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총통경호 친위대 칼디르 아스트라(LSSKA): 1화
“다 끝났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수백 개가 넘어가는 행성계를 새로 해방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자기가 데리고 있던 정예병들과 함께 칼디르가 설계, 제작한 무기들을 한가득 들고 ‘불쌍한’ 루시드 군을 신나게 두들겨 패러 나갔던 카이프가 광란의 질주를 끝마친 뒤에 중얼거린 말이었다.
말하는 것만 봐서는 순식간에 나이를 수백 살을 먹어버린 현자 꼴이었지만, 짙은 현자 타임의 흔적이 느껴지는 말투와는 다르게 그는 칼디르 제 무기를 들고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카이프를 따르는 병력이 루시드 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교전비를 거두어들이며 일방적으로 대가리를 깨고 다니는 거야 그전에도 흔하게 있던 일이었지만, 루시드 군이 뭔 짓거리를 해도 절대로 파괴되지 않고, 고장도 나지 않는 칼디르 제 무기와 함께 하니 우선적으로 그전에는 조금씩 발생하던 사상자와 중장비 손망실을 아예 ‘제로’로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병사들과 더불어 쉬지 않고 전장을 누빈 것이 몇 주째다. 그런데 부대원이 줄어들기는커녕, 가는 길에 고립되어있던 아군 부대와 민간인들을 구출하면서 오히려 머릿수를 늘릴 수 있었지. 이건 아주 고무적인 성과야.’
크고 아름다운 장비들이야 칼디르를 통해서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중장비 손실률이 0%로 줄어든 건 넘어가더라도, 아군의 사상자를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말인즉슨 전쟁이 다 끝나고 나서 몸 성히 사회로 돌려보낼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뜻이고, 이는 전후 재건과 경제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었다.
인격 파탄자라는 무성한 소문과는 별개로 카이프는 단순히 칼디르 제 무기를 가지고 어디를 언제 수복했으며, 어느 정도 규모의 루시드 군을 후드려 팼느냐 하는 성과보다는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여 전후 사회 재건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에 더더욱 기뻐했다.
칼디르 제 무기의 성능을 실험해보기 위한 절차로서 처음에는 사단급 병력을, 이제는 3개 집단군이 넘어가는 대병력을 진두지휘하며 그 자신도 땀을 줄줄 흘리면서 마우스 전차를 몰고 다니던 카이프가 광란의 질주를 끝마치고 다시 그로즈니가 기다리는 OKW 안으로 들어간 것은 집단군급 병력의 실험 기동이 개시된 날로부터 4주가 경과한 뒤의 일이긴 했지만...
“뭐,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어떻든 상관없는 것 아니겠는가? 으하하!”
“그, 그렇습니다... 참모...차장... 각하... 아하하하...!”
카이프는 나갈 때 타고 갔던 마우스 전차에 그대로 탑승한 채 OKW에 돌아올 때도 절대로 평범하게 돌아오지는 않았는데, 몇 주씩이나 시간을 들여가며 기어이 작전 범위 안에 있던 루시드 군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자(대장급)의 목을 취하는 데 성공하여 그 목을 창 끝에 꽂아 자기가 몰고 다니는 마우스 전차의 전면에 꽂은 채로 위풍당당이 개선 행진했다.
그꼴을 보고 그로즈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카이프가 문책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를 따르는 휘하 병력도 그에게 질린 것은 마찬가지라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기도 했다. 개중에 몇몇은 제 사령관을 따라 제대로 미쳐 있어서 수중에 들어온 수급을 역시 창끝에 매단 채 행진을 즐기기도 했지만.
카이프는 개선행진을 대강 끝마치고 나서 자기를 따라온 휘하 병력은 칼디르 제 테라포밍 장치에 의해 휴양지처럼 복원된 모 행성에 보내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준 다음에야- 그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무려 4주씩이나 쉬지 않고 자신을 따라와 준 병사들에게 상당 기간의 휴식 기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쯤은 하고 있었다- 그로즈니를 만나러 그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래, 어떤가? 칼디르가 제작한 무기들을 들고 날뛰어본 자네라면 OKW 내의 그 누구보다도 그 무기들의 효용성에 관해 절실히 깨달았겠지?”
“그 말씀대로입니다, 육군원수 각하. 제가 한참 한 개 집단군급 병력을 가지고 기동을 펼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병력이 충원된 덕분에 전투 데이터라면 충분할 정도로 축적하였으며, 그 모든 데이터는 칼디르 제 무기가 기존의 그 어떠한 무기보다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귀족 가문의 고고한 도련님들도 칼디르 제 무기의 효용성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니 당장 칼디르에게 원수 계급장과 함께 국방군의 보급과 편제를 담당하는 지위를 내려달라는 말로 카이프는 자기가 할 말을 끝마쳤다. 그로즈니는 이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고서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정리해왔다는 전투 데이터 파일을 넘겨받고 그것을 천천히 읽어내려가며 생각에 잠겼다.
사단급, 군단급, 야전군급, 집단군급 전술 기동(이 모두가 카이프의 작품이었다.)에서 모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어준 무기를 설계하고 제작까지 하여 돈을 받지 않고 국방군에 납품해준 칼디르. 이제 와서 그녀를 내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존재할 수 있을까?
다만 OKW 내부에는 아직도 칼디르가 평민 출신에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정적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어 그 점이 우려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칼디르에 우호적인 세력도 늘어나겠지만, 그만큼 칼디르를 반대하는 세력의 규모도 점차 늘어나고 모두를 규합할 중심점이 탄생하게 되겠지.
