정말로 2공자께서 이곳에 방문하지 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니까. 어제저녁 지부의 대문을 닫은 이후로 2공자는커녕, 쥐 한 마리도 방문한 적이 없네.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정 미심쩍다면 어제 뭘 했는지 아예 다 말해 주는 게 낫겠군. 우선…….”
키시아르는 라델의 앞에서 어제저녁 무엇을 했는지 막힘없이 읊어 주었다. 지부의 대문을 닫고 공식적으로 손님의 방문을 끊은 시간 이후, 키시아르는 저녁 식사를 하고, 쌓인 업무를 확인했으며 유더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몸소 내기 격투장에서 붙잡힌 이들의 조사를 참관한 뒤 목욕을 하고 잠들었다.
“이 모든 일정에는 항상 곁에 다른 이들이 있었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증인을 데려올 수 있네. 아, 물론 다른 이들의 일정 또한 조사가 필요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 어떤 이들이 궁금한가? 내 부관? 보좌? 남부 지부의 책임자? 아니면 문을 지키던 이들?”
“아뇨. 그…….”
“우선 내 곁에서 늘 가장 많은 일정을 함께 하는 천재적인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보좌 유더 아일은…….”
라델은 대답을 늦게 한 죄로 키시아르와 함께 있었던 유더와 나단 주커만, 그 외에 그들의 뒤를 따르는 쿠르가를 비롯하여 눈에 들어오는 모든 단원들의 일정까지 순식간에 줄줄이 듣게 되었다.
라델도 소름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겠지만, 그걸 멀지 않은 곳에서 듣고 만 단원들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내가 어젯밤에 식당에 몰래 내려가서 빵 3개를 훔쳐 먹은 건 대체 언제 어떻게 알게 되신 거야?!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잠깐만요. 단장님……! 제가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저녁 훈련에서 도망친 걸 왜 하필 유더 앞에서……!”
“제발 거기까지만요……!”
“…거기까지만 말씀해 주셔도 충분할 듯합니다! 어제 단장님과 다른 분들께서 2공자님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제 알겠습니다.”
“그래? 말만 들어서 되겠나?”
“예! 충분합니다만 더 필요하면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라델이 황급히 외쳤다. 키시아르가 천연덕스럽게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하는 동안, 유더는 다른 기사 몇 명이 1공녀 마이라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같이 헤른의 문장을 가슴에 단 기사들이었다.
“저, 1공녀님. 정말로 여기에 왜 계셨던 겁니까. 혹시 어제부터 일정과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어딘가 다녀오셨던 게… 이곳에 다녀오시기 위함이셨습니까?”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들을 들어 보니 그들은 마이라를 따르는 측 기사들인 듯했다.
“말했잖아요. 바보 같은 친척 때문에 온 거라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2공자님께 그런 일이 생긴 이상 다들 1공녀님의 뜻을 곡해하기 시작할 겁니다.”
“2공자님과 혹 마주치진 않으셨습니까?”
“마주친 적은커녕, 샬로인에 온 이후로는 서로 대화도 하지 않았어요. 숙소도 달랐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건 유더도 이미 들은 바 있었다. 2공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내려오는 동안 마이라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사항 중 하나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2공자와 그녀는 누키조의 격투장이 파괴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문의 방계 젊은이 한 사람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각자 샬로인으로 달려왔다. 각기 다른 저택을 숙소로 택하였으나 소식통을 통해 서로 무엇을 하려는지는 얼추 짐작 가능했다.
‘제가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멀빈을 구할 방도를 찾아본다는 핑계로 마병단에 왔으나 실제론 뭘 할지 2공자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저도 2공자가 마병단에 가겠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식을 전해 들었으니까요. 그럴 거라 예상했기에 어제 공작 전하를 뵙는 동안 미리 걱정하기도 했었죠.’
때문에 마이라는 당연히 2공자가 밤의 어둠을 틈타 키시아르를 따로 만나고 제 숙소로 다시 돌아갔을 줄 알았다고 했다.
‘아쉴라브가 숙소로 다시 돌아왔단 말까진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받진 않았기에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랬군. 하지만 2공자는 어제 우리에게 오지 않았네.’
키시아르는 간결하게 이쪽의 입장을 밝혔다. 의심하려면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겠지만, 마이라는 그들의 말을 믿겠다고 밝혔다.
“시기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왜 하필 이런 때 이런 일이…….”
기사들 중 한 사람이 라델의 눈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번 일이 마이라에게도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2공자가 죽었다면 이제 남은 후계자 후보는 마이라 하나가 아닌가? 왜 저런 반응이지.’
마이라 또한 그들의 어두운 기색을 느꼈을 텐데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찌푸린 얼굴로 가슴을 똑바로 펴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쉴라브가 왜, 어째서 죽었는지 명확히 밝히는 거예요. 이런 일까지 내게 이득이 될지, 아닐지를 따지며 행동하고 싶지 않네요. 그러니 나는 라델 경이 내게 보인 의심도 이해할 것이고, 앞으로의 조사에도 충실히 응하겠어요.”
“1공녀님…….”
기사들의 표정이 흐려졌다가는 이내 단단해졌다. 그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조금 훔쳐 들었을 뿐이지만, 유더는 마이라가 자신의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인망이 두텁다는 걸 느꼈다.
“그러면 이곳에서 더 찾아보았자 나올 건 없을 듯하니, 어떤가. 우리가 2공자의 시신이 있는 쪽으로 찾아가 조사를 돕는 건?”
그때, 키시아르가 라델에게 제안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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