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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1화 (168/225)



〈 168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1화

“뭐지... 간밤에 굉장히 기분 좋은 꿈을 꾸다가 중간에 끊긴 것 같은데... 꿈 내용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뭐, 악몽을 꾸고 난 뒤에 그 내용은 기억이  나는데 찝찝한 기분만큼은 또렷이 남는 것보다야 이게 나은가?”

칼디르가 범혁이 잠을 청하는 침실에 들러 야한 짓거리를 벌일 적에 범혁은 모처럼 좋은 꿈을 꿀  있었지만, 그녀가 그 공간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그 기분 좋은 꿈이 끊어져 버리는 바람에 끝까지 가지 못했다.

그가 존경해 마다치 않는 히틀러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짝부랄이라는 신체의 결함으로 인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히틀러를 따라 여인을 멀리하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의 이성이었고 칼디르로부터 받는 대딸 서비스 덕분에 좋은 기분을 느껴버린 것은 그의 본능이었다.

제아무리 여성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남성이라고 할지라도 매력적인 여성을 바로 옆에 두고 자지가 불끈불끈 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 뭐, 그거야 어쨌거나 그는 나쁘지 않은 꿈을 꾸고 일어나서 그날 하루도 보람차게 보낼 준비를  수 있었다.

“자, 여기... 돌격대의 세력 확장을 위하여 오늘 해주셔야  일과 만나보셔야  분들의 목록입니다.”


“오늘도 고마워, 칼디르. 네 덕분에 앞으로의 일도 훨씬 쉬워질  같네. 언젠가는 네 도움을 구하지 않고 우리의 역량만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야...”


칼디르는 범혁과의 사이에서 그런 일을 겪은 뒤에도 태연한 얼굴로 때때로 그를 직접 만나거나, 매일 여러 가지 종류의 지령을 내리면서 파시스트당의 당세 확장에 주력했다. 이는 인민 정부와 국방군 수뇌부에는 ‘충실한 전투원의 확충’ 정도로 적당히 포장되어 보고되었고, 그녀의 수작이 멈춰서는 일은 없었다.

범혁은 미래를 볼  아는 칼디르의 지령에 따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정치적 기반을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칼디르는 혹시나 그에게 누군가를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려야 할 경우 지령문에 직설적인 문구를 삽입하는 대신 각종 미사여구로 윤문된 글귀를 넘겨주고, 직접 대면하는 경우에도 증거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 자신이 전범 재판대에 서게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이제 범혁에게 단 몇 달의 시간만 준다면, 아틀란티스 영내 파시스트당의 지지율을 두 자릿수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다. 이는 현재 10명 중 8명 이상의 지지를 받는다는 인민당에 비할 바는 못 되는 수치겠지만, 향후 아틀란티스가 국권을 되찾은 뒤에도 정부가 함부로 파시스트당을 내치지 못하게 할 정도의 수치는 된다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서  몇 년의 시간이 추가로 흐른다면 인민당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파시스트당의 지지자로 탈바꿈하게  것이고, 10여 년 뒤쯤에는 파시스트당이 다른 정당들을 대놓고 금지하더라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당세를 굳힐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기가 좀 더 빠르게  수도 있다. 적어도 칼디르의 계산에 따르면 그랬다.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 돌격대...? 허, 이놈들은 또 뭐지? 빌어먹을 빨갱이놈들만 해도 골이 아파져 오는데 또 어디서 또라이들이 튀어나왔나 보군...”

루시드 총독부의 가장 충실한 협력자, 빌뇌브는 회귀자도 아니고 미래 예지 능력자도 아니었지만, 아틀란티스 3대 귀족 가문에 속하는 페르세포네 가문의 가주로서 쌓아온 내공으로 파시스트당의 성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돌격대에 관한 보고가 들어오자마자 그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돌격대에 관한 최초 보고가 빌뇌브의 귓속에 들어가기까지는- 루시드 치하 괴뢰 아틀란티스 제국의 극심한 부정부패로 인해- 돌격대가 정식으로 출범한 날로부터 자그마치 3주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빌뇌브는 뒤늦게나마 스스로 파시스트라 일컫는 이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자 정보력을 뻗쳐 나갔다.


그는 자신이 누리는 권력에 누가 될 만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귀신같이 구분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 지금은 별다른 위험이 되지 않을지라도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는 전자에 해당하게 될 존재들의 경우 감시의 눈을 떼지 않는 습관 덕분에 그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래, 이놈들이 무슨 말로 나한테 세금을 바쳐야 할 개돼지들을 꾀어 내는지 알아나 보실까?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루시드 제국이 파시즘 국가였는데도  사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빌뇌브였으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에 따라 돌격대를 단순히 경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상을 나름대로 해석해보려 했다.


“루시드놈들의 암호화 통신망이 해킹당한 것 자체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으음, 놈들이 남긴 증거는... 하켄크로이츠(卍),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답은 뻔하군. 놈들은 파시즘 중에서도 나치즘을 숭상하는 쪽일 테고, 나치즘을 집대성한 ‘나의 투쟁’이라면 내 서재에도 꽂혀 있을 테지. 마침  됐어.”

루시드 인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통신망을 허술하게 관리하는 바람에 통신망이 돌격대의 무대가 된 사건은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쯧, 고려할 가치도 없는 루시드 놈들... 그는 통신장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탓에 돌격대가 내보내는 통신을 수신할  없는 행성의 숫자가 제법 된다는 것을 위안거리 삼기로 했다.

