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소꿉친구의 전용 생체 오나홀: 12화
너무 어릴 적의 일이라 흐릿하기만 한 기억을 되짚어본다. 그래... 급하게 휘갈겨 썼지만, 이 필체는 분명히 내 아버지의 필체다. 게다가 이 도장은 아버지만 쓰는 도장이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서기장 직함을 쓰시는 분이라면 한 분밖에는 없지. 내 아버지께서 정말로 내게 편지를 보내신 거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휘하 요원들이 아닌 이런 여린 소녀 편으로 탈출을 권하시는 편지를 보내오신 거지? 정말 다른 사람이랑 같이 오지 않고, 혼자서 온 건가?
“저... 칼디르라고 했던가? 아버지의 편지와 여동생의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괜찮은 건가?”
“하으응... 저, 저는 괜찮아요.”
아틀라인 서기장의 작은아들, 아틀란 1세는 생각지도 못한 시각에 축축한 바지를 입은 채로 자기한테 편지를 전해준 금발의 여인을 독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틀란 자신에게 전해준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자기 여동생은 이미 루시드 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 아버지께 갔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버지도 어쨌거나 잘 살아 계시다는 것까지.
수만 광년에 달하는 거리를 가로지르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겠지. 바지가 젖어버린 정도라면 여기까지 오면서 다행스럽게도 별 탈은 없었던 것 같지만, 얼굴을 붉게 밝힌 채로 몸을 자꾸 부르르 떠는 것이 어딘가 아파 보였다.
칼디르로서는 이미 자위 쇼를 벌이느라 상당한 시간을 허비해버린 이상, 새 바지를 구하겠답시고 시간을 더 쓸 수는 없었기에 그 상태 그대로 오는 것을 고집하여 지금 이 꼴이 나게 된 것이었지만, 아틀란은 설마하니 칼디르의 바지를 푹 적신 게 칼디르 자신이 내뿜은 애액일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후, 아버지도 내 동생도 무사하다니 다행인데. 내게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어딘가 아프면 내 마음도 편치 않을 거야.”
저 봐라. 아틀란은 지금 칼디르가 앞에서 웅얼거린 신음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그저 이 연약해 보이는 금발의 소녀를 걱정해주기 바빴다. 실상은 시아주버니의 앞에서 노브라 노팬티 상태라는 사실에 흥분하여 젖꼭지 발딱 세우기 바쁜 마조 암컷인데 말이다.
아틀란이 눈치를 채지 못하는 동안에도 칼디르는 그가 자기 치부를 알아차려 줬으면 하고 심장을 콩닥콩닥 거렸다. 이미 한 번 오로라에게 속살 애무를 허락한 불륜 보지가 시아주버니의 앞에서 발정 나버린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혹시 여기까지 오는 데 뭘 타고 왔어? 내 동생이 당차기는 해도, 나보다 2살이나 어린 아이야. 아빠 곁에 무사히 도착했다면 지금쯤 엄마와도 만났을 것 같지만, 나도 빠질 수야 없지. 걱정을 끼칠 수는 없으니까 빨리 만나러 가고 싶은데.”
“뭘 타고 오지는 않았어요. 그냥 제 순간이동 능력으로 왔다 갔다 했는데...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 여기서 밍기적 거릴 이유는 없지. 가족 만나러 가는 데 괜히 옷을 차려입을 필요는 없으니까, 이대로 가자.”
지구 시각 기준으로 아직 잠을 청하기는 이르지만, 불을 켜놓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침대에 눕기에는 딱 적당한 시각. 때마침 황족 특유의 화려하고 답답한 예복이 아닌 편한 간소복을 입고 있던 아틀란은 칼디르가 전해준 편지를 읽은 뒤로 조금도 그 소녀를 의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칼디르는 불행스럽게도(?), 시아주버니께 치부를 들키지 않은 채로 무사히 지구에서 몸을 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아틀라인 임시 서기장, 서기장 영부인 헤라, 작은아들 아틀란, 막내딸 아틀란티아 4인 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아틀란티아! 정말로 여기에 있었구나!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먼저 여기에 와있을 수가 있는 거냐!”
“미안, 미안! 아빠 엄마랑 이야기하느라고 오빠를 잊고 있었어!”
공주의 작은 오빠 되시는 아틀란도 반가움이 앞선 탓에 자기 여동생이 아주 야한 란제리 차림이라는 사실은 뒷전이 되었고, 감격스러운 포옹을 하기에 바빴다. 서기장의 큰아들 아틀라인 2세의 경우, 이미 그 아비와는 사이가 크게 틀어진 다음이었기에 이 감동의 가족 상봉장에 초대받지 못했다.
아비와 큰아들의 사이가 지금처럼 나빠진 것이 아틀라인 2세가 루시드 인들에 영합하여 괴뢰 아틀란티스 제국의 제위를 받아들인 뒤의 일이었던가? 그 당시, 서기장은 ‘개새끼 같은 것을 어찌 내 아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며 극언을 마다치 않았다.
“내 소중한 가족들을 구해주어 정말 고맙네! 루시드 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내 자식들을 이토록 쉽게 구해낼 줄은...”
