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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67화 (767/805)

767화

“나는 그 말을 이 남부에 곧 새로운 이상 균열과 몬스터가 또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뜻으로 파악했네.”

유더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키시아르의 움직이는 입술만이 눈에 크게 들어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던 일이라도 실체화되어 나타난 순간엔 어쩔 수 없이 충격을 받게 된다. 그간 생각해 왔던 대처 방법들이 일제히 마구 머릿속에서 일어나 소용돌이쳤다. 유더는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

“아톤이 저희가 몬스터를 다 해치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리 말한 것입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나 할까.”

“예?”

키시아르가 눈썹을 모으며 살짝 웃었다.

“아톤은 다년간 정체와 실력을 숨기고 제국 곳곳에 침투해 온 자로, 다른 이들을 이끌어 명을 내리는 것도 가능한 책임자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던 것으로 보이지. 즉 일정 이상의 신분을 지닌 자일 거란 뜻이네. 이건 이미 짐작했겠지?”

타국에 보내는 간자는 두 종류로 나뉜다. 보통은 이방인이라 해도 그리 주목받지 않는 하류층에 섞여 들도록 만들기 위해 침투와 변용술에 능한 자를 위주로 뽑는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게 퍼져 있는 그들만으로는 임무를 한곳에 엮고 체계적인 움직임을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간자들을 이끄는 책임자를 따로 뽑게 되는데, 이 책임자는 어떤 위험 속에서도 임무를 우선시할 수 있는 성격과 무력, 그리고 본국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인물. 즉 일정 이상의 신분과 배경을 갖춘 자로만 선정했다.

키시아르는 후자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높은 신분의 존재라면 귀족을 떠올리게 되겠지만 남국은 아니야. 그곳에서 귀족의 역할을 수행하는 신분은 ‘마샤’와 ‘우다콴’. 우리로 치자면 기사와 사제라고 할 수 있지.”

유더는 나단 주커만의 부모가 ‘마샤’였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부족을 지키는 기사와 같은 계급이었다더니, 단순한 기사 정도가 아니라 그쪽에서는 귀족과 비슷하게 여겨질 만큼 높은 신분이었던 듯했다.

“그렇다면 아톤도 마샤였습니까?”

“아니. 나단은 그자가 우다콴일 것이라 추측했네.”

“검을 쓰는데 말입니까?”

“남국인들의 사제는 우리가 아는 사제들처럼 살생을 꺼리거나 무력을 멀리하지 않네. 오히려 권장한다더군. 다만 부족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쓰느냐, 신앙을 위해 무기를 쓰느냐의 차이일 뿐.”

키시아르의 설명에 의하면 우다콴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달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죽으면 죽었지 사막 이북의 사람들과는 결코 섞이려 하지 않는 극성 민족주의자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될 듯했다.

그 말을 들은 유더는 아톤이 나단 주커만을 마쿠나타인지, 뭔지 하는 멸칭으로 부르던 모습을 기억해 냈다.

‘떨어진 별의 파편이란 뜻이라고 했었나.’

“그리고 전투 당시 자진했던 남국인 상인들이 직전에 외쳤던 말. 곧바로 해석되지 않는 말이라 찾는 데 애를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쪽 경전에서 읊는 기도의 맺음말 중 하나라고 하더군. 일종의… 추임새와 비슷한 거지. 우리도 태양신 경전을 읊다 보면 정형화된 맺음말을 몇 개 돌아가며 읊곤 하지 않나?”

“아…….”

신전에 거의 가 본 적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강제로 참석한 경험 덕에 그 정도는 알았다.

“이니아 크타 이니아. 남국에서는 그 말을 ‘모든 것이 검은 달이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고 하네.”

“그건 언제 알아내신 겁니까.”

“오늘 새벽에 나단이 찾아왔더군. 그걸 알아낸다고 예전에 살았던 곳 근처까지 다녀오고 제법 고생한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나단 주커만의 고향 또한 남부일 것이란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 날부터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그것 때문에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새삼스럽게도 나단 주커만의 일 처리가 철두철미하다고 느꼈다. 그때 아톤과 대화를 나누면서 단어의 모욕적인 속뜻만 파악한 게 아니라, 그자의 배경까지 짐작하고 알아들을 수 없던 말의 뜻을 확실하게 알아내어 키시아르에게 보고하다니.

남국에 대해 알아내기 가장 좋은 조건을 지닌 이가 자신임을 알고서 냉철하게 행한 행동이라 할 만했다. 사실은 남국 자체가 그에게는 그리 좋은 고향도, 마음의 유대가 깊은 대상도 아닐 텐데 말이다.

