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총독부의 사정: 6화
휴, 그래도 작전 회의를 한답시고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머리끝까지 올라갔던 흥분이 다시 가라앉아서 좋군. 무작정 도망치려고만 했다가 괜히 뒤를 밟혀서 ‘살수대첩’당하기보다는 일단 현재 병력만 가지고 방어선 곳곳에 난 구멍을 어떻게든 메워보자. 그렇게 막다 보면 언젠가는 런 각이 보이겠지.
“그로즈니 놈의 밑에 베테랑 병사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 베테랑들도 인간인 이상 무적은 아닐 테고 베테랑이 죽어서 생긴 빈자리는 미숙한 신입이 채우게 될 터. 우리는 현재의 방어선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동시에 놈들의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양동작전을 펼쳐야 하네. 가능하겠나?”
“아, 예... 해군 전력에서만큼은 아군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으니 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실제 행성 상륙에 투입될 육군 병력의 상태가 말이 아닌지라...”
“그나마 해군 전력 면에서라도 유리하니 다행이로군. 상륙 작전이야, 육군 병력만으로는 부족하다면 해군 육전대라도 동원하면 될 일이 아니던가? 놈들이 ‘스캐퍼플로우’에서 자기네 함대를 집단으로 자침시키지 않았더라면 또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 점은 우려하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각하. 놈들은 ‘스캐퍼플로우 아틀란티스 제국 전투함대 집단 자침 사건’ 이후로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군 전력을 사건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우리 해군 전력도 육군에 비하면 비교적 온전한 상태라 우리에게도 공세의 기회가 생긴 셈이로군, 내 말이 맞는가?”
“각하의 말씀이 지당 하십시다! 역시 각하께서는 적군의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꿰뚫어보시는 명장 중의 명장이십니다!”
“부총독 각하의 군재는 과연 우리 루시드 제국군에서 가히 넘볼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십니다!”
당장에라도 혼자서 뛸 듯했던 클로세가 그렇게 침착함을 되찾고 회의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고급 장교가 지녀야 할 책임감이 발동된 결과물이 아니라 극한의 생존본능의 발로였지만, 총독이 연회에 흠뻑 빠진 상황에서 부총독만이라도 회의장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다른 참석자들의 마음까지 진정시켜 주었다.
사실 클로세의 생존 본능은 회의를 주재하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그에게 경고를 보내주고 있었다. 놈들이 새로 들고 나왔다는 신무기... 현재로서는 그 획득 경로와 보급의 지속 가능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놈들에게 틀림없이 신무기 그 자체보다 더한 뭔가가 있다. 너무 늦기 전에 런 각을 잡지 못하면 그대로 죽게 될 것이다.
클로세가 자신의 최대 적수인 아틀란티스 국방군에 주인공 버프가 붙었다는 것을 알아낼 방도는 없었건만, 그의 생존 본능은 미래 예지 능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위험한 냄새를 잘 포착해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마땅히 작전 회의를 주재해야 할 총독 대신 부총독과 함께 하는 열띤 회의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고, 평소 해군과는 떨떠름한 관계에 있던 육군 측 인사들까지 배석한 자리답게도 현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 만한 방안은 십 수 가지씩 튀어나왔다.
“방어선을 재개편하는 과정에서 역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와 동시에 적의 약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가기 위한 병력을 확보하는 방법은...”
“선제공격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공격과 방어 둘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도 결정을 내려야...”
루시드 군이 정신론 숭배자로 가득 찬 군대라고 할지라도 두뇌파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정말 많은 작전이 나왔다. 클로세가 생각하기에, 개중에서 자기 마음에 확 와 닿는 방안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내가 회의장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틈을 타서 점수를 따보겠답시고 흰소리를 해대는 놈이 대체 몇 명이냐. 아부할 시간에 그럴 듯한 작전이나 내보란 말이다! 죽고 나면 아부로 따놓은 점수고 뭐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각설하고. 여태까지의 논의를 모두 요약하여 결론을 내보자면, 육해군 병력을 전부 합해도 모든 구멍을 틀어막을 수는 없고, 전체 전선에서 밀고 들어가는 전략을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그렇습니다, 각하... 현지 인력을 징집하고자 해도 현지인 대부분이 총독부에 비협조적인 이상, 안정적으로 인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은 본국뿐인데... 본국과는 수백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데다 유대인 놈들이 함대를 동원하여 본국을 은하 단위로 봉쇄해버리는 바람에...”
“그 더러운 유대인 놈들 이야기는 그만하지. 정말이지, 언제 들어도 재수 없는 것들이야. 남이 식민지 좀 넓히겠다는 게 뭐가 그리 꼬와서 그렇게 은하 전체를 틀어막는다는 말인가?”
안드로메다은하는 기본적으로 우리 은하보다 크기가 큰 은하인데, 그 거대한 은하를 물 샐 틈도 없이 틀어막을 만큼의 함선과 자금이 있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이 다스리는 카테스 제국의 힘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유대인 배후 자본설이니 뭐니 하는 음모론이 돌아다니는 거겠지. 놈들이 하는 거로 봐서는 음모론 정도가 아니라 그냥 100% 사실인 것 같다만.
