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부하의 성욕처리는 사령관님의 의무: 1화
“모든 것이 끝났군요... 카이프 참모차장님도 일을 다 끝내고 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지요? 그것참...”
출정식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뒤, 칼디르가 이끌고 나간 병력은 매우 당연한 듯이 승전보와 함께 주둔지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새 칼디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의 숫자는 부쩍 늘어났지만, 개중에 그녀의 치부를 알아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늘어나지 않았으니 그녀로서는 이득만 보는 거래였다.
그녀는 작전 개시 며칠 만에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음을 보고받고는, 주둔지로 가는 함선에 몸을 싣기 전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사령관 취임을 기념하여 카이프로부터 선물 받은 담배 라이터를 꺼내 들고는 궐련 담배에 불을 붙여 매우 자연스럽게 한 모금 마시며 전투의 여운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군인들도 전투가 끝나고 나면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물면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다가 옆에 사람이 오면 말들을 늘어놓고는 했다. 아마도 끽연만큼이나 군인들의 친목질에 더 도움이 되는 물건은 없으리라.
“아, 사령관님이십니까. 이리로 오셔서 저희와 함께 피시죠.”
“사령관님이라니... 저는 사단장님에게는 딸 뻘밖에 안 되는데, 그런 저를 상관으로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그렇게 섭섭하게 말씀하시지 말아 주십시오. 치사량의 방사능에 노출되어 의사들도 모조리 가망이 없다고 한 제 가족들을 한순간에 낫게 해주신 게 사령관님 아니십니까?”
칼디르도 한 손에 쥔 라이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들을 따라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옆면에 철십자 표식이 그려진 회색 빛깔의 담배 라이터. 카이프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가 꼭 칼디르만 할 적에, 그러니까 15살의 나이로 이등병이 되었을 적부터 사용해온 라이터라고 했으니까... 무려 90년이나 된 물건이다.
‘버서커’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진 사람과 9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한, 철십자 표식이 그려진 라이터라니. 당장에 육군 박물관에 가져가서 고이 모셔둘 만큼 가치가 높은 물건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후... LSSKA의 사단장으로 포섭했던 30대의 장교가 아는 체를 해준 덕분에 흡연을 핑계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가족이 죄다 불치병 환자였다는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정말로. 그럼 설마, 내가 일부러 충성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가족 중에 불치병 환자가 있는 사람을 콕 집어서 섭외해왔을까 봐?)
다시 그들과 헤어져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오, 세상에나. 벌써 사령부 건물 앞이나. 일이나 하러 들어가자, 하...
중간에 민간인들을 구조하고 치료해주는 과정에서 칼디르의 유혹 페로몬에 이끌린 여자들이 그녀를 덮치려고 드는 바람에 위험한 상황이 몇 번이나 빚어지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별일도 없었다.
아군 사상자 0명.
구원한 아군 부대 및 민간인이 대충 수십억 명에 포로로 삼은 적군의 숫자는 수백억 명, 그리고 죽거나 중상을 입은 채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적군이 또 수백억 명. 고로 출격 이후에 아군의 숫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음.
루시드 총독부의 지배 영역과 군사정부의 지배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 부근에 고립된 아군 부대 및 민간인은 전원 구출에 성공, 아군 지배 영역 안에 파고들어 온 적군 부대는 섬멸 성공. 결과적으로, 아군은 깨끗한 전선을 얻고 향후에 적 진영을 향해 더더욱 깊숙이 파고들 기반을 얻게 됨.
칼디르는 전장에서 주둔지로 돌아오자마자 그로즈니와 카이프에게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보고서를 만들어 나가다 보니 한 서기 30세기쯤의 미래 군대가 중세 시대로 건너가서 기병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극을 벌였노라는 식의 보고서가 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은 일이다.
온화한 성격의 그로즈니는 조금 기다려줄지 몰라도, 카이프는 그 불같은 성격에 함께 야근하자고 권유하는 악덕 상사로서의 면모 역시 갖추고 있으니 책잡히기 싫으면 이런 일은 빨리빨리 해두는 편이 낫다.
어째 일을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만족스럽게 처리하여 가져다주니까 카이프도 이에 만족하여 나만 계속 갈구는 눈치지만... 내가 언젠가 총통이 되고 나면 역으로 그 사람을 사령관으로 삼아 일을 오지게 시킬 수 있으니까, 그걸 위안 삼자.
“야 이 시발, 네놈들보다 한참 나중에 들어온 칼디르 사령관도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보고서를 만들어 오는데, 네놈들은 도대체 뭐 하자는 거냐? 하도 오냐오냐해주니까 이제는 내가 상관으로 보이지도 않는 거냐? 후배님들, 주둥이가 있으면 말이란 걸 좀 해보지?”
카이프가 자기 집무실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은 건... 기분 탓일 거다. 아마도. 뭔가 꽃병 같은 게 내던져져서는 와장창 깨지고, 두꺼운 종이 서류가 북북 찢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지만... 이것도 기분 탓일 거다.