“아무리 그간 여러 사람을 상대로 철저하게 본심을 감추어 온 철두철미한 간자라 하더라도 신분과 살아왔을 배경을 알고 나면 대할 방법이 보이는 법이지. 사제를 긁을 때는 신학만큼 좋은 게 없는 법이고, 높은 신분 출신에 자신의 실력에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자를 자극할 때는 그자를 뭉개 준 사람의 이름만큼 좋은 게 없어.”

다 좋은데, 마지막 부분은 뭔가 이상했다. 집중하여 듣던 유더가 눈을 깜박이며 눈썹을 움찔 움직이자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 바로 여기 있는 이의 이름.”

유더 아일. 나직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기 위해 흘러나온 게 아님을 알면서도 유더는 순간적으로 거기에 반응해 버렸다.

마주친 시선 속에 비친 키시아르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유더를 보고 있었다.

“네가 이번 이상 균열과 몬스터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큰 활약을 했는지 듣자마자 과연 대단한 반응을 보이더군. 덕분에 아까와 같은 말도 들을 수 있었던 거야.”

“설마… 그래서 절 데리고 가지 않으셨던 겁니까?”

키시아르의 눈이 휘었다. 무언의 긍정 표현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자를 상대한 게 저만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그래. 그자는 나와도 싸워 보았고, 나단과도 싸워 봤지. 하지만 손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땅속에 처박히는 경험을 너와 싸웠던 그때 말곤 언제 또 해 봤겠나?”

“…….”

그야 그런 경험을 두 번 하긴 어려울 것이다. 유더도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단 한 명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큰 힘을 사용해 농락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네. 타인 공작의 최근 진술에 의하면 그자를 처음 만난 건 남국과 제국을 잇는 해상 무역을 시도했던 몇 년 전으로, 그때는 다른 상인들이 타인 공작을 상대했고 아톤은 뒤에 있었다더군. 그러다가 1년쯤 전부터 본격적으로 서부 대삼림을 통한 비밀 무역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타인 공작의 측근이 되었다고 하네. 즉, 아무리 타고난 신분이 높았다 해도 본래부터 이 정도 책임자는 아니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각성자가 되면서 본국 내에서의 위치도 올라간 자일 것이라는 뜻입니까.”

“그래. 남국인 상단의 직원들도 아톤이 책임자가 될 즈음 꽤 많이 바뀌었다더군. 본래의 실력만으로는 지금 정도의 위치가 아니었을 자가 각성한 이후 지금처럼 다른 각성자들을 이끌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겠지. 신분이 있어도 원하는 만큼의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던 이가 각성으로 실력을 얻고 더 높은 위치를 얻었다면 그 자리와 자신의 실력에 얼마나 깊은 자부심을 느꼈겠나?”

키시아르는 한쪽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자들의 마음을 잘 알지. 그래서 그자가 더더욱 자신의 실력을 농락하듯 상처를 입힌 이의 이름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사실도.”

“…….”

“그리고 그런 건 눈에 보일 때보다 보이지 않을 때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네. 기억이 때로 실제보다 아픈 법이니까.”

키시아르가 자조하는지, 농담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와중에도 기억이 때로 실제보다 아프다는 그 말만은 어쩐지 유더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왔다. 유더가 그 말을 곱씹어 보는 사이 키시아르는 설명을 계속했다.

유더의 이름과 그의 활약을 듣자마자 반응을 숨기지 못한 아톤 덕에 키시아르는 그를 비교적 수월하게 손안에 쥐고 요리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더 본인이 왔었더라면 그에게 아톤의 모든 신경이 쏠렸을 테니, 떼어놓고 따로 움직인 게 정답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어디서 다음 균열이 나타날지, 조건이 무엇일지를 조사해야 할 것 같네. 그자가 쉽게 말해 주진 않겠지만,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 봐야지.”

“저도 찾겠습니다.”

유더는 굳게 대답했다.

“만약 마법사들이 마력의 흐름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지역 곳곳을 상시 감시하는 체계를 갖춰 둔다면 어느 정도 대응할 방도가 생길 겁니다.”

“그래. 그 외의 방법도 더 있을 테고. 지금부터 주변의 협력을 구하며 계속 마련해 나가야겠지.”

물론 그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일의 크기가 크기이니만큼 귀족과 기사, 평범한 제국민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 하나 이번 일의 대응에서 빠져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의 힘을 빌리더라도 이전 생의 기억이 있는 유더만큼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건 즉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힘을 최대한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단 한 순간도 낭비할 수 없다. 힘을 더 키우고 더 많이 쓰기 위한 방법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여럿 떠올랐다.

유더는 마음속의 결의를 다지며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았다. 마법사들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그에게 꿈의 내용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에 마병단에서 날아온 서신을 찬 전서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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