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낮은 돌무더기의 사나이: 5화
이런 상태에서, 강점자들을 몰아내지 않고서 어찌 타인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겠는가? 또, 강점자들을 몰아낸 뒤라고 하더라도 지난번 대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할 시간을 가져야 하기에 역시 유대인들에 바로 맞설 수는 없다.
설혹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한들, 유대인들을 공격할 명분은 없다. 카테스 제국은 열강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를 두둔하고 의용병을 파병해준 나라이며, UN 안보리에 상정된 아틀란티스 제국 분할 안건을 야만적이라 하여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바 있다. 이런 은인들과 손을 잡지 않고 왜 등 뒤에 칼을 찌르려 드는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유대-볼셰비키들의 죄악을 그냥 넋 놓고 보고 있어야만 한다는 거야?”
범혁은- 적어도 칼디르를 만나기 전까지는-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 자신이 개중에서 가장 똑똑했기에 그 천재성이 오히려 독선과 자만의 원동력이 되어 그 시야가 폭넓지 못했다. 이렇게 국제정세를 잘 아는 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처음이고, 그녀의 말에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어 범혁은 처음보다는 조금 더 고분고분한 투로 반문했다.
“우리 제국의 가장 거대한 적은 당연히 루시드 제국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적은, 배후의 적들입니다. 세 번째 적은, 루시드 제국과 손 잡고 우리나라를 분할한 늙은 제국주의자들입니다. 적어도 귀하께서 말씀하시는 유대인들은 화급한 적일 수 없습니다.”
칼디르의 막힘 없는 대답에 범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국가사회주의의 충실한 신봉자로서 유대인을 옹호하는 칼디르의 말을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지만, 아틀란티스 제국이 유대인들로부터 딱히 피해를 입은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히려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사실 나도 알고 있어. 유대인 놈들이 무슨 수작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 의용병을 파병해주었다는 뉴스 기사, UN 안보리 회의장에서 주UN 카테스 제국 대사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고.”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왜 그렇게 유대인들을 적대하십니까?”
“사람이 오물을 혐오하는데 별다른 이유가 있어야만 하나? 그리고 유대인들이 의용병을 보내주거나 UN 안보리 회의장에서 우리 편을 들어준 건 다 속임수야! 유대인 놈들이 웃는 척하면서 등 뒤에 숨겨놓은 칼을 왜 보지 못하는 거야?”
범혁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졌다. 범혁의 반유대주의가 이성적 사고보다는 본능적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증거였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해 마다치 않는 ‘퓌러’께서 역설하신 반유대주의를 조목조목 반박당하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으리라.
여기서 일이 틀어지면 범혁을 포섭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곤란하다. 내 손으로 ‘직접’ 무엇인가를 살상하지는 않겠노라고 결심한바, 김범혁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얻지 못하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다.
칼디르는 차분하게, 그러나 분명한 투로 유대인과 협력해야만 하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해나갔다. 대의명분에 관해서는 앞서 다 언급했으니, 이번에는 수치적인 측면을 파고들어 가본다. 카테스 제국의 국력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경제력 1위, 군사력 1위! 더 말이 필요한가? 단 한 번의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패전국이 감히 넘볼 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조그마한 탄환 하나에서부터 거대한 데스스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우리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다. 칼디르는 카테스 제국이 가진 힘에 관한 수치를 늘어놓으면서 그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동시에 제시하였고, 머리가 명석하기는 하나 아카식 레코드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던 범혁은 미처 알고 있지 못했던 정보들을 알아가며 충격을 받았다.
범혁도 초능력자이니만큼 낮은 등급의 기밀문서들을 빼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지만, 칼디르는 분명 열강의 가장 중요한 기밀자료를 자신이 하는 말의 근거로써 사용하고 있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딱 봐도 엄청 중요해 보이는 자료 파일을 눈앞에 들이미니 믿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가 없다.
“귀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품으신 그 유감을 당장 풀어헤쳐 버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죄악을 그토록 벌하시고 싶으시다면... 그것이 오늘이 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을 ‘이용’한 뒤에 그들의 죗값을 물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호오... 유대인들을 ‘이용’한다고? 더 말해봐.”