아, 정말이지 지체 높은 고급장교끼리 모여 있을 때도 욕설을 퍼붓고, 얼차려를 주고, 존나게 갈궈 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랑스러운 우리 국방군... 저런 사람에게 여태까지 좋은 소리만 들은 나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거겠지. 아, 신경 끄자, 신경 꺼.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으려니까 점점 성욕이 쌓였지만, 성욕은 본체를 통해서 마음껏 풀고 있으므로 분신체까지 동원하여 성적 쾌락을 탐할 생각은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애써 자신의 추악한 성욕을 외면해가며 일에 전념한 결과, 담배 세 갑을 모조리 비웠을 때쯤 성격이 지랄 맞은 카이프에게 보여줘도 한 번만 OK 사인을 받을 만한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 만드는 건 순식간에 끝났는데, 검토하느라고 시간을 훨씬 더 많이 잡아먹었다.)
이런, 성욕을 잊기 위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가 골초가 되게 생겼네. 어쨌거나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신경 쓸 건 없다. 다만... 가장 큰 일을 끝마치고 나서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이번에 루프트바페에서 지원 편대장을 맡은 로렐라이 대령과의 면담이 약 1시간 뒤에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테라 마리네에서 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오토 제독의 딸이자, 국방군의 최선임자인 그로즈니의 증고손녀로서 나보다 딱 1살이 어린 흑발의 미인. 평민 출신인 나와는 그 출신 성분부터가 다른 고위귀족 출신.
루프트바페의 유명한 폭격기 에이스로서 대령 계급에 올라 있으며, 폭격기 에이스라고는 하지만 전투기 조종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이번 작전에는 워프 전투기인 슈발베를 몰며 아군 지상군을 엄호하며 적 함선 다수를 굉침시킨 바 있음.
로렐라이 대령에 관한 정보를 축약하자면 이러했다. 대령이면... 칼디르의 양어머니인 아스트라 대령과 똑같은 계급이라는 말이 되는데... 14살에 대령이라... 칼디르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확실히 대단찮은 사람이기는 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왜 ‘일단은’ 상급대장인 칼디르와의 일대일 면담을 요청했을까. 그녀는 미래 예지 능력자이긴 해도, 그 귀한 능력을 굳이 이런 시시콜콜한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쓴 적은 없었고, 쓸 생각도 없었고, 다만 대국을 엿볼 적에만 사용해왔을 뿐이었다.
상급대장 대 대령이라. 계급 차이가 심하게 나기는 해도, 그녀가 칼디르를 총애해주는 그로즈니의 증고손녀인 데다, 이번에 지원 편대장으로서 기꺼이 나서줬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예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녀가 일대일 면담을 요청한 이유도 궁금하여 칼디르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주었다.
시간이 맞으려나? 지금 시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아, 면담이 끝나고 나서 카이프에게 보고하러 가면 되겠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예정된 면담 시각이 되었다. 로렐라이는 예정된 시각에 딱 맞춰 노크 후 칼디르의 집무실에 들어왔는데, 각 잡힌 공군 장교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칼디르 그 자신보다도 1살이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위귀족 출신으로서의 기품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얼굴과 걸음걸이였다.
군인의 신분에 맞춰 단발로 깎은 검은색 바가지 머리는 칼디르가 지난 몇 주 동안 머리카락을 기르기 이전보다도 짧았고, 검은색 눈동자는 또렷하게 빛나는 듯하다가 칼디르의 건너편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슴은... 칼디르와는 다르게 군복에 가려져서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걸 보니 거유는 아니고 잘 쳐줘도 평유 이하인 것처럼 보였다. 칼디르가 관찰을 끝내고 로렐라이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오셨습니까, 로렐라이 대령님. 이번에 지원 편대에 자원해주셨...”
“아, 칼디르... 사령관님... 맞으시죠...? 그... 원래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사령관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잠시 사령관님의 옆으로 가도 될까요? 그러면 하려고 했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칼디르가 로렐라이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로렐라이가 어마어마한 계급의 차이를 무시하고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더니 그녀가 제지하거나 말거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그녀의 곁에 걸어갔다.
어... 어어...?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상황에 칼디르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으나, 로렐라이의 태도가 급변한 이유가 한 가지 짐작되어 당혹감은 불안감이라는 이름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암컷 유혹 특화 페로몬. 여태까지는 직장에서 거의 남자들만 만나고 다녀서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엮일 일이 없었는데... 창문도 하나 없어서 방문을 닫으면 페로몬이 농축되어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는 집무실에 엄연한 여자인 로렐라이를 부른 것이 실책일는지도 모른다.
“아아, 칼디르 사령관님... 여태까지는 소문으로만 들어왔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정말 빨고 싶게 생기셨네요...”
아무리 둘러봐도 근육 하나 없는 것이 육체 전투 쪽으로는 딱히 재능이 없어 보이던 로렐라이가 갑자기 힘이 어디서 솟아 나왔는지, 엄청난 힘으로 칼디르를 바닥에 쓰러뜨려 눕혀 버렸다.
고위귀족 출신으로서의 기품이고 뭐고,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눈빛을 한 그녀에게서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