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34)

검은 머리 딜러들

이 세상에는 잘 맞는 것처럼 보이기에 오히려 붙여 놔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오픈 시티에서 예를 들자면 2서폿 앰프와 아리아 조합이 그랬다. 같은 밴드 소속이라는 설정을 갖고 나온 두 챔프는 붙여 놓으면 최악의 상성을 보여 주었다. 둘 다 생존기라 할 만한 이동기나 CC기가 전무하여 서포터를 물러 온 딜러나 탱커에게 매우 취약했다. 서로를 도우면서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한 2서폿 메타에서 그 둘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서포터를 제물로 바치는 등, 오픈 시티에서 또 다른 생존 게임을 하며 유저들이 기피하는 2서폿 조합의 정석이 되었다.

그렇다고 또 마냥 의외의 조합을 붙여 놓는 것도 영 좋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여기에 가장 적합한 사례는 콜라와 박하사탕을 같이 먹는 행위로 설명할 수 있겠다. 맛있는 것과 맛있는 것의 조합이라 생각하여 붙여 놨다가 오히려 화만 입는 경우. 생각지도 못한 폭발에 준비가 안 된 사람이 뒷수습을 하는 건 덤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 넓어서, 때로는 의외인 것처럼 보이지만 잘 맞을 게 분명하다고 확신한 조합을 붙여 놨다가 터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 같은 경우가 그랬다.

카페 안쪽 구석, 테이블 위에는 세 개의 음료가 있었다. 인준의 앞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 머리의 남자 앞으로 바닐라 라테 한 잔. 인준의 옆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 여자애 앞으로 청포도 에이드 한 잔.

“제가 사과했는데도 이런 분위기는 좀 너무하지 않나요.”

검은 머리의 발렌타인이 웃으며 말했다.

“존댓말 들으니까 더 재수 없는데 그냥 말까지?”

검은 머리의 사영이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럴까, 그럼?”

“너네 싸울 거면 난 빠질게.”

“싸운 거였으면 지금 벌써 피방으로 따라와 시전 했지.”

“그럼요, 이건 그냥 딜러들끼리 대화하는 거죠.”

“말 깐다며.”

“인준이 형한테 말한 건데?”

중재를 포기한 인준은 자신의 앞에 있는 아메리카노가 산화제라도 되는 것처럼 속에 들이부었다. 검은 머리의 서브 딜러들은 각자 팔짱을 끼거나 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딜러라는 경주마를 다루는 일은 자신 있었으나, 영이라는 사람과 발렌타인이라는 사람을 다루는 법은 죽어서도 모를 예정인 인준이 할 수 있는 건,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이기 시작한 건지 돌이켜 보는 것뿐이었다.

새벽녘 편의점에서 발렌타인과 헤어지며 잡았던 다음 날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발렌타인에게 급한 일이 생긴 탓이었다. 가족 사정이라는 두루뭉술한 말에, 한 달 만에 본 잘난 아들자식을 앉혀 놓고 뭐라도 먹이고 싶어 하는 부모까지 제멋대로 상상한 인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을 모레로 옮겼다.

오히려 새벽 늦게까지 파일을 정리하고 여러 계획을 짜면서 부족해진 수면을 채울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약속 시간에 맞춰 힘겹게 일어났던 인준은 두세 시간 정도 더 잔 뒤에 일어나서, 오픈 시티를 켰다. 거의 한 달 만의 접속이었다.

1부와 수준 차이가 꽤 크다고 하나 2부 리그도 리그다. 취업할 때 가장 중요한 스펙이 토익 점수라면 프로게이머가 되기 위해 중요한 스펙은 시즌 점수였다. 해결하고자 하는 일이 게임 리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고, 돕고자 하는 사람이 프로게이머이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이런 상황에 게임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싶은 묘한 위화감은 한 달간 접속하지 않으면서 떨어진 등수를 보는 순간 전부 휘발되었다.

453. 살아오며 학교든 게임이든 어디서든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등수였다.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리그에 미쳐 살던 그때조차도 계정 자체는 예쁘게 100위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입시로 바빴던 고3 때도 아득바득 200위 안으로 유지했던 등수였는데, 453등이란다. 각기 다른 시카고가 사는 좌심실, 우심실, 우심방의 심장에 박혀 있던 O가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매칭 대기 시간에 틈틈이 보기 위해 옆에 준비해 놨던 리그 영상은 한 번도 재생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처음으로 그마 구간을 주픽으로 썰고 오는 프로게이머들의 심정이 온전히 이해됐다. TPO에 맞춰서 게임하는 것도 티어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도. 그렇게 앉아서 미친놈처럼 게임을 하다 보면 영이에게 귓속말이 도착했다.

네가 갑자기 웬일이냐는,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내용에는 반가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거기서 2부 리그 때문이라고 설명을 대충 뭉개지 말았어야 했을까. 인준을 놀리는 게 아니고서야 기본적으로 리그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이는 디톡을 걸더니 하루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다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고, 인준은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 내는 대신에 발렌타인과 있었던 일을 짧게 요약했다. 그 순간에도 한타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파티할 거면 점수 차이 나서 너 부계로 와야 해.’

[내일 만나는 거 나도 낄래.]

판을 마치고 영이에게 파티 의사를 물으면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영이에게 본론은 언제나 게임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리그는 스쳐 지나가는 서론이자 외전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근래에 들어서 리그 이야기를 좀 많이 하긴 했다지만, 영이는 방관자로서 그어 둔 선을 그렇게 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좀 많이 한 리그 이야기 역시 끝은 최근 게임 메타, 밴픽, 챔프 밸런스에 대한 토론에서 나아가 다음 파티 약속으로 마무리되는 게 보통이었다. 인준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잠깐이었다. 다급하게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뺐다.

‘혹시… 너도 응급실 실려 갔냐?’

진지하게 물어보면 리미새와 같은 취급을 할 바에야 그냥 총으로 쏘라는 쌍욕이 돌아온다. 인준은 차마 머리에 쓰지 못하고 헤드셋으로 소리가 넘어오도록 키워 놨던 볼륨을 급하게 줄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네가 갑자기 리그 게이머를 만나겠다고 할 리가 없잖아.’

[걔 정도 되는 선수면 나한테 별로 관심도 없을걸.]

‘그거야… 그렇지.’

[나도 그냥 하는 말은 아냐. 불법 토토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거기에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왜 있어.’

