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화
“주커만 경. 말을 데리고 물러나 있으십시오.”
유더는 거침없이 날아드는 응축된 힘을 검으로 쳐 낸 뒤 바람의 힘을 일으켜 작은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 흙먼지가 비산하며 적의 시야가 가린 틈을 타 빠르게 외쳤으나 나단 주커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말은 누가 보호합니까?”
잠시 주변을 휙 훑은 나단 주커만이 말고삐를 놓고 백마의 엉덩이를 힘차게 두드리며 높고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말이 어떤 명령이라도 들은 것처럼 황급히 뒤돌아 마구간 뒤쪽을 향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전투가 일어나는 앞문과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저대로 보내도 되는 건가 싶어 약간 당혹스러웠다.
“뭘 하신 겁니까?”
“설명할 시간은 없을 듯하군요. 아무튼 둘 중 누가 말을 보호할지 신경 쓸 시간에 알아서 도망치게 하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나단 주커만이 전투에 참여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듯하니 더 말해 보았자 소용없을 듯했다. 유더는 두말없이 힘을 거두었다. 그제야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말이 도망가는 모습을 확인한 남국인 검사가 날카롭게 외쳤다.
“바흐람!”
그의 오른쪽에 있던 부하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땅을 박찼다. 계속 주시하고 있었음에도 뭔가 이상하게 존재감이 없는 놈이다 싶더니, 그가 움직이는 순간부터 몸 주변에 반투명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모습이 반쯤 흐릿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 기운에 감싸인 순간부터 그의 발걸음은 소리를 잃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빛도, 움직이면 당연히 나야 할 소리도 모조리 고요해지고 움직임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니 마치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허상의 유령이 움직이는 듯했다.
‘저놈이 기척을 숨길 수 있게 한 각성자겠군.’
과연, 저런 능력이라면 이쪽에서 세 명이나 되는 놈들의 기척도 눈치채지 못할 만했다.
‘하지만…… 약점이 너무 명확해.’
저 힘이 유용하게 작용하는 건 적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에 있을 때뿐이다.
아무 힘도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저 정도 은신 능력도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순식간에 놓쳐 버리기에 딱 좋은 능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적이 예상치 못한 건 유더와 나단 주커만이 이미 은신 계열 최고의 능력을 격투장에서 마주한 바 있다는 점이었다.
‘큐레이지나의 완전히 투명해지는 능력에 비하면 저건 그냥 눈에 뻔히 보이는 수준이지.’
무시무시한 관찰력으로 그 큐레이지나조차 기어이 잡아냈던 나단 주커만이다. 하물며 눈에 보이는 놈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유더는 무서운 속도로 그놈을 추격하는 나단 주커만을 보고 나서 그쪽에는 완전히 관심을 껐다.
“동료를 쫓아가지 않아도 되는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관심을 꺼버린 유더를 보며 남국인 검사가 물었다. 유더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내가 왜?”
어차피 알아서 잘 처리하고 올 거란 믿음과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유더의 지나치게 삭막한 표정 때문인지 적은 그 말의 뜻을 다소 다른 방향으로 이해한 듯했다.
“방금 그자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혼자서 둘을 상대하겠다니. 오만하기 그지없군.”
“…….”
후자는 맞지만 전자는 아니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 같은 불세출의 인재가 여기서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었기에 유더는 입을 다물었다.
유더의 속을 모를 남국인 검사가 검을 들며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는 침입자 너희들이 대체 어디서 온 자들인지 알 수 없어 여러 오해를 했었지. 타이누에서 빠져나와서야 비로소 너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그가 검을 치켜세운 채 유더를 겨누며 달려들었다.
“너희들은 어차피 여기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유더는 검을 들어 상대의 공격을 막아 냈다. 두 개의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크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감각이 들었다. 딱 한 번 맞붙은 것만으로도 짜릿하게 상대의 실력이 대충 가늠되었다.
‘과연, 입만 살아서 소드 마스터의 검을 상대한 건 아니었군. 보기보다 힘이 대단한데.’
손을 보호하는 장갑을 늘 끼고 있는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마법의 힘이 실린 장갑이 보조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처음 맞부딪친 순간 손바닥이 찢어졌으리라.
상대 또한 맞부딪친 유더의 힘이 자신보다는 약하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무시무시한 힘 때문에 맞붙은 검이 미약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주인에게 과분한 무기를 쓰는군. 튼튼한 검에게 감사해라.”
“…….”
“이전에 붙었던 자는 너보다 훨씬 나은 검을 썼던 것 같은데……. 그쪽은 안 왔나? 아니면 방금 사라진 그자?”
“…….”
“아까 바람을 쓴 걸 보면 너는 그때 바람과… 물을 썼던 그자겠지. 두 가지 능력이 끝인가? 아니면…….”
유더는 참지 못하고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더럽게 말 많군.”
“뭐?”
여기서 의미 없이 힘겨루기를 하는 바보짓을 해 봤자 다른 한 놈에게 등 뒤를 헌납하고 날 죽여 달라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오도록 미리 유도할 수 있다면 불리한 힘겨루기도 때로는 괜찮은 미끼 유인책이 될 수 있는 법이었다.
