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76화 (776/805)

776화

나단 주커만이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키시아르는 자리에 멈추어 선 채 스스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진 지식으로 추측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감정으로는 추측할 수 있었지. 그 일부도 만약 나라면.’

유더의 이번 악몽은 이전의 꿈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전 게임’의 상황을 꿈에서 다시 본 것도 아니었고, 키시아르에게 공유되지도 않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게임의 키시아르 라 오르가, 정확히는 그의 손이 등장했다는 점이었다.

이전에도 그런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분명 아니었다. 유더의 반응만으로도 이번이 처음이란 걸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더 본인도 그리 느끼는 것 같았지만 키시아르 또한 그 꿈이 보통 꿈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손만 나왔다는 부분도 그러했고, 그것이 꿈에서 했다는 행동 또한 하나하나 심상치 않은 게 없었다.

유더는 그 손이 자신을 어루만졌다고 했다.

드러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담담히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그 말을 하던 때의 눈빛은 결코 평소와 같지 못했다.

오래되어 묵은 흉터를 다시 건드린 사람처럼 춥고 차가우며 공허한 그 눈빛.

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는 미약한 혼란과 죄책감, 그리고 본인은 아마 절대 인정하지 않을 아주 작은 불씨도 끼어 있었다.

그건 키시아르에게도 아주 익숙한 불씨였다. 그것이 자라나 훅 커졌을 때 유더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그간 누구보다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전날 밤, 그는 키시아르의 손길 아래에서도 수없이 그 불꽃을 키워 올렸다. 새카만 눈동자 속에서 피어오르는 순수한 정염의 불꽃은 키시아르마저 홀려 그대로 함께 재가 될 것만 같은 아득함을 선사하고는 했다.

그것을 알아보았기에 키시아르는 그가 꿈속에서 접촉당했을 때 무엇을 떠올렸을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유더는 직접적으로 이전 생의 그와의 관계를 자세히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건조하게 설명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그게 육체적인 면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흘리고 만 약간의 단서, 그리고 꿈속의 손이 유더를 어루만진 부위의 순서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것들을 짐작해 냈다. 이미 유더의 말과 태도, 그리고 꿈에서 보았던 이전 생의 찰나를 통해 이전부터 상당 부분 예측해 왔던 일이지만 그것이 이토록 생생히 다가오기는 처음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때는 유더에게 있어 이미 지나간 과거였을 뿐이지만 이번은 아니기 때문이다.

‘뺨, 입술, 그리고 턱. 이어서 마지막은… 목.’

키시아르는 손을 들어 천천히 허공에 무언가를 매만지듯 움직여 보았다.

유더가 꿈에서 손이 어루만졌다고 말할 때 설명했던 접촉 경로였다.

“…….”

키시아르는 유더의 목 정도의 높이에서 멈춘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겨우 되찾았다 여겼던 힘과 미래, 소중한 가족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또다시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어떤 운 없는 남자를 상상했다.

그가 매일 장갑을 끼었다는 건 지금의 유더와 비슷한, 혹은 똑같은 일을 그때의 그 남자가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각성자의 힘밖에 지니지 않은 데다 스스로도 전무후무한 실력자라 자신했던 유더는 붉은 돌의 원액과 같은 힘을 가까이에서 정통으로 맞고도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기회 삼아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자신이라면 어떨까.

키시아르는 붉은 돌 회수 임무를 나갔던 당시의 제 몸 상태를 토대로 그런 일을 당하였을 때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어렵지 않게 상상했다.

‘각성자의 힘이 날뛰어 몸의 균형이 완전히 깨지는 것. 겨우 붙일 수 있게 된 그릇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 때가 최악이겠지.’

그런 일이 닥쳤다면 그다음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우선 자신이 했을 행동에 집중하여 추측했다.

‘나라면.’

자신이라면 우선 살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겨우 손에 쥐었던 희망이 사라졌다는 걸 믿고 싶지도, 포기할 수도 없었을 테니 그것을 위해 모든 시간과 여유를 바쳤으리라. 야심 차게 시작한 마병단도, 오랫동안 뒤집어 줄 날을 기다려 왔던 적들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결코 돌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끝에 결국 아무런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 새로운 기회는 제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아마도.