어쨌거나 우리 손아귀에 들어있지 않은 전력과 자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 봐야 속만 안 좋아지니, 클로세는 그쪽에서 관심을 떼고 여태까지 나온 작전안들과 정보들을 제 나름대로 취합하여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나의 행성계를 지키는 데 보낼 수 있는 병력이 수십에서 수백 명에 불과한 것만큼은 내가 어찌 손댈 방법이 없다. 똥 멍청이들이 아틀란티스 현지의 주민들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굴지만 않았어도 현지 협력자들을 추가로 징집해서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는 잡을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새로 구축해나가야 할 방어선도 기존 방어선과 별다를 바는 없겠군. 방어에 유리한 지점까지 선제적으로 물러나는 것 정도라면 가능하겠지만, 주요 행성계와 워프 항로만 확실하게 지킨다는 원칙만큼은 수정할 도리가 없으니.”
“부총독 각하의 말씀대로 그 원칙만큼은 수정하기보다는 고수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구멍을 막아왔으니, 면적인 지배를 시도하여 혼란을 일으키기보다는...”
“그만하면 됐네. 그러면 각 방어 지점의 병력 밀도도 높일 겸, 어느 쪽 부대를 어디로 후퇴시킬지, 어느 부대를 공세 부대로 활용할지를 논의해보도록 하세나. 공세를 취할 때 취하더라도 전면적인 공세보다는 국지적인 공세 작전을 채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네.”
점령지를 면적으로 지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점(주요 행성계)과 선(워프 항로)으로 이루어진 지배 체제. 오늘날 아틀란티스 영내의 루시드 군이 처한 현실을 보고 있으면 드넓은 중국을 혼자 처먹겠다고 달려들었다가 육군을 거기서 다 날려먹고 미국의 죽창질 두 방에 백기를 들어 올렸던 일본군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하물며 중국보다 훨씬 넓은 은하를 훨씬 낮은 병력 밀도로 틀어막아야 하는 루시드 군은 과연 언제까지 쫓겨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해군 전력만큼은 우세하다고 하지만, 그 우세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 있을까...? 미국에 비견할 만한 카테스 제국이 아틀란티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상황에서...?
미안하지만, 너희 물개들이 나를 위해서 희생을 좀 해줘야겠다. 너희 물개 놈들은 ‘우리’ 육군보다는 피해가 적다고 네놈들 입으로 말하지 않았냐? 그러니 고기 방패 역할을 좀 맡아줘야겠어. 클로세는 속으로 주둔군의 해군 부사령관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의 진정한 정체는 루시드 육군 수뇌부에서 해군에 꽂아 넣은 스파이였기 때문이었다.
본래 루시드 제국 안에는 육군과 해군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는 말이 떠돌 정도로 두 조직의 사이가 좋지 않은바, 정보 공유도 일절 이루어지지 않아 각 군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알아내거나 상대방의 작전에 훼방을 놓기 위해 스파이를 집어넣는 일이 꽤 흔했다.
클로세는 ‘물개’놈들이 육군을 ‘땅개’라고 깎아내리는 말에도 내색하지 않을 만큼의 인내심은 가진 인물로 평가되어 육군 수뇌부로부터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로 낙점을 받은 바 있었다.
지금 본국에서 총리를 해먹고 있는 사람이 육군 출신이었으니, 원래대로라면 클로세와 본국 정부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아야 하겠지만... 아틀란티스 원정군의 처참한 실패를 보고 정부는 물론이요, 그를 해군에 스파이로 꽂아 넣은 육군 수뇌부의 사람들조차 그를 손절해버리는 바람에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어차피 물개 출신인 발틱이 총독 겸 총사령관인 이상 본국 정부와의 사이가 극적으로 개선될 일은 없었을 테고, 설령 ‘땅개 vs 물개’라는 감정의 골을 초월하여 아틀란티스 총독부와 본국 정부의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도움을 받아낼 구석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아틀란티스에 꼴아박은 뒤로 본국 경제가 얼마나 후퇴했더라? 아틀란티스 때문에 다른 식민지 경영까지도 죄다 말아먹어서... 어림잡아 한 90%는 꺼졌을 거야, 그렇지? 이야, 30년도 안 돼서 경제력의 9할을 날려먹다니, (내 나라지만) 루시드 제국은 정말 뎨댠햬!
그런 상황에서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여 본국에 바쳐야 할 총독부가 역으로 본국에 돈 좀 달라고 질질 짜대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안 봐도 뻔한 문제였기에, 클로세는 그쪽의 도움을 받는 것을 포기해버린 지 오래였다.
‘아무리 그래도 분명 선전포고도 때리지 않고 아틀란티스와 전쟁을 시작한 건 정부인데, 손절 당하고 놈들이 싸지른 똥을 치워야 하는 건 왜 내가 되는 건지... 제기랄... 물개 놈들을 고기 방패 삼아서라도 여기서 어떻게든 발을 빼는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클로세는 자기를 손절한 수뇌부와 정부를 미워하여 발틱을 위시한 ‘더러운’ 물개 놈들과 손을 잡고 다 같이 타이타닉처럼 가라앉기보다는 혼자서 살아나갈 길을 찾고자 했다. 아무리 본국으로부터 손절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저 물개 놈들과 하하 호호하며 지내기에는 서로 웬수처럼 지내온 기간이 너무 길었기에.
방어선을 개편하여 좀 더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을 확보하고, 공세 부대를 꾸려 그로즈니 놈의 시선을 잡아두면서 물개 놈들을 고기 방패로 던져 넣으면 내 목숨 하나 구해낼 정도의 시간적 여유는 생기리라.
급할수록 천천히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작전을 짜보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나갈 수 있다고 믿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자. 아무리 우리 군의 전력이 엉망진창이라고 할지라도 내 몸 하나 빼낼 시간조차 벌어주지 못할 정도로 막장일까? 어떻게든 런 각을 잡으려는 클로세가 주재하는 회의는 그 뒤로도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