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55화 (755/805)

755화

어둡고 춥다.

고요하며 끔찍하다.

세상의 모든 불길한 것들을 모아 뭉쳐 둔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유더는 희미하게 제 뺨을 건드리는 싸늘한 손끝을 느꼈다.

그것은 맨살이 아니라 생명을 잃어버린 가죽을 엮어 꿰맨 장갑의 감촉이었다.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끔찍한 그 감각이 유더의 희미한 무의식 속에 부정적인 감정을 일깨웠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누군가 웃음을 흘렸다. 소리가 아니라 몸을 두른 공기의 흐름이 피부를 건드렸기에 느낄 수 있었던 변화였다.

그 낯설고도 묘하게 익숙한 감각은 대체 무얼까.

‘그리고 여긴… 어디지?’

유더는 눈을 떴다. 몽롱한 시야 너머로 형체 없이 흔들리는 어둠만이 보였다. 누워 있는지,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가운데 오로지 제 얼굴에 닿아 있는 싸늘한 감각만이 선명했다. 천천히 눈을 굴린 유더는 제 뺨을 매만지는 것이 하얀 가죽 장갑으로 감싸인 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 손이었다.

그곳에 본디 마땅히 붙어 있어야 할 몸은 없었다. 누군가 잘라 낸 것처럼 어둠 속에서 홀로 흐늘대는 손은 보통 사람의 것보다 훨씬 컸고, 기이하게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유더는 분명 그 장갑을 본 적이 있었다.

그저 그 사실만 떠오를 뿐, 어디서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자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또다시 유더의 뺨을 건드렸다. 시체처럼 싸늘하고 차가운 그 촉감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추위를 느낀 순간 문득 새로운 기억이 솟아올랐다.

그건 유더가 가죽을 꿰맨 실의 미세한 느낌마저 외울 만큼 수도 없이 만지고 닿아 본 물건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키시아르.’

희미하게 흘러나온 이름이 머릿속을 어둡게 감돌고는 사라졌다.

그래. 그 흰 장갑은 언제나 그것을 끼고 다녔던 사내의 것이었다. 숨이 끊기던 마지막 날까지도 맨손을 감추고 있던 그 하얀 가죽.

몇 번이고 쥐어뜯고 할퀴어도 유더의 몸을 단단히 구속한 채 떨어진 적이 없던 그 손. 그 냄새. 그 촉감……!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유더는 비린 혈향과 해묵은 먼지, 그리고 썩은 시취를 동시에 맡았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숨을 삼킨 순간, 뺨에 닿아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모든 냄새가 싹 사라지며 끓어오를 뻔했던 감각도 도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머리는 이제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깨어났다. 유더는 눈앞의 장갑과 손이 제가 알고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확신했다.

그건 분명 키시아르의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키시아르 라 오르는 저런 장갑을 끼지 않는다. 그는 파티가 열려도 여간해서는 맨손을 유지하며 반지나 팔찌 같은 물건으로 장식하기를 즐겼다. 그의 손을 만지면 차가운 가죽의 촉감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매끄럽고 단단한 피부의 감촉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험한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은 듯 보여도 닿아 보면 수없이 검을 잡아 보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단단한 검사의 손이었다.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은, 이미 죽어 버린 남자만이 저 장갑을 손에 두르고 절대로 벗지 않았다.

숨이 조금씩 가빠져 왔다. 유더는 말없이 흔들리고만 있는 장갑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키시아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은 부름이 흘러 나가자 그에 반응하듯이 흰 장갑이 스르르 움직였다. 그것이 유더의 뺨에 닿았을 때 유더는 또다시 은은히 풍기는 비린 냄새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가만히 있겠다는 의지를 읽은 것처럼 흰 장갑 속의 손이 느리게 내려갔다. 그것은 유더의 깨문 입술을, 턱선을, 그리고 거기서 더 내려가 마침내 목 위에 닿았다.

유더는 그것이 제 목을 조를지도 모르겠다고 느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갑에 감싸인 손은 그저 맥박이 고동치는 것을 느끼려는 것처럼 가만히 피부 위에 닿아만 있었을 따름이었다.

‘…….’

