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2화
‘이때까진 모두 다 잘 굴러가고 있었는데 말이지…….’
유더는 에버가 적절한 판단을 내려 나그란의 별을 빠르게 제압한 부분을 읽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에버가 상대한 각성자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보호와 감금의 양면적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자였다. 아마 그놈이 태양궁 침범 사건 때 그곳에서 일어난 소란을 외부와 차단하는 역할을 했으리란 건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해 보였다.
제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참 잘 알고 있는 놈이었지만, 그 까다로운 능력에도 물론 약점은 있다. 능력을 쓴 본인이 공격당해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기껏 만들어 낸 공간도 유지하기 어려우리란 사실이었다.
에버는 그 점을 아주 잘 간파해 그놈을 효과적으로 두들겨 패 주었다. 무기는 부수되 사람의 육신은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만 공격할 수 있는 마병단 최고의 능력 조절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에버가 그놈을 제압하고 빠져나오는 사이 힌도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힌은 남은 세 놈을 혼자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았고, 에버가 빠져나오기 직전에는 현자를 거의 잡을 뻔했다.
다만 에버와 힌.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은 건 혼자서는 사람 하나 때리지도 못할 듯 약해 보였다는 현자. 바로 그놈이었다.
유더는 이어지는 부분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현자는 제가 빠져나가기 직전, 한 명의 각성자만을 데리고 디아카 공작이 있는 곳을 향해 도망쳤습니다. 뒤를 쫓으려 했으나 분명 쓰러트려 제압했다고 여겼던 이들이 부상을 입은 몸으로 일어나 저희의 뒤를 노렸습니다. 다시 쓰러트리고, 또 쓰러트려도 그자들은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더군요.’
현자를 지키던 각성자들은 뼈가 부러지고 기절했다 깨어난 몸으로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버와 힌을 향해 끝없이 달려들었다. 서신을 보면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단 점이 두 사람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듯했다.
당하고 또 당할 때마다 처절한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서도 이내 또다시 일어나 미친 듯 매달리는 적들이라니. 서신 속의 묘사만으로도 상황이 잘 짐작되었다.
“세뇌란 정말 골치 아픈 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군.”
키시아르가 유더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유더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이지가 없는 상태의 적이라면 때려눕히기 편했을 겁니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게 우선인 상태에서 그런 놈들과 싸우는 건 경험이 더 많이 쌓인 이라 해도 어려웠겠지요.”
“그랬겠지. 내 보좌라면 거기서 어떻게 처리했을까?”
“저라면…….”
유더는 자신이 거기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니폴렌이 적을 찾아낸 즉시 놈들이 보호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주변을 봉쇄했을 것 같군요.”
놈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면 유더는 그보다 더 큰 힘으로 그 바깥을 다시 막아 도망칠 구석 자체를 봉쇄했을 터다. 다른 각성자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 압도적인 힘을 단번에 사용 가능한 유더 자신 외엔 불가능한 방법이었고 가장 빠른 처리법이기도 했다.
유더의 답을 들은 키시아르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장군패를 단숨에 한계까지 전진시켜 봉쇄 후 몰수의 전술. 과연 보좌다운 방법이군.”
그건 그들이 함께 두었던 전술 게임에서 유더가 사용했던 전술에 빗댄 비유였다.
동료들이 있던 그때 그곳에는 유더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또다시 찾아내었다. 발목을 잡힌 상황에서 에버와 힌을 도와준 건 시기적절하게 모습을 드러낸 가케인이었다.
‘가케인!’
‘미안해요 에버. 지시받은 대로 최대한 모습을 감춘 채 도우려고 했지만 어차피 이 상황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여긴 저와 힌이 맡으면 되니 어서 가요!’
덕분에 에버는 힌과 가케인에게 세뇌당한 이들과의 전투를 맡기고 현자 쪽을 쫓아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현자의 곁에 마지막까지 붙어 있던 자가 에버를 방해했다. 한쪽 귀에 긴 흉터가 있는 왜소하고 소심한 인상의 남자. 그자는 다른 이의 능력을 훔쳐 열화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디에먼이었다.
***
‘여긴 분명 디아카 공작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는데 왜 숲이 끝나지 않는 거지? 기분 탓이라기엔 진작 찾아내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는데……!’
에버는 뛰던 속도를 늦추며 날카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도 보이지 않아. 기척도 없어. 그렇다는 건……. 정신계 능력인가?’