[학교에서 자꾸 들려오니까.]

‘내가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인준은 목소리가 낮아지거나 빨라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남학생 비율이 높은 학교에서 자신이 사십센트임을 숨기는 데다가 모범생으로 분류되어 선생들이 다른 의미로 신경 쓰고 있을 영이의 귀에 그런 것들이 들려올 리가 없다. 자신의 걱정이 조금도 통하지 않은 것을 안 인준이 한숨을 쉬었다.

[너 자꾸 이 문제에서 날 빼려고 하는데, 일반인의 관점에서 나만큼 도움 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영아.’

[그래, 지금 네가 감동할 타이밍이라는 건 알아. 실제로 굉장히 고맙고 뿌듯하겠지. 네 마음, 난 충분히 이해해. 그래도 우리 사이에 너무 그러진 말자. 우리 내일 직접 얼굴 봐야 하잖아.]

‘너 이거 재밌어 보여서 끼려는 거지.’

[다시 생각해 보니까 우리 사이에 감동이 좀 있어도 될 것 같아.]

핵심을 찔린 영이가 능청을 떨었다. 그래도 저와 시카고와 라이스를 위하는 것처럼 꾸며진 목소리가 대견하기는 하다고 해야 할지. 보아하니 영이는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아주 제대로 보내려는 것 같았다. 수능까지 얼마 남지 않은 그즈음에, 일탈욕으로 돌아 버릴 것 같던 때를 상기한 인준이 두 번째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발렌타인에게 물어보겠다고. 섣부르게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불법 토토에 관해서 날것에 가까운 정보가 필요한 것도 맞았다.

액정이 금 간 휴대폰 대신 PC 메신저를 켜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면 창을 내리기도 전에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도 답장이 빠른 편이었던 그는 한국에 온 뒤로 어떤 사소한 연락도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붙은 별명 중 하나인 SNS 중독자를 생각해 봤을 때 크게 놀랍진 않았다.

영이에게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전하면 당연히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뻔뻔한 반응이 돌아왔다. 어쩌다 보니 가운데 껴서 약속을 조율하던 인준은 걱정과 다르게 시원하게 타협이 된 만남을 보며 목 뒷덜미를 긁적였다. 서포터의 케어를 받는 게 당연한 딜러 두 마리를 중재하던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인게임에서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평화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툭하면 내기를 걸어 오는 발렌타인의 모습이나, 하나에 꽂히면 집요하고 논리 정연하게 캐묻는 영이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서브 딜러끼리 본능적으로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누구도 위하지 못한 개소리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렌타인과 영이는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채였다. 있던 일들을 되짚어 봐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 건, 아마도 문제가 터진 그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준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창가 구석 자리에서 이미 한기가 돌고 있었다.

웃고 있으나 웃지 않는 발렌타인과 그냥 대놓고 짜증이 난 영이의 표정을 확인한 인준은 자신이 약속 시간을 몇 시간 착각했나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빌었다. 차라리 진짜로 약속 시간을 착각한 게 맞기를. 화가 난 두 사람이 리그에 미친 새끼에 대한 뒷담을 나누며 미리 친분을 다지고 있을 뿐이기를. 사람이 짜증 나는 부분만 골라 긁는 재주가 있는 놈과 입딜로 나라를 지킬 놈끼리 싸운 게 아니기를.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올 수 있도록 20분 일찍 집을 나선 과거를 지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못해도 1시간은 먼저 나와서 30분 전부터 대기하고 있어야 했는데.

인준이 발렌타인으로부터 살짝 몸을 돌려 영이가 있는 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였다. 이어서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손으로 얼굴을 짚어 발렌타인이 보이지 않는 척했다. 영이는 얇은 카디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삐딱하게 앉아 있었는데, 시선은 여전히 발렌타인에게 향해 있었다. 즐겨 끼는 서클 렌즈 덕분에 초록빛이 도는 동공에서 당장 레이저가 나와 상대의 얼굴을 뚫어 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쟤가 사과했다며. 그럼 네가 봐주자.”

인준이 영이에게만 들리게끔 조용히 속삭였다. 한 번만 봐주자, 영이야. 네가 한 번만 참자.

“사과는 내가 된 거고. 씨발, 내가 너 오기 전까지 얼마나 돌려 깎기 당한 줄 알아?”

영이는 발렌타인도 들리게 말했다.

“저는 형이 오기 전까지 싸가지 미달로 군 면제 받을 새끼가 됐었어요.”

발렌타인은 인준과 영이 모두가 잘 들리게끔 말했다.

“말고도 뭐라 했었지?”

“찰리한테 고소당할 새끼. 넌 윌리 웡카한테 저항받을 거야.”

팔짱 낀 발렌타인이 어깨만 으쓱였다.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영이의 전매특허 헛소리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중재를 떠맡게 된 인준이 결국 허리를 폈다.

“나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건데? 사람 불편하게 만들 거면 이유나 알고나 있자, 좀.”

나름 답답함 심정을 담아 이야기하면 칼을 갈며 상대가 먼저 입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두 서브 딜러들은 동시에 조용해진다. 인준이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의미 없는 중재만 반복하는 이유기도 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그대로 근처 피시방에 가서 계삭빵을 해도 삼백 번은 더할 것 같은 두 사람은 사정을 물으면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발렌타인이야 둘째치고 영이가 이러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말로 삼억을 빚지고 오억을 갚는 애가 이러는 건 진짜 죽어도 말할 생각 없다는 뜻이었다. 상대의 비밀을 굳이 들쑤시는 취미는 없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계속 갇혀 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인준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너네 진짜 싸우려고 만났냐?”

“미안한데, 난 지금 일분일초가 황금보다 소중한 고3이야.”

“시간 귀한 줄 알고는 있었구나.”

“그, 혹시 대학 자유 이용권이라는 말 들어 봤어? 선생님들이 내 모고 등급 보고 하는 말인데, 난 좀 지겹게 들어서 이제 좀 지치더라. 내가 걱정되면 그쪽으로 해 주면 될 것 같아.”

“그 소리 많이 들으면 질리긴 하지. 학교에서 힘들었겠네. 얼굴에 고생이 없어서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없는 경험 지어내 줄 필요까진 없고.”

“나도 옛날에 많이 들었거든. 난 마음에 없는 소리 잘 못 하는 성격인데, 티가 잘 안 나나?”

“어머, 진짜? 싸가지없는 소리가 너무 커서 몰랐어.”