칼디르가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범혁은 어째서인지 ‘유대인들을 이용하자’는 말에 눈이 띈 듯 보였다. 칼디르는, 범혁의 말을 모두 수용하여 제국이 ‘반 유대-볼셰비즘의 장벽’에 참가해야만 한다면 그 시기를 유대인들의 효용이 모두 소진된 뒤로 늦춰도 늦지 않다고 말을 이어나갔고 범혁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
칼디르는 유대인들이 지닌 엄청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감안컨대 그들과 교류하여 실질적으로 얻을 수 이익이 많음을 이야기하였지만, 범혁은 칼디르의 말을 알아듣기를 국가사회주의자들이 다수의 절멸 수용소에서 그러했듯 유대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다음 죽이는 것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퓌러’께서 범하신 유일한 실책이 바로 유대인 및 혼종인류의 완전한 절멸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라 평하며, ‘퓌러’께서 미처 끝내시지 못한 과업을 물려받아 어떻게 하면 그들을 가능한 한 빠르게, 더더욱 효율적으로 그들을 죽일 수 있을지를 골몰해온 범혁이었기에 ‘이용한 뒤에 버리자’처럼 들리는 칼디르의 말은 조금 솔깃하게 들리기는 하였다.
유대인들은 우리나라에 어떤 위해를 가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고 있으며, 그들이 가진 힘은 매우 막강하다. 지금 우리 상태를 돌아보건대 그들에 맞서싸워 이길 가능성은 적으며, 이긴다 하더라도 그 피해는 막심할 것이다.
그 대신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들이 축적해온 부와 기술력, 국제적인 영향력과 외교 관계, 하나의 동맹국이라도 급한 우리나라에게는 더없이 좋은 파트너다.
범혁은 결국, 칼디르의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애초에 국가사회주의자를 표방한 그는 ‘나의 투쟁’을 읽고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띄게 되었을 뿐이지, 정말로 유대인과 척진 일은 없었기 때문에 칼디르의 논리에 간단히 논파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손을 잡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말을 ‘그들을 끝까지 이용한 다음에 죽여버리자’는 소리로 알아들은 걸 보면 칼디르의 말에 완전히 넘어갔는지 아닌지는 모호했지만, 아무튼, 범혁은 칼디르가 하고자 하는 일에 기꺼이 협력하기로 하였다.
“그래. 네 말대로 루시드 인들을 물리치고 나서 유대-볼셰비키들을 정벌해도 늦지는 않지. 놈들이 만들어낸 퇴폐적인 물건들은 어차피 폐기해야만 하는 것들이니, 그냥 버릴 바에는 그것들을 잘 써먹고 버리는 편이 훨씬 낫기도 하고 말이야.”
범혁은 유대인들의 막대한 부를 다 털어먹고 그들을 몽땅 살인공장에 집어넣어 ‘퓌러’의 숙원사업을 완성할 생각에 벅찬 듯 보였다. 놈들이 제 손으로 돈을 갖다 바쳐준다면 일은 더 쉬워질 것이다!
그렇다. 때로는 대의를 위하여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만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유대-볼셰비즘에 맞서는 방벽을 구축하는 데 들어가는 자금을 유대인놈들의 자산을 빼돌려서 댈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칼디르는 범혁의 웃음에 담긴 의미를 간파하였지만, 모른척하고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루시드 인들이 우리의 가장 거대한 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에게 부역한 배후의 적들도 때가 되면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연합국의 늙은 제국주의자들을 정벌하는 데는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는가?
“우리 제국을 위한 애국적인 결정, 감사합니다... 진실로, 카테스 제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열강의 통치에 견주어 보았을 때 그들의 통치는 지극히 온건한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 거주민들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일지는 몰라도, 세실 로즈가 좀 악랄한 제국주의자에 속한다면 레오폴드 2세는 사탄의 현신이듯이, 제국주의자라고 해도 다 같은 취급을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카테스 제국은 식민지 거주민들이 작업 할당량을 채우지 않았다고 손목을 자르거나, 종족 단위의 제노사이드를 행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일부 식민지에 자치권마저 부여하였다. 그러한 시도는 다른 열강에서는 그때까지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유대인들의 식민지 통치방식은 분명 ‘상대적으로’ 온건한 축에 속했다.
제국주의라는 악마와 반드시 손을 잡아야만 한다면, ‘상대적으로’ 온건한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누누히 말해왔듯이 그들의 잘못을 탓하는 것은 대(大) 아틀란티스를 회복한 뒤로 미루어도 늦지 않다.
반면 다른 열강들은? 똑같은 제국주의 열강인 루시드 제국이 아틀란티스 영내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대신 그들과 손을 맞잡고 우리 제국을 분할한 일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자칭’ 민주주의 국가들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제노사이드를 행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피지배 외계종들의 무장투쟁 움직임을 ‘세계평화를 해치는 테러행위’로 폄하하며 경비병 하나가 죽을 때마다 거주민 열 명을 죽이는 식으로 피의 보복을 거리낌 없이 행했고, 엄연한 지적 생명체 몇몇을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종시켜버리기까지 했다.