아까 현자와 함께 허둥지둥 도망치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었다. 남국계인가 싶을 만큼 피부가 붉고 한쪽 귀에 쭉 찢어진 흉터가 있는 자였다.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그들의 모습을 놓치고 길이 반복되었던 것 같았다.
‘이게 정신계 능력이라면 계속 달려 봤자 헛수고야. 안에서 부수고 빠져나가야 해.’
에버는 냉정하게 마병단에서 받은 정신계 능력 대비 훈련 내용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시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안에서 빈틈을 발견하여 때려 부수고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디를 부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디를 봐도 그저 평범한 호숫가 산책로처럼 보여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에버는 갑자기 주변에서 들려온 바스락대는 소리에 놀라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니폴렌?!”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건 적이 아니라 작은 고양이였다. 나뭇가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니폴렌을 보며 에버는 쿵쾅대며 크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공격부터 내지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네.’
니폴렌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는 데엔 그녀보다 나을지도 몰랐다.
“니폴렌. 어디로 가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겠니?”
“…….”
고양이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에버는 고민하다 말을 바꾸었다.
“엘레……. 음. 네 형을 보러 이제 같이 돌아갈까?”
그제야 새끼 고양이가 입을 작게 벌려 야옹 하고 울었다. 꼬리를 바짝 세운 고양이가 어느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에버는 고민하지 않고 뒤를 따라 뛰었다.
그렇게 뛰다 보니 어느새 주변의 풍경이 이지러지며 서로 맞지 않는 퍼즐처럼 일그러진 나무 사이의 틈이 눈에 들어왔다. 에버는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모으며 그곳을 향해 내질렀다.
한 번 내질렀을 때 뭔가가 손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손을 뒤로 물린 뒤 또다시 두 번째 공격을 했다. 눈앞의 세계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지러졌다. 나무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듯도 했다.
세 번째로 뭔가를 부수자 이번에는 눈앞에서 흐릿하게 그녀를 피해 도망치려 하는 사람의 형체 같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에버는 본능적으로 그놈이 바로 제가 잡아야 할 자임을 깨닫고 계속 손을 내질렀다.
쿠웅, 쿵. 세계가 부서지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가다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순간,
- 쿵……!
마침내 모든 것이 부서지며 그녀를 둘러싼 세상의 색이 단숨에 바뀌었다. 에버는 눈앞에 알 수 없는 환상의 파편들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떴다.
“으아아악!”
에버는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드디어 현실로 빠져나왔다.
제일 먼저 본 건 손에 스쳐 부서진 나무, 그리고 아까 에버와 눈이 마주쳤던 남자였다. 그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뒹굴다가 에버를 보자마자 몸을 떨며 시선을 피했다.
에버는 그가 피를 닦아 내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역시 나한 그 녀석의 능력은 하나도 강하지 않아……. 현자님의 명만 아니었다면 굳이 이따위 힘을 쓰는 대신 이전 힘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을 텐데……! 아아……. 아깝다… 너무나 아까워…….”
‘나한? 지금 나한의 힘이라고 한 건가?’
에버는 현자의 곁에 남은 자들의 능력에 대해 칸나가 읽어 낸 내용을 들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자의 능력을 추측해 냈다.
‘남의 능력을 열화판으로 베낄 수 있는 자가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저자가 방금 한 건 나한의 능력을 베껴 길이 반복되는 환각을 보여 준 거였겠구나. 현자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어쩐지 현실과 구분이 힘들 정도의 환각을 다룰 줄 알면서 그렇게 쉽게 깨지는 건 이상하다 싶었다. 저자가 진짜 나한이었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에버는 그자의 곁에 현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입술을 깨문 뒤 고개를 돌렸다. 환상에 빠져 있는 동안 그녀는 어느새 디아카 공작가의 사람들이 있는 호숫가 근처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모두가 에버를, 그리고 그녀 앞에 나뒹구는 이를 놀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에버는 그중에서 가장 놀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낯선 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프루엘레는 다행히 아직 들키지 않았구나.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른 건 아니었어.’
하지만 모습을 들키지 않은 상태로 현자 일행을 잡아내려던 계획은 무너지고 말았다. 에버가 낭패감을 약하게 느끼고 있던 사이,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반대편 풀숲에서 걸어 나와 디아카 공작의 앞에 엎드렸다.
“저, 아지헨 툼이 디아카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순례자의 로브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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