“둘 다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나, 이대로 카페 나간다.”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카페 조명을 보던 인준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맞춰 둔 대본이라도 있는 것처럼 치열하고 빠르다 못해 빡빡하게 느껴질 정도로 주고받던 대화가 뚝 끊긴다. 자신이 있는 곳이 사십센트와 발렌타인을 만나기로 한 카페인지, 위 형제랑 놀고 싶어 하는 친척 동생들이 모인 본가인지 잠깐 혼란해하던 인준은 거의 처음으로 찾아온 평화에 겨우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비슷한 나이 또래보다 훨씬 성숙하고 눈치 빠르며 똑똑하고 이성적인 두 서브 딜러는 모아 놓으니 주어만 대학, 수능, 내신이었다 뿐이지 아버지 나이로 싸우는 유치원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유치하게 싸우는 놈들에게는 유치한 협박이 제격이었다.

“지금부터 리그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 금지. 싸울 거면 누가 뭘 잘못했는지 나한테 말하든지, 내가 없는 곳에서 하든지 해.”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것처럼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이었으나 보고 있는 사람이, 정확하게는 저가 없으면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지도 않을 것이다. 어린애들이 하는 싸움이라는 게 다 그랬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들끼리 조금 주고받고 엉겨 붙다가 말았다. 그렇다고 진짜로 제가 안 보는 곳에서 싸우고 있으면 어떻게든 쫓아가서 뜯어말릴 거지만.

자기들이 유치하다는 자각은 있긴 한지, 웬만해서 곱게 넘어가지 않는 영이가 눈앞에 있는 음료를 들었고, 고집에 한 일가견이 있는 발렌타인도 턱을 살짝 위로 드는 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으로는 충분한 몸짓들이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인준은 어깨에 메고 온 메신저 백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린애들을 달래는 게 익숙해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윽고 인준의 가방에서 나온 건 두 개의 클리어 파일이었다. 그리고 클리어 파일 안에서 나온 건 2부 리그의 팀별 특징과 불법 토토 사이트에 관한 정보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채로 프린트된 서류들이었다. 컴퓨터 문서로 작성되어 맞춰졌을 여백 곳곳에는 인준이 직접 쓴 듯한 메모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일부러 준비해 온 거예요?”

“보기에만 거창하지, 보면 다 인터넷에 있는 것들 짜깁기한 거야. 옛날부터 이런 거 할 때는 종이에 직접 적으면서 해야 집중이 되더라고.”

마지막으로 가방 깊은 곳에서 펜 몇 자루를 꺼낸 인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발렌타인은 대충 봐도 읽을 순서대로 정리되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 중에서, 가장 지저분한 것을 집어 들었다. 2부 팀별마다 선수 특징과 장단점이 적혀 있는 서류였다.

직접 필기하는 게 편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꽤 날린 듯이 적힌 문장들은 뒤로 갈수록 위로 올라간다든가, 내려가는 것 없이 일정하게 적혀 있었다. ‘ㄹ’의 첫 획이 조금 삐쭉한 것만 빼면 꽤 단정한 글씨체였다.

일정하게 프린트된 검은 활자들을 읽는 척 파란 글자들만 골라 보던 발렌타인은 슬쩍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렸다. 열린 시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사십센트 쪽으로 몸의 무게 중심을 기울인 인준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읽지 못한 글자, 혹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대신 짚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쓰고 있는 모자 색깔은 이틀 전에 보던 것과 달리 새하얬다. 까맣기만 했던 그때와 달리 그럴듯한 프린팅 문구가 적혀 있는 모자는 입고 온 옷과 잘 어울렸다. 우스꽝스럽게 보일 밴드를 가리려는 게 아니라 순전히 멋을 위해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살짝 눈을 흘겨 창에 비친 자신의 검은 머리를 보던 발렌타인은 다시 종이를 들어 올렸다.

“좀… 뭔가 이상한데.”

뜻하지 않게 찾아온 적막을 깬 건 사십센트였다. 그녀는 종이를 앞으로 넘겼다가, 다시 뒤로 뺐다가, 테이블에 있는 다른 종이들을 뒤적이길 반복했다. 필요한 내용이 여기에 없다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것들이라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건 없을 거야. 왜, 뭐 찾는데?”

인준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발렌타인 역시 눈높이에 맞췄던 서류를 내렸다. 그러는 것도 잠깐이었다. 단순히 서류를 뒤섞는 것처럼 보이던 사십센트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한꺼번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에 있는 건 불법 도박 사이트 로고나 광고 배너들이었다. 그것들은 사이트가 어떤 구조로 운영이 되는지, 그들이 어떤 수법으로 유저를 끌어모으는지에 대한 설명의 여백을 보충하는 시각적 자료들로 쓰이고 있었다.

“이게 왜?”

“불법 사이트가 이렇게 많고, 미성년자도 접근하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는데… 학교에서 리그로 도박하는 애들이 쓰는 건 이거 하나야.”

이어 사십센트가 손가락으로 많은 직사각형 중 하나를 짚었다. 주황색과 형광 노란색으로 꾸며진 건 어느 사이트의 로고라기보다는 광고 배너에 가까워 보였다. 손가락 끝을 따라가던 발렌타인과 인준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진다. ‘지금 가입하면 500만 원 베팅 칩 공짜, 당신의 꿈을 당장 실현해 보세요!!’ 따위의 호객 문구 밑에, 조그맣게 적힌 사이트의 이름 때문이었다.

RISE.

지겹도록 눈에 익은 영어 단어였다.

“시카고 감독이 조사받는 이유가 따로 있었네요.”

짜 맞춘 것처럼 같은 타이밍에 고개를 들고, 의도치 않게 맞은 눈높이에서 먼저 입을 연 건 발렌타인이었다. 인준과 영의 맞은편에 앉아 혼자만 상하가 뒤바뀐 글을 보던 발렌타인은 서류를 빼 갔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이었다.

“…설마, 우연이겠지.”

“그 이름 때문에 여기에다가 추가한 거 아니었어?”

‘RISE’라는 영단어가 리그에서 어떤 의미인지 인준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지식을 주입 당한 영이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샌가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지금 처음 봤어. 이거 잘라 넣을 땐 배너 광고만 보고 불싸 중에 이런 게 있다는 예시로만 갖고 온 거라서…….”

