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파시스트 돌격대(SA): 6화(END)
범혁은 그날 하루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초절정 미녀(칼디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칼디르의 유혹 페로몬이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는 효과가 없다고는 해도 그 색기 있는 몸을 앞에 두고 참 대단한 인내력이다 싶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부분은 실상 그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인 ‘히틀러 총통’이 여인과 거리를 멀리 두었기 때문(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것도 죽기 직전의 일이었으니...)이요, 더 정확하게는 그 자신이 흠모하는 정치가의 모습을 본받기 위한 점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정상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지구에 있는 황궁을 기준으로 하면 해가 저물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네 도움을 받지 않고도 우리끼리 잘할 수 있나 실험해볼 겸, 너는 이제 퇴근해보는 게 어때?”
“예...? 이제 겨우 돌격대 창설 이틀째인데, 벌써 저와 떨어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너야말로 나와 함께 하다가 벌써 파시스트라는 의심을 받게 되면 곤란한 거 아니었어? 연락을 취하는 문제라면, 네가 만드는 선전물을 통해서 지령을 내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왠지 머뭇거리면서도 좀 더 뒤를 따라 다니며 도와주겠다고 하는 칼디르를 돌려보내는 그의 목소리에서도 일말의 사욕도 감지할 수 없었다. 하긴 김범혁이라는 인간 자체가 으레 나치즘에 깊이 빠져들기 전부터 여자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내비치지 않던 인간이기는 하였으나, 도저히 성욕이 한창 끓어 넘칠 10대 남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칼디르를 돌려보내고(왠지 도축장에 끌려나가는 암퇘지처럼 어두운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를 좀 더 도와주고 싶어 했던 모양인데 너무 빨리 보냈나? 그런데 우리랑 너무 오래 있으면 정부 사람들한테서 의심을 살 수도 있는데...) 맞이한 돌격대 창설 이틀째, 범혁은 먼젓번에 찾아갔던 루시드 해군 육전대를 이어 육군 부대를 찾아갔다.
해군으로부터 먼저 항복을 받아낸 다음이었기에 육군 부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것은 좀 더 어려워질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심각한 부정부패 탓에 가지고 있는 총이랑 총알이 다 썩어 버렸다고 하지만, 어째 이놈들은 싸워볼 생각도 안 하고 항복부터 할 생각을 하네... 얘네가 진짜 군대가 맞긴 하는가?
아틀란티스 국방군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오합지졸들을 상대로 패배했던 거지? 아, 하긴 우리 국방군에도 명장만 있는 건 아니고 똥별도 있을 테니까... 그로즈니가 멱살 잡고 캐리 하면서 틀어막는 사이 다른 데서 뚫려서 털린 거겠지? 와, 내가 그로즈니였으면 바로 키보드 부수고 게임 던졌을 듯... 흠흠, 잡소리가 좀 길었던 것 같다.
아무튼, 부총독 쿠데타 건에 관해 총독부도 아니고 적군인 돌격대원으로부터 전해 듣게 된 루시드 육군의 귀에는 클로세 부총독이 ‘사실은 우리 육군의 스파이였다.’는 부분은 들리지 않고 ‘꼴 뵈기도 싫은 해군 부사령관직을 겸하고 있던’이라는 부분만 들렸는지 해군 육전대 병력과 마찬가지로 백기를 들어 올리기에 바빴다.
여기에 첫날에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모집한 초능력자 떡대 무리가 범혁의 발언에 설득력 +1,000% 보너스를 주었다. 족히 수천 명은 족히 될 듯한 이 떡대 무리를 부하로 만든 비결? 실력행사를 선호하지 않는 성격만 죽이면 초능력 그런 거 안 쓰고도 근육의 힘만으로 다 때려잡아 꼬붕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휴먼!
“제, 젠장... 발틱이나 클로세나 둘 다 해군 소속인데 애미 뒤진 물개 새끼들을 위해 죽어 나갈 바에야... 항복하고 말지...”
“저... 저는... 비겁자나 비국민이 아닙니다...! 그저 타의로 안드로메다에서 이 머나먼 곳까지 끌려와서는 먹는 것도 없이 쫄쫄 굶다 못해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일 뿐이지...”
“저는 지금 항복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그저... 잠시 포로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일 뿐입니다!”
루시드 육군의 몇몇은 항복하는 와중에도 변명을 일삼았는데, 그들의 모습에서는 아틀란티스 제국을 침공하여 ‘카틴 대학살’이나 ‘우크라이나 대기근’ 같은 만행을 일상화해온 악귀들의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굶다 못해 서로를 죽여서 그 살점을 취해도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그들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어서 루시드 제국에서 건너온 모든 이들을 때려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범혁조차 잠시나마 연민의 감정을 느낄 정도였으나, 이어지는 그들의 변명을 듣고는 그러한 감정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제가 죽인 아틀란티스 인들이 계속해서 제 꿈에 나와서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하, 하지만 만약 제가 그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뒤에서 을러대는 부사관이나 장교들의 권총에 뒤통수를 맞아 지금쯤 이곳에 서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맞, 맞습니다... 저희는 그저 죽이라고 해서 죽였을 뿐... 죽이고 싶어서 죽인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누군가가 그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제, 제가 그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동료들이 대신 그 손에 피를 묻혀야만 했겠죠...”