문득,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그랬다. 저 차가운 손은 가끔 이런 식으로 유더의 호흡을 느끼려는 것처럼, 혹은 죽이고 싶은 것처럼 가만히 닿아 있을 때가 있었다.

차갑고 싸늘하게, 아무런 온기도 없이 그저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사라져 곁을 떠나던 손.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서 떠나 버린, 제가 죽인 남자의 손.

…당신이다.

불현듯 그러한 확신이 끼쳤다.

그러자마자 또다시 어디선가 주변을 두른 공기가 흔들리며 변화가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을 때 느꼈던 웃음과 비슷했지만 조금 달랐다.

장갑을 낀 손가락이 느리게 오므라들었다. 검지만이 남아 피부 위를 살며시 긁으며 움직였다.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멍하니 그것을 느끼던 유더는 그 움직임이 일정한 규칙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건… 글자였다.

글자를 그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마침내 마지막 글자의 획을 완성했다. 유더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손가락이 쓴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맞았어.’

그것이 유더의 생각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손이 유더의 목을 붙잡아 쥐고는 그대로 밀쳤다. 붙잡을 틈도 없이 온몸이 새카만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유더는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 떨어지며 그대로 아찔하게 눈을 감았다가,

“아, 이제 일어났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밝은 햇살 사이에서 다시 눈을 떴다.

‘……꿈?’

눈앞에 있는 따뜻한 붉은 눈동자를 보면서도 한참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실감을 되찾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린 것처럼 심장이 강하게 뛰어 댔다. 유더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얼굴을 마주 본 채 누워 있던 키시아르가 눈가를 슬며시 찌푸리며 유더의 뺨을 매만졌다.

“유더?”

유더는 그의 손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어깨를 굳히며 벌떡 일어났다. 참았던 숨이 그제야 터져 나오며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

“유더. 무슨 일이지?”

“단장님.”

잔뜩 잠겨 쉰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그래. 나야.”

다가온 키시아르가 유더를 안으려다 멈칫하고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그는 유더의 반응을 관찰하며 아주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손을 뻗어 유더의 손을 잡았다. 맨손이 닿아 체온이 전해지자 그제야 차갑게 식었던 피부에 조금씩 열이 돌아왔다.

현실. 지금의 이 감촉이 현실이라는 게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났다. 호흡이 천천히 되돌아오며 심장 고동도 정상적인 속도를 되찾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제야 제 손에도 힘을 주어 키시아르의 손을 마주 쥐었다. 그가 깊이 숨을 내쉬자 키시아르도 그제야 다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안아 주었다.

따뜻한 온기 너머로 키시아르 특유의 서늘한 향이 풍겼다. 2성 각성자만이 맡을 수 있는 그 향. 수없이 뒤섞이며 익숙해진 그만의 향을 인지하자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좋지 않은 꿈이라도 꾸었나?”

“……제가 잠든 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혹시나 두 사람 사이에 이어져 있는 실과 감정의 여파로 무언가 느꼈을까 싶어 물어보았지만 키시아르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상한 꿈을 꾸지도 않으셨고요.”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네. 너도 일어날 때까지 그저 얌전히 눈만 감고 있었고. 잘 자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눈을 뜨더니 숨을 쉬지 않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렇군요.”

그렇다면 아까의 그 꿈은 그저 자신만 꾸었다는 소리가 된다.

정말로 이상한 꿈이었다. 이전 생 키시아르의 장갑 낀 손만 나타나는 꿈이라니. 그게 정말 단순한 악몽이었을까?

“무슨 꿈을 꾸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

키시아르의 질문에도 유더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꿈에 나타난 주체가 주체였기에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혼란이 다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가 안 되는 사항에 대해 입을 여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 제대로 된 설명을 객관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일단 무슨 말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런 상태에서 설명해 보았자 둘 모두 얻을 것이 없다. 키시아르는 어떤 상황에서든 유더에게 위안을 주려 하겠지만, 유더는 그가 자신의 혼란에 반응하여 지나치게 신경 쓰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결국 최선은 유더 스스로 어느 정도 생각과 마음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는 결론뿐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메마른 얼굴을 씻어 내듯 문지른 뒤 입을 열었다.

“조금… 정리되고 나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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