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4화
유더는 오랜만에 만나는 알릭의 얼굴을 보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약간 해쓱해진 얼굴로 싱글대며 남부 지부에 차려 둔 자신의 조그만 임시 연구실을 소개해 주었다.
“설마 방을 두 개나 내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하나는 헬렘 님, 하나는 제가 쓰기로 했죠. 햐, 저만의 연구실이라니. 임시라고는 해도 꿈만 같아요!”
“이전엔 연구실을 따로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까?”
“그렇죠. 아, 돈이 없거나 저희 스승님이 구두쇠라서 그런 건 아니에요. 마법사들의 전통 때문이죠!”
알릭의 말에 의하면 그처럼 스승을 모시는 마법사들은 스승에게서 인정받거나 독립하기 전까지는 개인 연구실을 가질 기회가 거의 없다는 듯했다. 스승이 뿌리라면 제자는 거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와도 같기에 그렇다는데, 유더는 그 길고 긴 설명 중에서 딱 한 가지 단어만을 주의 깊게 들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직속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특별하게 여겨져요. 단순히 같은 연합이나 단체에 소속된 사이와는 달라요. 마법사들 식으로는… 음. 영혼의 아버지라고 표현할 정도로요.”
영혼의 아버지. 초대 타인 공작의 일지에서 대마법사 루마를 지칭한 표현이었다. 옛날에만 사용한 줄 알았는데 지금도 저렇게 말할 정도로는 쓰이는 듯해 제법 놀라웠다.
유더는 때마침 그 단어가 나온 김에 알릭이 혹 해당 사항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흥미롭군요. 그렇다면 대마법사 루마에게도 영혼의 아버지라 불릴 제자들이 있었을까요.”
“대마법사 루마요? 흠. 재미있는 질문을 하시네요. 사실 영혼의 아버지란 표현 자체가 그분에게서 나왔단 설이 정설이긴 해요.”
“그렇습니까?”
“고대부터 제국 초창기에 대마법사라 불린 마법사들은 가까운 소수의 제자를 거두기보단 보다 많은 사람들을 고루 가르치고자 했어요. 다만 그건 자신이 지닌 마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지닌 힘이 뭔지 몰라 고통받고 배척받던 마법사들을 구하려는 의미가 컸죠.”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초대 타인 공작의 비밀 일지가 묻혀 있던 묘지를 다녀왔기 때문일까. 그때와 지금은 다가오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건 말하자면 오래된 기록들이 표현한 옛이야기가 현재와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의 기분과 가까웠다.
알릭의 이야기는 천년도 전에 있었던 초창기 마법사들을 말하고 있지만, 주어를 바꾸면 사실 지금의 마병단이 하고 있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마법사 루마는 좀 달랐어요. 그분은 초대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모두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죠. 초대 황후 폐하께서 마법사셨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유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릭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때문에 마법사셨던 초대 황후께선 자신의 피를 이은 네 아이들을 대마법사 루마에게 보내 직접 마법을 배우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말하자면… 현재까지도 황자 황녀 분들을 가르치는 궁정마법사의 시초인 셈이죠. 바로 그 관계에서부터 스승을 영혼의 아버지라 부르는 말이 널리 퍼졌다더군요.”
“그렇군요.”
“그렇지만 그렇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네 분 중 마법계에 직접 투신한 분은 한 분도 없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나마 초대 타인 공작께서 당대에 연구 쪽으로 제법 유명하셨다지만 남은 사료가 거의 없거든요. 결국 대마법사 루마의 직계 제자는 맥을 잇지 못한 셈이죠.”
역시 알릭을 비롯한 현재의 마법사들은 초대 타인 공작이 어떤 연구를 했고 무엇을 목표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루마가 시간을 되돌리는 연구를 하려 했단 것도 몰랐으니 그거라고 알 리가 없지.’
유더는 알릭에게 자세히 알려 주어 고맙다고 말한 뒤, 화제를 바꾸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단장님께 이미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알릭은 앞으로 여기에서 능력 제어구의 지속적인 생산 및 연구를 맡게 될 겁니다. 수도에서 이미 생산한 분량도 함께 가져오셨다고 들었는데, 그건 이미 전달했습니까?”
“아뇨. 전달하려고 했는데 누구에게 드려야 할지 말씀을 못 들어서 아직 제가 가지고 있었죠.”
“그럼 제게 주십시오.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그래요? 꽤 많아서 무거울 텐데… 하지만 유더라면 바람 능력도 쓸 수 있으니 괜찮겠네요.”
염려하는 듯하던 알릭이 이내 마음을 바꾸어 씩 웃었다.
“사실 그걸 제가 헬렘 님의 몬스터와 같이 들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요. 둘 다 연구와 관련된 것들이라 남한테 맡길 순 없고, 나이 드신 헬렘 님께서 그걸 들고 가게 하실 순 없으니 당연히 제가 들어야 하는데 얼마나…….”