‘지금!’
유더는 맞부딪치던 검을 흘려 내면서 뒤로 훌쩍 물러나며 바람의 힘을 사방으로 훅 흩뿌렸다.
“으윽!”
유더의 사각지대에서 접근해 공격하려던 다른 한 놈과 남국인 검사가 흙먼지를 품은 바람에 얼굴을 사정없이 얻어맞으며 비틀거렸다. 유더는 그 틈을 타 검을 쥔 반대쪽 손을 뻗어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거세게 내렸다. 손아귀의 힘이 일시적으로 약간 빠져 있던 적들의 검날이 유더의 손길을 따르듯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쭉 내려갔다.
“어엇…!”
그들은 아마 검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듯 엄청나게 무거워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을 것이다. 남국인 검사는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면서도 어떻게든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버텨 냈지만, 유더의 등 뒤에서 급습하려 했던 놈의 동료는 아니었다. 휘청이며 내려간 손 사이로 검이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땅을 굴렀다.
쥐고 있던 무기를 놓치고서 당혹한 찰나의 순간.
그 짧은 시간 정도면 상대의 몸에 검을 박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유더는 즉시 바람을 밟고 훌쩍 뛰어오르면서 품 속에서 꺼낸 작은 단검을 비수처럼 내던졌다. 선즈와 에몬이 주었던 새 단검이었다.
‘받자마자 유용하게 쓰는군.’
“크헉……!”
단검에 어깨를 꿰뚫린 남국인 검사의 동료가 비명을 삼키며 쓰러졌다. 와중에 볼썽사납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 걸 보면 역시 그놈도 겉모습과는 달리 제대로 훈련을 받은 자가 맞았다.
“네놈……!”
유더는 이전보다 한층 격렬해진 감정을 담은 남국인 검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시 바람을 밟고 훌쩍 뛰어 물러났다. 유더의 움직임을 뒤쫓아 남국인 검사가 쏘아 보낸 힘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품고 따라붙다가, 별안간 저들끼리 부딪쳐 공중에서 사정없이 폭발했다.
-쾅!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다고?’
상대적으로 냉정한 머릿속과는 달리, 폭발의 사정권에 든 몸은 방향을 잃고 내동댕이쳐지듯 땅에 내리꽂혔다.
“큭…….”
유더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낙법을 이용하여 굴렀다. 큰 타격은 없었지만 그래도 뒤이어 계속해서 날아드는 공격의 여파까지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쾅, 콰쾅! 쾅!!
정신없이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 유더가 불러낸 흙의 벽과 바람이 빠르게 주인을 감싸고 지켜 주었다.
‘정신없는 공격은 네놈만 할 줄 아나.’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저 남국인 검사는 자신의 힘을 기사들이 사용하는 오러의 공격 방식과 크게 차이 없는 방식으로만 사용했다. 공중에서 서로 맞부딪혀 폭발시킨 건 조금 놀라웠지만, 그저 빠르고 단순하게 적을 노릴 뿐인 원거리 공격은 하나도 신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유더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은 검을 쥔 채 땅을 짚고 힘을 발했다.
-우르르르릉…….
이전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힘이 발휘됨과 동시에 그의 피부를 가린 장갑과 옷 속에서 검붉은 핏줄이 사방으로 쭉 솟구쳐 올라왔다. 왼쪽 눈동자 안쪽에서 일렁이는 황금빛이 환하게 점멸했다.
땅의 힘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느꼈는지 남국인 검사의 공격이 잠깐 멈칫했다. 그 틈을 타 몸을 일으킨 유더는 자신의 찢어진 겉옷 안쪽에서 부서져 흘러내린 무언가에 일순 시선을 빼앗겼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전투 도중에 한눈을 판 적이 없었던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오색의 알록달록한 포장 종이, 그리고 그 속에서 빠져나와 흩날리는 색유리처럼 반투명한 사탕 조각들이었다.
‘……아. 이런.’
폭발의 여파에 휩쓸렸을 때 옷 주머니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주머니 안에 이곳에 올 때 키시아르가 주었던 사탕이 들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직 하나밖에 안 먹었었는데.’
유더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낯선 기분으로 부서진 사탕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옷을 더듬어 보지 않아도 알았다. 지금 주머니 안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발밑에서 우르릉거리는 땅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유더는 고개를 돌려 남국인 검사를 똑바로 보았다. 유더의 꼴도 제법 엉망이 되었으나 그의 꼴도 처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얼굴을 결벽적으로 가리던 옷이 찢겨 나간 덕에 아주 짙은 고동색 머리칼과 새파란 진청색 눈동자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골이 장대한 체격과 달리 누구나 보면 놀랄 만큼 귀족적이고 선이 얇은 외모였다. 그러나 유더에게는 그런 부분 따위는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눈…….”
유더의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를 본 남국인 검사가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연 순간이었다. 왼쪽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던 금빛이 별안간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사그라졌다 여겼던 땅의 진동 또한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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