인준은 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사이트가 언제 개설됐는지를 알아봐야겠네요. 기분 나쁜 우연인지 아닌지는 그때 알겠죠.”

“왜 하필 이 사이트를 이용하는지도 알아야 해.”

“그건 사이트 중에 제일 커서 그런 게 아닐까요. 크기가 있으면 노출도 쉽잖아요. 당장 형이 뽑은 배너 문구 중에서 가입 특전이 가장 세기도 하고요.”

“그런 이유만으로 전부 다 같은 사이트로 고르진 않을 거야.”

“아무리 사십센트라고 해도 학교에 있는 전원을 조사한 건 아닐 텐데 전부 다라고 단정 짓기에도 좀 섣부르지 않아요?”

발렌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을 하고 있던 영이가 손을 내리고 그를 보았다. 잘 정리된 앞머리의 틈새로 한쪽 눈썹만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그 조용한 시선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절대 모르지 않을 발렌타인은 고개만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제가 틀린 말을 했냐는 뜻이었다.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최선을 다해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에 인준은 목을 긁다시피 헛기침할 뿐이었다. 그러면 상대를 노려보던 둘은 의식적으로 서로가 하던 일에 다시 집중했다. 쓸데없이 팽팽한 딜러 둘 사이에서 영이가 괜히 단정 지은 게 아닐 거라는 믿음과 발렌타인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는 이성을 두고 고민하던 그때였다.

“백 마디 떠들 시간에 한번 직접 해 보는 게 낫지.”

영이는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팔을 뻗었다. 인준은 상체만 살짝 숙여 그녀가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그만 액정으로 보이는 건 검은색 배경에 눈 아픈 형광색들이 반짝이는 화면이었다. 컴퓨터로 접속했으면 온갖 광고 팝업창들이 연달아 뜰 것 같은 사이트였다.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인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어?”

“로그인 없이 체험판도 가능해. 비회원이어도 한번 찍어 먹어 보라고 100포인트 주더라. 이걸 돈으로 환산해서 뽑고 싶으면 회원 가입해야 하는 것 같고, 도전할 종목도 다양해.”

기겁하는 인준의 반응에도 영이는 태연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것을 본 발렌타인은 자신의 주머니에서도 휴대폰을 꺼냈다.

“너도 하게?”

“전 다른 사이트 들어가 보려고요. 그래야 비교가 되죠.”

“네 것도 켜, 그래야 비교군이 많을 거 아니야.”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개인 정보랑 돈이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인데.”

“그럼 쟤가 손해배상 해 주겠지.”

화면에 눈을 고정한 영이는 턱짓만으로 발렌타인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프로게이머들이 그 나이 또래와 비교할 수 없는 연봉을 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재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국내 대회부터 몇 년째 리그를 뛰고 있는 라이스나 럴러바이 같은 선수면 모를까, 올해 데뷔를 한 신인에게 남의 잘못을 책임질 만한 여유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대학생보다는 훨씬 돈을 잘 벌 게 확실한 사람을 걱정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거기까지 또 생각이 닿다 보면 의식 저편에서 포르쉐 한 대가 드리프트 주차하며 멈춰 섰다. 영이가 재벌 취급 하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재벌인 구단주의 총애를 받는 게 확실한 놈이니까 괜찮나? 그러고 보면 신인치고 리그나 스폰서 관련한 광고를 많이 찍었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모든 책임 비용을 발렌타인이 낸다고 한들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돌다리를 건너는 건 또 다른 문제였던 인준이 찜찜한 얼굴로 메신저 백에서 휴대폰을 찾던 그때였다.

“왜 그 사이트로만 학생들이 몰린 건지 알겠네요.”

다리를 꼰 채로 휴대폰을 조작하던 발렌타인이 말했다. 인준과 영이 같은 타이밍에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둘을 보던 발렌타인은 이어 말하기 위해 벌렸던 입을 잠시 다물었다가 금방 다시 열었다.

“다른 사이트들은 리그 도박이 아예 없거나 막혀 있는 상태예요. 몇 개 더 돌아봐야 알겠지만, 정황상 오픈 시티는 그 사이트만 뚫려 있는 것 같아요.”

“종목만 막힌 거라면 크래프트원의 고소를 피하려고 그런 것 같은데, 왜 하필 여기만?”

가뜩이나 수상한 사이트 이름이 더더욱 수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부분은 당장 사이트 좀 돌아다닌다고 알긴 어려울 것 같고, 제가 따로 조사해 볼게요.”

발렌타인은 홀드를 건 휴대폰을 다시 옷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런 것보다도 나는 왜 하필 리그 도박인지가 이해가 안 되는데.”

휴대폰을 테이블에 던지듯 올려놓고는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눕듯이 기댄 영이가 말했다. 거기에 손을 뻗은 건 발렌타인이었다. 그립톡까지 달려서인지 영이의 손안에서 굉장히 커 보였던 휴대폰은 발렌타인의 손으로 들어가니 꽤 앙증맞게 보였다.

“다른 종목들이 죄다 홀짝 맞추기, 사다리 타기, 숫자 룰렛 이딴 거니까. 요즘 애들은 똑똑해서 이런 걸로는 안 속지.”

“운으로 결과가 나는 종목들은 결국 시스템으로 장난치는 게 대부분이거든. 일정 이상 돈을 따면 확률이 깎인다든가 하는 식으로 잭팟을 맛보여 주되, 큰돈은 절대 못 벌게 만들면서 계속 도박에 매달리게끔 유도하는 거야. 이런 사이트들도 결국 자기들 돈 버는 게 우선이니까.”

인준이 발렌타인의 말에 부족한 설명을 덧붙였다. 뒤로 몸을 기대고 있던 영이는 상반신을 앞으로 빼 그의 손안으로 들어간 자신의 휴대폰을 뺏었다.

“그래서 리그 경기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하는 거야? 어쨌든 경기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으니까?”

“어떤 팀이 어떤 스코어로 이길지 고르는 건 까다롭겠지만, 팀마다 맵별 승률이라든지, 전적이라든지 승패를 판단할 데이터베이스가 있으니까 운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전략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 다른 실시간 경기들이 경마, 종이컵 빨리 쌓기 이런 낯선 경기들인 것도 있고. 도박하는 10대, 20대, 넓게 가면 30대까지 제일 익숙한 게 오픈 시티일걸.”

“근데 리그에서도 승부 조작이 있었던 거고?”