‘죽음 이후를 준비했겠지.’

바라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죽는 건 원통한 일이나 사실 그건 오히려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어도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왔던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한 이후로 아주 많은 시간을 침대에 누운 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누워서 읽었던 책 속에서 수많은 역사 속 권력자들이, 그리고 권력을 꿈꾸었던 이상주의자들이 인생에 불어닥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풍랑에 의해 고꾸라져 좌초되는 모습을 보았다.

성공했더라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평을 받을 만큼 대단했던 이가 목적 달성의 입구에 가 보지도 못하고 허망히 죽기도 하고, 고생 끝에 모든 걸 일구어냈다 생각했던 야심가가 해낸 결과물들이 그가 죽자마자 주변인들에 의해 곧바로 먼지처럼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이상이라고 거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케일루사 황제 또한 그토록 아껴 나라의 미래를 맡기고 싶다 여겼던 후계자 후보를 잃고 그릇을 다쳤을 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키시아르. 짐은 스스로가 몹시 경거망동하지 않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비로소 짐이, 아니. 내가 얼마나 근거 없이 나에게만은 운명이 끝내 미소를 보내리라 믿었었는지를 깨닫게 되는구나.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하늘을 원망하는 것뿐이라니,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볼 자격조차 없다.’

그 말과 같은 생각을 키시아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했다. 당시의 그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해도 죽을 때까지는 진짜 끝난 것이 아니니, 그때까지는 즐기며 열심히 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두 번째 기회마저 박탈당한 이후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키시아르는 자신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지금 차례차례 해 나가는 모든 일들이 가져다준 성공과 기쁨, 보람과 희열을 아는 만큼 그것이 좌초되었을 때의 감정 또한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예 맛본 적조차 없었다면 모를까, 한번 맛본 희망을 다시 스스로 토해 내야 했다면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기나 했을까.

그러나 키시아르 라 오르의 죽음은 단순히 혼자만의 끝이 아니다. 키시아르에게는 그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를 위태로운 낭떠러지 끝에 선 황제가,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건 황후가, 그리고 충직한 부관을 포함해 펠레타의 이름 아래 뭉친 가신과 기사들이 있었다.

그가 무사히 죽기 위해서는 뒤에 남겨질 이들을 위한 배려가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게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이라면 그랬을 것이라는 뜻이다.

끝이 예견된 상황에서 새로운 것에 시선을 줄 여유가 생길 리가 없을 텐데도, 이전 게임에서는 그런 일이 아마도 일어난 모양이다.

키시아르는 유더의 꿈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던 초라하고 병색 완연한 사내의 눈을 기억했다. 진짜 제 나이대로 보였던 서툴고 어린 유더가 쥐어 본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응시하던 그 남자의 눈빛은 아주 조금 즐거워 보였다. 그는 굳이 참석할 필요가 없는 후임의 임명식에 참석했고, 어둠 속에 숨어 그가 자신이 만들어 준 옷을 입고 제 뒤를 잇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후임의 손등에 장난스레 입술을 묻던 그 남자의 얼간이 같은 가짜 웃음을 키시아르는 아무런 열기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기에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잘 알았다.

심지어 손밖에 남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서도 결국 한 것이라고는 유더를 매만진 것뿐이라니.

유더는 이야기하면서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키시아르는 알았다. 꿈속의 손이 그를 쓰다듬은 부위와 순서, 방식은 목을 제외하면 평소 제가 유더를 향한 애틋한 마음에 휩싸여 있을 때 어루만지던 방식과 거의 똑같이 닮아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대라면, 단순히 잠시 알았던 지나간 악연에 불과한 사이였다면 결코 그렇게는 만지지 않을 것이다.

키시아르 라 오르 자신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키시아르의 머릿속을 폭우처럼 거세게 때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어떤 확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유더에게 말할 수 있을까.

키시아르는 손을 내리고 눈을 떴다. 한순간 감돌았던 고통스러운 눈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손을 움켜쥔 채 아무렇지 않게 그곳을 떠나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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