예비 며느리로서 시아버님과 큰 시아주버니의 관계에 간섭할 여지는 없었던 칼디르는 그저 서기장이 건네는 감사인사에 점잔을 뺄 뿐이었다. 어차피 가족을 구원해준 일로 며느리로서든, 저항운동 합류 희망자로서든 점수를 따는 데 성공한 이상 급하게 달려들 필요는 없기도 했다.
훈훈한 가족 상봉의 시간이 지난 뒤, 서기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바지가 푹 젖어버린 칼디르를 가엾게 여겨 새로 바지를 구해다 주었고, 곧 그를 독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상당한 호감도를 산 뒤에 본론에 들어가니, 일은 훨씬 쉬웠다. 칼디르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제가 초능력자라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그 힘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국제 통용 등급을 기준으로 하면 저는 등급표의 마지막 단계인 ‘타브(ת)급’ 능력자에 해당합니다.”
칼디르가 언급한 국제 통용 등급이란, 카테스 제국에서 자기네들의 문자인 히브리 알파벳을 등급의 이름으로 삼아 만들어낸 체계였다. ‘알레프(א)’부터 ‘타브’까지 20여 개 등급으로 구성된 이 체계에 따르자면, 가장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타브급 능력자의 실체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었다.
이 체계를 만들어낸 카테스 제국의 실권자- 그네들의 말로는 ‘카우디요(Caudillo: 지도자)’라고 불리는- 테티스 유니온 워싱턴이 이 등급에 해당하는 초능력자라는 소문은 있는데,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무언가 엄청난 비밀을 숨긴 채로 당장에라도 이 세상을 멸망시켜버릴 힘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네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뭔지는 핵심 동맹국들에게조차도 절대 말해주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딱 음모론이 꼬이기 쉬웠다.
어쨌거나 소문대로 테티스가 타브급 능력자가 맞는다고 치면, 전 우주의 생명체 중에서 단 한 명이라는 극악의 확률... 그런데... 그 등급에 해당하는 능력자가 있다고? 가족들을 구해준 은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뭐라고 대답을 주지 못했다.
“아마 서기장님은 제가 드린 말씀을 들으신 다음,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제가 그 정도로 강력한 초능력자라면, 그리고 조국을 위하고자 한다는 말까지 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루시드 인들을 쓸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요.”
“그 말 대로네. 그렇게 하지 않는 데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 질문에 답변 드리기에 앞서서, 카테스 제국의 카우디요가 타브급 능력자라는 소문을 들어보신 바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소문에는 일말의 거짓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하나만 있어도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는 수준의 초능력자가 우리 우주에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 칼디르가 너무나도 확신에 찬 투로 말을 하니, 서기장은 뭐라고 반박할 기회도 찾지 못했다.
그가 당혹감을 멈추지 못하는 사이, 칼디르는 자기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를 말했다: 자신과 같은 타브급 능력자인 테티스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 루시드 인들을 이 땅에서 일거에 휩쓸어버린다면, 그 후폭풍은 어마어마할 터.
그동안 아틀란티스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온 카우디요라고 해도 칼디르가 호전성을 드러낸다면 그녀를 위험인물로 인식하여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루시드 인들과의 오랜 전쟁 끝에 피폐해진 아틀란티스가 카테스 제국이라는 난적과 총칼을 맞대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이는 배보다 배꼽이 큰일이었다.
“맞는 말인 것 같네. 우리 인민에게는 이제 휴식이 필요한데, 이 상태에서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두 번째, 루시드 인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이 힘을 사용할 경우 무고한 아틀란티스 인들까지 휘말릴 수 있다. 파괴 계열의 능력을 쓰는 대신 정신지배와 같은 조금 더 온건한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해보려고 해도, 수천 조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솎아낼 수 있을지는 칼디르로서도 의문이었다.
“정말로... 어렵겠나? 루시드 인들만 정신지배 능력으로 홀려내어...”
“저 스스로 능력을 세밀하게 다룰 수 있도록 나름대로 훈련을 해봤습니다만, 무고한 희생자가 단 하나라도 생기는 것은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제아무리 원수 같은 루시드 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보복을 명분으로 그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해버리고 만다면 그들과 같은 학살자가 될 뿐이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 그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그들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백기를 들어 올리지 않는다면 모를까, 항복할 기회는 주어야 마땅했다.
“글쎄... 내가 생각하기로는, 자네는 너무나도 자비로운 것 같군. 우리의 적들에게마저도 자비를 베풀겠다니.”
칼디르가 내세운 첫 번째, 두 번째 이유는 고개를 끄덕여가며 들어주던 서기장이 세 번째 이유를 들 적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대전쟁 발발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참사를 두 눈으로 생생히 보아온 그로서는 루시드 인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로서도 우주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라는 오명을 기록에 남길 수는 없었습니다.”
식민지 거주민까지 포함해서 모든 루시드 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고 하면 단신으로 경 단위의 인명을 살상한 최악의 학살자로서 기억될 테니, 정상인이라면 꺼릴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가족과 인민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어쩔 수 없다면 모를까.
“결국, 무력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남겨두고 다른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말하는 건가.”
학살자로서 기억될 각오는 어느 정도 되어있으나, 일부러 손에 피를 묻히는 취미는 없다는 대답에는 서기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과 말로 잘 해결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보기보다는 생각이 깊군. 서기장의 칼디르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