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이 쓰다 못해 삼키는 침이 쓰라릴 지경이었다.

“애초에 도박에 전략적 투자 같은 게 어딨어.”

영이가 표정을 찌푸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인준은 반쯤 남은 커피에 손을 뻗었다.

“빚을 져도 한번 크게 따서 갚으면 된다고 생각할 만큼 사고가 병 드는 게 도박이야. 그래서 너한테 도박하는 애들이랑 엮이지 말라고 했던 거고.”

“…넌 왜 이렇게 잘 알아. 너 해 봤냐?”

“내가 했으면 시카고에 올인하고 벌써 망했지.”

“그건 그래.”

영이가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몇 번씩이나 끄덕였다. 농담처럼 던진 말에 이렇게 빠른 납득이 돌아올 줄 몰랐던 인준은 빨대를 문 채로 옆을 흘겨봤다. 그렇다고 해도 먼저 자학한 게 자신이었기 때문에 다르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대충 의문이 해소된 영이는 금방 다른 종이로 관심을 돌렸다. 인준이 스포츠 토토와 불법 도박에 대해 찾아보며 가장 도움이 됐던 게 도박 중독을 치료한 사람들의 사례나 그들이 익명 커뮤니티에 직접 남긴 글들이긴 했다. 그렇다면 포괄적인 개념만 알고 있던 영이와 달리 꽤 자세히 알고 있는 듯이 대화를 듣던 발렌타인도 과연 그런 것들을 찾아봤을까.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그를 보자 그렇지 않아도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한 장을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보이기 쉽게 들었다.

“그래서 형은 도박하다가 정신이 병든 것도 모자라 직접 승부에 개입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선수들 틈에 섞여서 경기를 뛰겠다고요?”

“뭔 소리야, 쟤가 경기를 왜 뛰어.”

“형이 너한테 말 안 하는 것도 있구나.”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냐?”

영이가 냉큼 발렌타인이 들고 있던 서류를 가져갔다. 그가 들고 있던 건 2부 팀 중에서도 새로운 멤버 영입이 필요할 것 같은 팀들을 정리해 놓은 서류였다. 인준이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그, 우리가 여태까지 이야기했던 걸 시카고 감독이랑 연관 지을 거면 2부 리그 사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일이 일이다 보니까― 괜히, 어? 섣부르게 믿었다가 내가 다 덮어쓸 수도 있고, 일 처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럴 바에야 그냥 내가 하면 쓸데없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게임 잘해서 쓸 데가 이거 말고 있나 싶고, 영아, 근데 내 말 듣고 있어?”

“휴대폰으로 불법 사이트 들어가는 건 조심하면서, 형 편이 하나도 없는 데다가 높은 확률로 문제만 가득할 팀으로 들어가는 건 괜찮아요?”

꺼리던 거 모를 줄 알았는데. 어디서 그렇게 티가 났는지 당황하고 있으면 발렌타인은 태연하게 자신의 앞에 있는 음료를 들었다. 어떻게든 설득하면 결국 이 방법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발렌타인은 아무래도 끝까지 반대할 모양이었다. 영이의 어그로를 끌 듯이 말을 꺼낸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인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웃는 그의 모습은 든든한 편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확실히 영이는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내놓는 합리적인 방안을 거부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인준의 의견을 반대하고 어떤 결정을 말린다면 기어코 리그에 미쳐서 이성적 판단이 안 되는 새끼라며 멍석에다가 말아 놓고 개 패듯 말릴 것이다. 거기에 인준이 반항해서 성공한 적은 없었는데, 발렌타인은 거기까지 파악을 마친 것 같았다. 조용히 있는가 싶더니 그새 꾀를 부린 그에게 인준은 한 가지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거 재밌겠다.”

“……뭐?”

“나도 낄래.”

사영이라는 사람은 보통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자극 중독자라는 것이다.

“네가 이걸 왜 해.”

“말했잖아, 재밌어 보인다고.”

“지금 이게 재미로 덤빌 일이야?”

“프로들이랑 내가 얼마나 차이 날지 궁금했는데, 마침 잘됐지.”

“너 수능은 어쩌려고.”

“대학 자유 이용권이라는 말 듣기 질린다면서 또 말하게 하네.”

인준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팔 하나는 소파 등받이에 걸치듯 올린 뒤에, 남은 손으로 음료를 든 채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감상했다. 어디 휴양지 선베드에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자세는 완벽하게 역전된 상황을 즐기는 자의 모습이었다.

여태까지 웬만한 상황에서는 계속 웃는 얼굴을 유지하던 발렌타인의 미간은 좁혀져 있었다. 표정에서 읽히는 감정은 짜증보다는 당황스러움에 가까웠다. 영이라는 사람을 계획에 집어넣은 사람의 흔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팽팽했던 두 서브 딜러의 서열 정리는 이렇게 끝나는 모양이다.

“쟤랑 나랑 같이해 온 시간이 얼만데, 같은 팀 하면 합 맞출 시간도 필요 없고 선발도 금방 뽑힐걸? 뭐가 됐든 간에 쟤는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해서 이러는 거 아냐? 그럼 쓸 수 있는 건 전부 써야지.”

영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불과 몇 초 전에 재미 때문에 끼겠다고 말한 주제에 급하게 논리를 끌어오는 게 참 양심이 없어 보였다. 최초로 2부 리그로 뛰어들겠다고 말하던 그날 발렌타인에게 내지른 다음 생각하던 걸 들켰던 그때를 잊어버린 인준이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진짜 둘이 같이 리그를 뛰겠다고.”

“응.”

발렌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이 대답하고, 인준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어쩐지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린 탓이다. 영이에게 말을 하면서 시선은 제게 고정하고 있는 발렌타인이 일부러 그런 건지 우연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대답까지 대신했다는 듯한 영이의 태도에 발렌타인의 뺨 근처가 움틀거렸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았다. 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적인 줄 알았으나 역시나 인생의 원수가 맞았던 상대를 볼 때나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그게 아니면…….

자연스럽게 생각을 이어 가는 대신에 손에 들고 있던 음료 컵을 소리 나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발렌타인이 무엇 때문에 열받았든, 자신이 나설 때라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난 너랑 같이 안 할 거야.”

“왜?”