“…잠깐, 알릭. 몬스터라니, 무슨 몬스터 말입니까?”
유더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고 묻자 알릭이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끔벅이다 대답했다.
“그, 긴꼬리 검보라 펜펜인가 하는 그 녀석요. 직접 잡아 오셨으니 아시잖아요?”
“그걸 여기까지 같이 가져왔습니까?”
“이미 아는 줄 알았는데 몰랐나요? 한창 연구 중인 녀석이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하셔서 그냥 같이 데려오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제 제어구 시제품들도 그 녀석 우리랑 같이 뒀으니 직접 보시죠.”
“그건 또 왜 거기에… 아뇨. 답은 안 해 주어도 됩니다.”
유더는 사람 좋은 노인처럼 보이던 헬렘을 떠올렸다. 전직 궁정마법사청장이라더니, 그녀 역시 연구라면 만사를 제쳐 두는 마법사다운 면모가 있었던 듯했다.
“헬렘 님! 계시죠? 들어갑니다!”
알릭이 자신의 연구실과 연결된 문을 두드리고는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그냥 열고 들어섰다.
“…그렇게 들어가도 됩니까?”
“지금 시간이면 연구 일지를 작성하고 계실 거예요. 아무리 두드려도 못 들으실 테니까 그냥 들어가는 게 좋아요.”
알릭의 평온한 대답에서 타이스 율만의 오랜 제자 생활을 통해 습득한 깊은 경험치가 느껴졌다.
그의 말마따나 헬렘은 책상 위에 여러 서적을 펴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느라 손님이 온 줄도 모르는 상태였다.
“헬렘 님. 저 왔습니다. 유더도 같이 왔어요.”
“음? 아. 오랜만에 보는구나.”
유더를 발견한 헬렘이 코끝에 걸친 안경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날 보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니?”
“알릭의 제어구를 같이 옮겨 주러 왔습니다.”
“아하. 그 정신 사나운 장난감들.”
“장난감이 아니라니까요, 헬렘 님. 제가 연구한 걸작들이라구요.”
알릭이 소심하게 항의했지만 헬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거라면 저쪽에 있으니 가져가거라. 그런데 못 본 사이 꼬챙이처럼 마른 것 같은데 식사는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마병단에 온 이래 거의 본 적이 없긴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유더에게 놀랄 만큼 친절했다. 다만 볼 때마다 자꾸 말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잘 하고 있습니다.”
“주군이나 나단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옆에 있는 알릭만큼은 살이 붙어야 할 텐데, 볼 때마다 더 마르는 것 같아 걱정이구나.”
유더의 몸무게는 사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 정도의 덩치에 익숙해진 마법사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듯했다. 유더는 약간 해쓱해지긴 했어도 아직 볼이 통통한 인상의 알릭을 흘긋 바라본 뒤 잠자코 침묵했다.
헬렘은 주군이 설마 보좌의 식사를 거르게 하진 않겠지만, 아무리 바빠도 밥을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걱정을 끝으로 다행히 해당 화제를 더 잇지 않았다.
“남부는 북부나 수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따뜻해서 좋아. 계속 여기 있을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지. 그런데 아까 보니 바깥에서 웬 덜떨어진 녀석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뭔가 조사하는 것 같던데, 사파이어 마법사 연합이란 곳이더구나.”
헬렘은 사파이어 연합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듯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부탁한 일에 대해 설명했다.
“네. 이번에 나타난 몬스터 때문에 주변 마력의 흐름 변화가 있는지 알고 싶어 조사를 맡겼습니다.”
“하는 걸 보니 제대로 될지 모르겠던데… 지켜보다 영 시원찮으면 내가 손을 대겠다고 주군께 전해 줄 수 있겠니?”
헬렘이 그 일을 도와준다면 유더로서는 환영이었다. 헬렘은 오자마자 이미 몬스터 사체를 살펴보고 왔다며, 그 몬스터에 대한 조사가 끝나는 대로 보고하겠다는 좋은 소식도 알려 주었다. 그녀를 여기까지 부른 건 정말 잘한 일이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러면 이제… 제어구를 옮기면 끝이군.’
유더는 검은 천으로 덮어씌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안에서 바스락대는 작은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정말 펜펜이 안에 있는 듯했다. 알릭은 그 우리에 손도 대기 싫다는 듯 진저리를 치고는 눈짓을 했다.
“그 옆에, 검은색 가방요. 네. 그거예요.”
그 가방은 과연 남자 혼자 들기에도 버거워 보일 만큼 컸지만 유더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더는 그것을 바람의 힘을 실어 손도 대지 않고 알릭의 연구실 문 쪽으로 훅 날려 보낸 뒤 헬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