글쎄다... 네놈들이 죽인 사람의 숫자가 수천 조명은 되는데, 그 정도면 그저 시켜서 한 것일 뿐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지 않겠나? 어째 이 놈들이 조국도 부모도 없다는 빨갱이들보다 더 뻔뻔한 것 같군.
그 뒤로도 범혁은 계속해서 본국 정부는 물론이요, 총독부의 기억에서조차 잊혀진 루시드 제국군 부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면서 전진했다. 해보니까 칼디르와 함께 다닐 때보다는 속도가 느렸지만, 아예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러고 있으니 빨갱이들을 ‘적절히 처리’하기 위해서 모인 것치고는 어째 루시드 놈들과 더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았지만, 루시드 놈 중에도 빨갱이가 없지는 않았기에 최초의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닌 셈이었다.
황국신민이니 야마토 정신이니 시끄럽게 떠들던 놈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은하에서 건너온 놈들이라고 할지라도 역시 생명체인 이상 다른 어떤 것보다 생존의 욕구를 우선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굶다 보니 부자로부터 부를 빼앗아 나눠준다는 공산주의에 감화될 수밖에 없었겠지.
“우리 국민 파시스트당의 대 공산주의 방역 활동은 같은 아틀란티스 인에 그치지 않는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우주 전염병에 걸린 이라면 그것이 우리와는 철전지원수 사이인 루시드 놈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파시스트당에 마땅히 그를 치료해줄 의무가 부여되는 것이다.”
범혁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니 이제 그도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이라는 칼디르식 작명은 물론이고 루시드 인들을 모조리 죽이는 대신 살려줌으로서 도덕성 면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 겸사겸사 미래의 전력으로 삼는다는 구상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범혁은 이 목표를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달성하기 위해서 칼디르가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자신만의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하기로 했다. 정부에서 직접 고용한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고삐를 잡을 수밖에 없는 칼디르와는 달리 그저 칼디르를 통해 정부에서 맡겨주는 일을 행할 뿐인 그가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막 나가는 선전물을 만든다면 그 효과가 상당할 것이었다.
그는 그 새 지저분하게 자라난 콧수염을 ‘히틀러’ 하면 생각나는 그 콧수염으로 다듬은 다음 대중에 발표할 문구를 즉석해서 제작했다. 그리고 이를 발표하기 위하여 칼디르가 정부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전에 넘겨주고 간 컴퓨터를 켜서 루시드 군의 암호화 통신망을 해킹하기 시작했는데, 무슨 놈의 암호화 통신망이 우리 집 창문 열듯이 순식간에 뚫렸다.
설마 암호화 같은 중요한 분야에 투자할 예산조차 빼돌린 거냐? 칼디르와는 다르게 나는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어서 통신망을 해킹하는 걸 선택했는데... 이렇게 간단히 뚫려주면 나야 나쁠 건 없지. 범혁은 암호화 통신망을 뚫자마자 바로 아틀란티스 곳곳에 깔려 있는 통신망을 통해 국민 파시스트당과 돌격대의 존재를 퍼뜨렸다.
“안녕하십니까, 아틀란티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루시드 제군. 제가 누군지 궁금하십니까? 그건 아실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이 알아두시면 되는 건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의 존재, 오직 그뿐입니다.”
그가 그날 발표한 선전문은 불특정다수를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명문이라기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는 천부적인 대중 선동가로서 지금의 아틀란티스와 같은 난세에서는 이성에 기대기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들어가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어그로를 끄는 데 성공했다.
비단 파시스트당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 조직이 갈망하는 대중의 관심을 그는 아주 간단히 얻어냈다. 이제 국내에 존재하는 다른 파시스트 조직들도 권력을 얻기 위해 우리 밑에 몰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 당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파시스트 조직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루시드 인들에 붙어먹은 파시스트 쓰레기들은 썩 꺼져라!”
“닥쳐라, 빨갱이 새끼들아! 빨갱이들은 네놈들이 온 지옥으로 가버려라!”
“제기랄, 이놈이고 저놈이고 모두 비국민이로구만... 네놈들 모두 체포다!”
범혁이 선전문을 발표하는 사이 이데올로기 상의 차이로 항의 차 몰려든 공산당원들이나 경찰들 같은 경우, 돌격대원들이 두들겨 패서 내쫓아냈다. 애초에 파시스트 행동대 조직의 주로 하는 일이 바로 그러한 실력 행사였으니, 어떻게 보면 이제야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었다.
뭐요? 파시스트가 루시드 인들에 붙어먹었다고요? 뭐, 파시스트 중에서 루시드 인들과 친 루시드파의 반공주의 선전에 넘어간 놈들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주먹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우리 돌격대원들이 국방군의 정예부대처럼 훈련받지는 못했다지만, 당신들을 치료(물리)해줄 정도의 무력은 갖추고 있답니다!
그리고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다가 나오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칼디르가 직접 만든 무기를 들고 있는 우리를 그런 허섭스레기 무기로 상대하시겠다고요? 순직하기 싫으시면 경찰서로 돌아가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순사 나으리들? 아니면 어차피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오겠다, 우리 파시스트당에 입당하셔도 좋고요.
돌격대 창설 2일 차, 돌격대 지부는 이제 300개가 넘는 행성에 존재하게 되었다. 또 며칠이 지난 뒤에는 파시스트당에 충성을 맹세하는 행성의 수가 천 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것은 파시스트 혁명의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