“그거야,”

“그냥 제대로 된 팀 하나 골라서 집중적으로 노리는 게 더 낫지 않아? 시간이 별로 많은 것도 아니잖아. 설마, 다른 팀으로 다른 서브 딜러 데리고 날 이겨 보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영이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치 않게 하려던 말이 끊긴 인준은 부러 눈을 반쯤 뜨고 상대를 보았다. 그녀는 이미 2부 리그를 뛰는 걸 당연한 전제로 깔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2부 리그 자체를 혼자 할 거라고.”

두 서브 딜러의 표정이 완전히 엇갈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너랑 같이하면 효율적이기만 할까, 온갖 주목이라는 주목은 다 받고 커뮤니티에 영원히 박제되겠지.”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몰라?”

“내가 거기 왕 하려고 가냐.”

“눈에 안 띄게 하면 될 거 아냐. 아니면 아예 부계 닉네임으로 들어가면 되지.”

“입단 테스트가 아이디랑 비번 치고 접속하는 건 줄 아네. 오픈 시티에서 여자 딜러 최상위 랭커라고 했을 때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무엇보다도 너 아직 법적 미성년자라서 하고 싶어도 부모님 동의 없으면 못 해.”

수능까지 이제 3개월 좀 안 남은 시점에, 어디 가서 자랑삼아도 모자랄 자식, 그것도 심지어 외동딸을, 평생 직장이 절대 될 수 없는 프로게이머, 그마저도 1부도 아닌 2부 입단을 허락할 부모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영이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물은 적 없었기에 정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게임을 싫어하는 대한민국의 부모에 대해서는 잘 알던 인준은 빨대로 의미 없이 얼음을 쑤시며 마저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네가 2부 가는 건 내가 싫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프로랑 실력 차이 보겠다고 리그 갈 거면 1부로 가야지. 대학도 2군 갈 바에 재수하겠다는 애가 무슨 2부야. 말하다 보니까 갑자기 확 짜증 나네. 너 여태까지 신상 지켜 오던 거 포기하고 리그 갈 거면 무조건 1부 가.”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포기할 줄 아나 본데, 진짜 어떻게 아는 거냐? 무당보다 용한 새끼. 하여튼 날 너무 잘 안다니까.”

어디 가면 꼭 말 많이 하고 살아. 넌 입 열었는데 리그 이야기 아닐 때가 제일 잘생겼어. 영이가 밀듯이 어깨를 치며 덧붙였다. 나름대로 내숭을 부린다고 하는 행동이었을 테니, 인준은 뼈가 울리는 듯한 매서움에 대해서는 입 닫고 있기로 했다. 그러고 있으면 눈치껏 대화에서 빠져 있던 발렌타인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직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 할 일을 하고 있거나 꽤 코믹하게 끝난 상황에 헛웃음을 띠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힐끗 본 발렌타인은 다른 서류들을 보고 있지도 않았고, 웃음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말로는 굉장히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표정으로 저와 영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타고난 인상 덕분인지, 굉장히 날이 서 있다고 느껴지는 한편으로는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설명하자면 체념이 더 맞겠다. 사실 체념과 우울보다 더 어울리는 건 슬픔이었으나, 별개로 발렌타인과 슬픔이라는 단어만큼은 매치하기 힘들었던 인준은 슬픔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 더 이성으로 묶여 있는 단어를 찾으려 애썼다. 그 집중을 깨트린 건 영이었다. 정확히는 영이의 휴대폰 진동이.

“엄마한테서 전화 왔으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봐. 아니다, 그냥 나가서 받고 올게.”

굉장히 좋지 않은 타이밍에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은 영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서야 들었다. 뭐 해? 나 나가서 받고 온다니까. 창가 쪽에 앉았던 영이가 무릎으로 다리를 툭툭 쳐 왔다. 조금의 지체도 허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여기서 받아도 되는데.”

“내가 싫어.”

영이의 시선이 맞은 편을 향했다가, 그다음 깜빡임에 다시 저가 있는 쪽으로 돌아온다. 그 눈짓이 의미하는 바를 읽은 인준은 더 눈치 없이 구는 대신에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예 몸을 바깥으로 빼서 비켜 주면 길이 트인 영이는 곧장 카페의 정문으로 달려 나갔다. 보통 급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영이를 떠나보낸 후 자리에 앉고 나면 발렌타인의 표정은 익히 알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영이 다루기 생각보다 힘들지?”

직전과 자연스럽게 이어질 주제로 대화를 시도했다. 무작정 시끄러운 것보다는 적당히 소리의 공백이 있는 쪽이 더 편했던 인준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찾아오는 침묵, 정적, 고요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저가 그러든지 말든지 발렌타인은 아직도 한참 남은 음료에 손을 뻗었다. 그 태연함에 꾸미는 듯한 어색함은 없었다. 그걸 보면 애초에 둘이 있는 것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칭찬에 약한 줄 몰랐어요. 맨날 듣고 사는 소리일 텐데.”

“잘한다, 잘한다 해야 더 잘하더라고, 쟤는.”

“그것보다는 형이 한 말이라서 그럴걸요. 2부 리그 가겠다는 것도 형이랑 같이 게임하고 싶은 게 커 보이던데요.”

“영이가?”

인준의 말끝을 마무리한 건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듯한 코웃음이었다.

“네가 그렇게 겪고도 아직 모르는구나. 영이는 재밌어 보이는데 심지어 할 만해 보이기까지 하면 일단 무조건 내지르고 보는 애야. 직접 자기 입으로도 말했잖아. 재밌을 것 같으니 하겠다고.”

“…뭐,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흘러가는 분위기에 긴장이 조금씩 풀려 간다. 그러고 나면 발렌타인이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가 있나 싶었다.

“애는 애구나 싶네요.”

“그 애랑 진심으로 대학이니, 뭐니 하면서 싸우던 놈 어디 갔냐.”

“저는 같은 서브 딜러로서 동등하게 대한 거예요.”

“너 그새 헛소리가 옮았다.”

“그게 형 취향인 것 같아서.”

“이거 진짜 영이 급으로 뻔뻔해졌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인준이 혀를 내둘렀다. 여유 있는 척 구는 모습이나, 웃을 마음이 전혀 없어도 웃는 거나, 능청을 떠는 모습이야 몇 번 봐 왔다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철면피를 깔고 나오는 걸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고 나면 바로 전에 미묘하던 발렌타인의 표정이 무엇으로부터 나왔는지 형태를 알 것도 같았다.