돌격대가 루시드 군의 암호화 통신망을 도구 삼아 깽판을 치고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피를 써서 남긴 하켄크로이츠 문양과 함께 새겨진 글귀가 빌뇌브에게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이들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분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경배하라, 위대한 총통의 심판을. 따르라, 총통의 지엄한 뜻을.’ 역만자와 함께 새겨진 이 글귀를 보고도 돌격대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모르면 그쪽이 이상할 것이다. 희생자들은 결국, ‘총통’에게 바쳐지는 제물인 셈이요, 제물의 존재로 인해 돌격대가 ‘총통’이라는 존재를 종교 수준으로 따른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위대한 총통의 심판이라... 웃기는 소리 하는군. 제 놈들도 결국에는 조국의 혼란을 틈타 나름대로 이익을 취하려 머리를 굴릴 뿐인 살인귀가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심판’을 입에 올리다니... 이 제국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우리 페르세포네 가문이다.


그리고 그 페르세포네 가문의 중심은 바로 나, 빌뇌브 아틀라스 페르세포네다. 아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앗아갈  없다. 빌뇌브는 피식 웃으면서 나의 투쟁 첫 장을 펼쳤다.

고위 귀족으로서 글줄은 꽤 읽은 그가 천 쪽이 넘어가는 그 두꺼운 책을  번이나 읽어본 뒤에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건지 알아볼 수 없는 잡문 따위를 숭상하는 자들이라, 그 수준을  만하군... 그러나 지난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자존심이 크게 꺾였을 개돼지들에게는 통할 법한 사상이다.

이들이 내세운다는 공약도 한 번 천천히 살펴본다. 유상매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 재분배(친 루시드파와 루시드 인들의 토지만큼은 무상몰수해버리면 생각 외로 적은 돈을 들이고서도 해낼  있는 일이라나?), 의식주 무상 배급, 신분제 폐지와 노예 해방, 조세의 대폭 감면, 최저 임금제도 도입, 노동환경개선, 노동조합의 합법화, 의무교육의 도입, 무상 의료, 군인연금 도입, 징병제 폐지...


하나같이 굶다 못해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어서 가족을 살해하여 그 인육을 취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이들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이 나라 부의 10% 이상을 홀로 차지하고서 수입의 9할 이상을 뜯어가는 나로서는 원래부터 성가시게 굴던 빨갱이들 이상으로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나는 그래도 이 나라 안에서는 적게 뜯어가는 축에 속하지만, 이런 혁신적인 공약들을 내건 놈들을 상대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사실 사람들에게서 수입보다 더 많은 것을 뜯어가는 다른 귀족들이나 루시드 총독부에 비하면 빌뇌브가 내세우는 90%의 세율은 ‘비교적 양심적인’ 축에 속하긴 했다. 딱히 그가 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적어도 개돼지들이  쉴 구멍은 뚫어놔야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가져다 바칠 거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이러한 ‘사악한 배려’가 공산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당이 내세우는 공약으로부터 사람들을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면 빨갱이놈들이나 주장할 법한 공약들을 일반적으로는 극우파로 분류되는 파시스트가 주장한다는 점이었는데, 애초에 이들이 숭상한다는 나치즘(national socialism: 국가사회주의)의 정식 명칭에도 ‘사회주의(socialism)’이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있을 법도 했다. ‘좌파 파시즘’... 뭐 그런 쪽일 것이다.

“말뿐이었더라면 또 모를까, 놈들이 그로즈니놈에게 공급된 것과 동일한 사양의 무기를 들고 다닌다는 보고도 들어왔으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의할 필요는 있겠어.”

그는 두꺼운 종이책을 덮으면서 부족한 정보력을 쪼개어 돌격대의 활동을 감시하고, 만일의 경우에 그들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파시스트당의 내부에 스파이를 침투시키기로 했다.

속단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을 칭하는 이들의 사회주의 색채와 정규군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무기를 공급해주는 ‘배후’의 존재를 어느 정도 파악한 이상, 극우파 계열의 파시스트들이나 정통 보수파들과 맞부딪히게 두는 반간계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현재까지 축적한 정보만 두고서 이 모든 사건의 ‘배후’로 지목할 수 있는 자의 이름은 칼디르 아스트라... 아틀란티아 공주와 함께 야릇한 차림으로 귀족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가 어느 틈엔가 스리슬쩍 궁궐 안에서 모습을 감춘 바로  계집이다.

반 루시드 저항운동 내부에서 반공주의 성향이 유독 강한 제임스놈에게 박아놓은 첩자를 통해 그 요망한 창년의 이름을 우연히 접할  있었다. 아니, 다른데도 아니고 여기서 그년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설마 그로즈니놈에게 신무기를 공급해준다는 ‘천재 공학자’ 칼디르랑 내가 아는 그 칼디르가 동일인물인 거냐?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이 우주는 드넓고, 동명이인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을 터.”


빌뇌브는 어디까지나 상식에 근거한 판단을 내림으로서, 반 루시드 저항운동가들을 상대로 쓸 수 있는 유용한 카드 하나를 접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아니었어도 ‘천재 공학자’와 ‘마조 암퇘지’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는 추측을 내놓는 이는 아마도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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