에휴... 그놈의 귀족 신분이 도대체 뭐기에... 우리 제국의 신분제는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왔으니 평민 출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만, 신분 부심도 이쯤 되면 정신병이다. 나이 지긋하게 처먹은 귀족 가문의 노친네들이 증손녀, 고손녀 뻘의 처자를 상대로 정말 그러고 싶은 건가?
“이 전투 데이터를 살펴보면 지난번에 자네가 제출한 자료와 마찬가지로 중장비 손실률이 0%라고 나와 있는데, 그 무기를 다루는 병사들은 기계처럼 바꿔 끼울 수 있는 소모품이 아니지. 전투를 끝마치고 나서 병사들은 어떻게 했나?”
그로즈니가 이 나라 신분제의 폐단을 향해 굴려가려고 하던 생각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울 겸, 카이프에게 한마디를 툭 내던졌고,
“아, 병사들이라면 칼디르...덕분에 복원될 수 있었던 행성에 3개월 정도 머무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해놨습니다. 혹시 사상자에 관해 물어보신 거라면... 해당 데이터에 나온 대로 0명이었으며, 중간중간에 구원한 아군부대의 부상자들도 칼디르에게서 넘겨받은 치료제로 신속하게 치료하여 합류시킬 수 있었습니다.”
카이프가 ‘나 잘했죠?’라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미치광이 사령관과 함께 1달을 고생한 대가로 휴양지에서 3달 휴가... 그것도 지랄 맞은 성격의 합참차장 겸 육군 참모차장이 친히 하사하는 휴가증이라 집단군 사령관도 함부로 짜를 수 없는 초특급 휴가증... 이쯤 되면 딜교가 맞는 거래라고 볼 수 있을까?
뭐... 병사 출신으로서 평소에 병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상관들의 눈을 피해 개기려고 드는지를 잘 파악하여 교묘하게 갈군다는 평을 듣는 카이프가 취한 조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상적이라 그로즈니도 차마 뭐라고 딴지를 걸지는 못했다.
“아군의 사상자가 전무했고, 이번에 고립되어있던 아군부대를 다수 구출했다는 점에서 이번 작전에는 만점을 줄 수 있겠군. 혹시 바라는 것이라도 있나?”
“이 모든 것이 칼디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나저나 계속해서 칼디르...라고 이름으로만 불러주기가 영 껄끄러운데, 정말 칼디르...에게 무슨 직책이라도 빨리 내려주시면 안 됩니까?”
“자네 몫을 포기하겠다는 소리인가.”
“이번에 거두어들인 성과는 칼디르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낼 수는 있었겠지만, 칼디르가 없었더라면 예비대... 아니, 젊은 병사들의 목숨과, 시간과, 물자와, 예산을 훨씬 더 많이 소모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모든 전공을 칼디르...에게 돌려도 부족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칼디르가 만든 무기를 들고 그녀가 알려준 정보를 따라 방심하고 있던 루시드 군 부대를 급습, 섬멸했을 뿐이지요.”
전공을 세워놓고도 그 전공을 독식하려고 드는 대신, 다른 이에게 돌리는 이 모습.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그놈의 수급에 집착해서 창끝에 목을 매달고 전차에 꽂은 채로 행진하는 것만 어떻게 좀 참아주면 더 좋을 텐데 말이지...
“뭐, 좋네. 자네 말을 따라 칼디르에게 걸맞은 직책을 내려주어야겠군. 계급도, 직책도 없이 무거운 책임만 지우는 것도 안 될 일이지. 그동안은 그녀를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고려하여 정식 계급장과 직책을 내려주지 않았지만, 언제고 바로잡아야 할 일이었어.”
카이프도 칼디르를 띄워주는 판이니, 이제는 더는 칼디르를 높은 지위에 올려놓는 문제를 미룰 수 없음을 직감한 그로즈니가 칼디르를 호출하였다. 같은 시각, 칼디르는 공주님과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으나 그녀가 그로즈니의 호출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궁디팡팡을 각오하고 공주님과의 즐거운 시간을 그대로 포기해버렸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는데, 공주님이나 슈가한테 붙들려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다 보니 분신 능력을 쓰지 않는다는 신조를 깨고서 분신을 만들어 그로즈니의 집무실에 대신 보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칼디르는 데이트 장소와 그로즈니의 집무실에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뭐... 클론이나 안드로이드를 보낸 것도 아니고 분신이면 사실상 본체와 똑같으니 큰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로즈니와 카이프가 집무실에 들어온 칼디르(의 분신)를 보고 이상한 점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좋은 소식이 두 가지 있네, 칼디르. 하나는 여기 있는 카이프가 자네가 제공해준 무기를 가지고 좋은 성과를 내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슬슬 자네에게 정식으로 직책을 맡겨주고자 한다는 것이네.”
클리셰를 따라가면 왠지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하나를 들어야 할 것 같지만, 칼디르는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클리셰를 빗겨 나가 좋은 소식만 두 가지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여기서 대놓고 기뻐하면서 넙죽 받아먹으면 지는 거다.
“다만 기존 원수들과 장군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기존 조직에 자네를 임명하기보다는, 자네가 전에 부탁했던 대로 별개의 조직을 신설하여 자네에게 맡기는 방향으로 진행할 것 같네. 대신 자네에게 신설 조직의 편성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해줄 것이네. 괜찮겠나?”
그야, 아주 좋고 말고요! 로버트를 위시한 흑십자회까지 포섭하는 데 성공한 칼디르에게 그 제안은 기존 조직을 떠맡으라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