영이를 같은 딜러로서 동등하게 대한 거라며 애 취급한 게 아니라고 넘어갔지만, 그랬기 때문에 대화가 진행될수록 부모님 동의가 필요하다느니, 엄마 전화를 받고 오겠다느니, 영이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확 보일 때마다 괴로웠을 것이다. 현피 뜨러 나가서 4시에 막 하교를 마친 중학생에게 컵 떡볶이를 쥐여 주고 돌아온 그날 이후로 한 달 동안 ‘40cent’와 진심으로 키배를 뜨다 못해 샷건을 쳤던 나날들을 진심으로 후회했던 인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쓰라림이었다.

“형, 저랑 약속 한 번만 더 할래요?”

“응?”

“형이나 나나 뭔가 걸고 한 약속은 잘 지키잖아요.”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로 회상에 잠겨 있던 인준이 눈을 깜빡였다. 입에 대고 있던 매장 컵을 탁자 위에 돌려놓은 발렌타인은 느릿한 동작으로 양손에 깍지를 꼈다. 강암역 카페에서 있었던 일들을 금방 떠올린 인준은 그건 약속이 아니라 서로 오가는 게 있던 거래였다고 정정해 주는 대신,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고 있던 등허리를 곧게 세웠다.

“형이 2부 리그 가려는 거, 앞으론 반대 안 하고 힘이 닿는 곳까지 도와줄게요.”

“그 대신에?”

“2부 경기는 절대 뛰지 마요.”

인준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발렌타인이 하는 말이었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의도를 헤아리고자 시선을 마주하면 그는 눈을 접어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벤치로 남아 줘요.”

승현은 맞잡은 양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으로 손등의 뼈가 생생하게 만져졌으나, 참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내 서포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할 거잖아요.”

“…….”

“그럼 다른 팀, 다른 딜러의 서포터도 끝까지 하지 마요.”

깍지 낀 관절 사이사이가 서로를 누르면서 통증을 더했다. 인준은 알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면 그는 리그에 큰 뜻이 없었고, 아직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그래야만 했다. 고민하는 것도 잠깐이고, 처음 약속을 주고받았을 때처럼 지키는 게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약속이라며 능청을 떨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그래야만 했다.

카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던 노래가 끝을 맞이하고 곧바로 새로운 노래가 시작된다. 대답을 기다리던 찰나가 이렇게까지 길게 느껴지던 적이 있었을까 싶던 그 순간이었다. 허리를 편 채로 굳어 있나 싶던 인준이, 웃었다.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는데,

“너 그렇게 나랑 같이 게임하고 싶냐?”

승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한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당사자는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는지, 아무렇지 않게 탁자에 올려진 종이로 손을 뻗었다.

“전에도 말했지. 끽해야 한두 달 있을 딜러 데려가려는 1부 팀은 없을 거라고. 이쯤 되면 네가 내 뭘 보고 그렇게까지 고평가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혹시 뉴욕 서포터가 너랑 게임 잘 안 해 줘?”

인준의 말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얼핏 들으면 이번에도 자신의 말은 농담 근처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종이를 드는 걸로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리려는 행위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인준이 장난스럽게 이 문제를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은 왜 그렇게 스스로를 저평가해요?”

인준이 나름대로 진지하게 답하고 있다고 한들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꺼냈다.

“내가 진짜 날 저평가했으면 2부 리그 들어가겠다는 말도 못 했지. 난 그냥 객관화가 잘되어 있는 거고.”

“그 객관화가 엉망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내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가.”

인준이 종이를 내리고 다른 걸 찾으려는 듯 테이블을 뒤졌다. 다시 보인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양손을 맞잡고 있던 승현의 손에 또 한 번 힘이 들어간다.

“…형, 설마 사십센트가,”

“말고, 우리 누나.”

“누나가 있었어요?”

“응.”

승현은 차라리 그의 밑으로 동생이 세 명이 더 있는 쪽이 그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한 모금 정도 남은 커피로 관심을 돌린 인준은 아무렇지 않게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그래도 누나분이… 오픈 시티를 하진 않을 거잖아요.”

“게임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하면 금방 잘할걸?”

“형이 너무 대단하게 보는 건 아니고요?”

“그런 걸 수도 있고.”

동의하는 것처럼 말한 것과 달리 인준은 단순히 나이 때문에 연주를 멀게 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가 가지고 태어난 게 많다는 건 알았다. 지금껏 살아오며 재능충이라는 욕 같은 칭찬도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인준이 겸손함이라는 이름의 자기 객관화를 갖추고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온몸이 재능으로 꽉꽉 차서 흘러넘치는 사람이 바로 위에 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는 인준도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주만큼 나이를 먹고 나면, 연주가 했던 것들을 저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를 먹고, 그때 대단하게 보였던 누나랑 나이가 똑같아져도 연주가 해 왔던 것들을 인준이 해낼 수는 없었다. 연주는 중학교 시절에 이미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었고, 그러다 못해 고등학교 때는 기타 친다던 친구 따라 건반 좀 두들기다가 CM 송을 작곡해서 공모전 대상을 타 왔으며, 대학 시절에는 삼 개월 어학 연수로 떠난 스페인에서 회화까지 가능할 정도로 불어를 배워 왔다.

아직 오픈 시티가 나오기 전, 배틀스트라이커가 가장 유명하던 시절에 티비 속 오빠를 따라 게임을 시작하려던 연지에게 기본적인 끌어치기를 알려 주면 뒤에서 듣던 연주가 이론만 듣고 3연속 헤드샷을 깠다. 연주가 못하는 것들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직 안 해 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신은 연주에게 장산 타이거즈를 내려 줬다. 실패가 없는 연주의 인생에 고난과 역경이 무엇인지 알려 주기 위해서.

사춘기 시절에 부모가 형제들끼리 비교하지 않는 어른이라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겸손함으로 포장되는 자기 객관화를 지니면서도, 지나치게 위에 있는 존재와 의미 없는 비교를 하며 애꿎은 자존감을 깎아 먹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은 건 그 덕분이다.

인준에게 그런 예의를 심어 주는 존재가 두 명 정도 더 있긴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다 보면 상념에 빠져 상대를 너무 오래 방치해 둔 사실이 떠올랐다. 눈을 위로 굴려서 본 발렌타인은 여전히 깔끔하게 납득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 보고 다른 서포터 하지 말라며? 표정은 꼭 내가 1부 뛰길 바라는 것 같다.”