단지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피지배 외계종들과, 그런 그들에게 독립을 허락해주지 않으며 그들을 끊임없이 착취함으로써 현재의 부를 유지하려는 늙은 제국주의자들. 둘 중 진정으로 ‘세계평화를 해치는 거악’은 누구란 말인가?
“외계인들이야 얼마나 죽던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 아니야?”
범혁은 인류야말로 전 우주를 지배할 자격을 지닌 종족이며, 다른 모든 지적 생명체는 인류보다도 열등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칼디르가 피지배 외계종에 관하여 언급할 적에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행한 제노사이드에 의해 희생된 생명체의 수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제국주의에 반대하다가 정부군의 총칼에 쓰러져간 양심 있는 인간 주민들의 수를 보십시오!”
칼디르는 범혁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치를 제시하였다: 한 행성에 외계인들을 몰아넣고 그곳에 대행성탄을 떨어뜨려 멸종시킨 횟수, 인류에게는 무해한 바이러스를 퍼뜨려 그 개체 수를 ‘조절’한 횟수, 그러한 움직임에 반발하려는 양심적인 인간 기자들과 학자들을 무참히 살해한 횟수- 그 피해자의 숫자는 조 단위에 이르렀다.
“사형수도 아니고, 평화를 부르짖는 민주주의자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모아다가 그 자리에서 핵실험을 벌인다고? 그리고 바이러스를 고의로 퍼뜨려 치료해주지는 않고 실험 자료를 수집한다고? 세상에 그런 악마들이 있어?”
“늙은 제국주의자들은 스스로 자행해온 제노사이드에 관한 정보를 1급 기밀로 지정하고,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해 마다치 않는 헌법에 규정되어있다는 언론의 자유도 그 앞에서는 묵살되고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가는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평소 인류 제일주의자임을 자부해온 범혁 역시도 구체적인 수치를 듣고 나자 치를 떨며 울분을 토해냈다. 아무리 외계인들이 인류보다 열등하다고 해도, 무고한 민간인들을 이토록 많이 살상할 수야 있는가? 그래서야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입이 닳도록 비난해대는 ‘우리들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범혁은 호주머니에서 홀로그램 사전을 꺼내어 새삼스럽게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았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드러난 ‘자칭’ 민주주의자들의 추악한 민낯은, 사전상의 정의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희생된 인명의 규모로 보건대, 차라리 유대-볼셰비키들이 그들보다 자비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루시드 제국뿐만이 아니라 이 망할 제국주의자들을 모조리 제거해야만 참된 세계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해체’를 위한 전쟁은 결국, 억압받는 세계 민중을 해방하고, 더 나아가서는 악랄한 유대-볼셰비키들의 속삭임에 속아넘어가는 일을 막는 위대한 전쟁이 되리라!
“늙은 제국주의자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제국주의를 해체하지 않는 한, 세계평화는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다가올 전쟁은 우리 제국만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전 우주의 모두를 위한, ‘평화를 위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전쟁’! 언뜻 모순적으로 들리는 그 구호는 자세히 따지고 보면 전혀 모순된 구호가 아니었다. 악랄한 제국주의자들이 세계평화를 거들먹거리며 피지배 외계종들의 독립투쟁을 더더욱 거대한 폭력으로 짓눌러 버리고, 더더욱 거대한 피의 고리를 만들어가는 현 체제를 무너뜨리는 전쟁은 우주역사에 기록될, 참된 세계평화를 얻기 위한, 위대한 성전이 될 수밖에 없다!
늙은 제국주의자들이 끝끝내 자신들의 제국과 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렇게 하면 된다. 늙은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던 피지배 외계인들은 다가올 전쟁의 ‘결과’, 머지않아 조직될 아틀란티스 제국 ‘신(新) 국방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해줄 것이며, 우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지지를 바탕으로 그들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하지 못한다면, ‘정복’을 해봐야 무엇을 하는가? 여느 인류 제일주의자들이 외계인들을 혐오에 마다치 않기를,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것과 다르게 그들을 ‘해방’ 시켜주고 ‘자유’를 준다면, 저들은 우리의 충실한 노예가 될 것이다!
칼디르는 범혁에게 그 말을 하면서 정말로, 진심으로, 단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제노사이드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실질적인 이익이 없는 길을 굳이 고생해서 걸을 이유는 없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데, 범혁이 별달리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칼디르는 더더욱 자신에 차서 자신의 이론을 설파해 나갔다. 자신의 암 노예가 펼치는 한 편의 연극을, 아틀란티아 공주님은 멀찍이 숨어서 지켜보고 계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