인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승현이 답지 않게 침착하지 못하면 인준은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놀리는 대신,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리깔아 테이블을 보았다. 보지 못한 것으로 해 주겠다는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인준이 굳이 지적을 한 건, 결국 자신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승현은 상황 판단을 마친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실 저가 어떤 마음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뉴욕의 유니폼을 입지 않을 거라면, 그 어떤 유니폼도 입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서포터가 되지 않겠다면 누구의 서포터도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그런 한편으로는 그와 함께 경기가 뛰고 싶었다. 그리고 온 세상이 그를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을 보여 주면서 당신의 가치가 이 정도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아직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미련이 남은 스스로 질려하며 타박해 봐도 걷잡을 수 없었다. 처음이었다. 더 이상 매달려 봤자 의미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건.

“이런 것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자.”

“……그래요.”

애써 태연함을 꾸며 낸 승현은 종이들이 펼쳐져 있는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당장 해결되지 않는 것을 옆으로 미뤄 두고 잊으려면 다르게 생각할 것이 필요해서였다. 슬쩍 본 인준은 누구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얼굴에 배어 있는 무심함은 웃지 않으면 차갑게 생긴 그의 인상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순간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게 더 나을 때도 있겠다는 생각은 그때 처음 들었다.

“그래서 형은 2부 중에 어떤 팀으로 가고 싶은데요.”

“어, 나는 너 머리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승현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고개를 들어 인준을 보았다. 한 손을 목 뒷덜미에 얹은 그는 꽤 머쓱해 보였다.

“하루 만에 색이 바뀌었길래. 아니, 뭐, 이야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근데 2부에 관한 이야기 지금 하면 이따가 영이가 와서 개지랄할 것 같은데.”

“…형은 제 머리 같은 거에 관심 없는 줄 알아서요.”

“오자마자 너희가 싸우고 있어서 말 꺼낼 타이밍을 못 잡고 있던 거지.”

인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헛웃음을 터트리는 그 한순간, 승현은 인준이 어떤 얼굴로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던 생각이 굉장히 우스운 투정이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형은 오늘도 모자 쓰고 올 건데, 대낮에 저까지 쓰고 오면 수상해 보이잖아요.”

“나 때문이라고?”

헛웃으며 대답하던 인준의 입가가 빠르게 굳었다. 농담이라고 말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묘한 긴장감마저 느껴지는 그 상황에서 승현이 참지 못하고 웃었다. 굳이 꾸며 낼 필요도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오히려 근육에 주고 있던 힘이 풀려 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웃음이었다. 그러고 나면 인준이 표정을 구겼다.

“그래, 팬을 위한 게 뻔했을 텐데 오해해서 미안하다.”

“탈색한 대로 두면 어딜 가도 사람들이 알아볼 것 같아서도 있긴 해요. 잠깐 덮은 거라 미국 가면 다시 색 뺄 거예요. 팬들은 제가 한국 온 줄 모르거든요.”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노려봐도 발렌타인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화사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법한 웃음에도 놀려졌다는 감상 말고는 특별한 감흥이 안 든 인준은 미간만 좁혔다. 모든 일상을 팬들과 공유하며 소통에 적극적이던 발렌타인이, 팬들에게 감추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어색하게 다가왔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고작해야 일주일, 그것도 스스로는 굉장히 불명예스럽게 여기고 있는 휴가를 굳이 팬들에게 알리고 싶진 않을 것이다.

개중에 리그에 미친 어떤 놈들은 발렌타인의 사정에 깊게 공감하지 못하고 지금 네가 휴가를 갈 때냐며, 네가 기우는 날이 뉴욕이 기우는 날이며 죽어도 뉴욕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당장 돌아오라고 할 수도 있었다. 상대가 불쾌하거나 말거나 도중에 한번 음료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은 발렌타인은 직전까지 혼란해 보였던 모습이 전부 말끔하게 지워진 채였다. 그뿐일까, 어딘가 들떠 보였다. 오로지 인상만으로 이렇게까지 무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건 굉장한 장점이라고 새삼스럽게 느끼던 그때였다.

“너네 뭐 해?”

손에 쟁반을 들고 온 영이는 정확히 발렌타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온화한 인상이어도 세상에는 안 되는 게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턱을 괴고 있던 인준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줬다. 쟁반 위에는 조각으로 잘린 티라미수가 있었다. 다행히 포크는 세 개였다. 세 명이 먹을 양은 못 됐지만서도.

“배고파?”

“아니, 그냥 단 게 먹고 싶어서.”

인준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면 영이는 앉는 것과 동시에 이등변 삼각형으로 잘린 케이크 끝을 갈라서 퍼 올렸다.

“그래서 2부 팀 어디로 갈 건지는 정했고?”

그러고는 바로 본론의 시작이었다. 직전에 저와 발렌타인이 무슨 이야기를 했든 간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뭐든 자신의 페이스대로 이끌고 가는 영이다웠다. 인준이 갈 만한 팀으로 정리해 둔 종이를 찾으면 발렌타인이 자신의 앞에 모아 둔 것들을 집어 들었다.

“크게 주목받으면 안 되니까 기존 서포터들이 적당히 자리 잡은 팀으로 골라요.”

“일단 생각해 둔 팀은 세 곳 정도긴 해. 프레셔랑 블로썸, 플러피.”

“블로썸은 걸러. 팀으로 들어가면 1년은 무조건 채워야 할걸. 무엇보다도 감독이 진짜 이상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온 의견에 인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영이는 여전히 티라미수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선으로 설명을 요구하고 있으면 눈이 마주친 영이는 입 모양으로 뭘 꼴아보냐며 시비로 받아들였다.

“1부 오퍼도 깠다더니.”

“기본이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발렌타인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그는 영이가 2부 영입 사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어떠한 놀라움도 없어 보였다. 마찬가지로 영이는 그렇게 특별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처럼 대꾸했다.

하기야 사십센트였다. 대부분의 유저가 프로와 견줘도 손색없다고 평가하는 사십센트. 팀에 들이기만 한다면 2부 팀이어도 1부 팀만큼 이목을 모을 게 분명한 사십센트. 2부에서 제의가 와도 삼백 번은 더 와도 이상한 것 없다고, 머리는 분명하게 이해를 마쳤으나, 그것과 별개로 여태까지 어떤 팀에서 어떤 식으로 오퍼가 들어왔는지에 대해 한 번도 직접적으로 들어 본 적 없었던 인준은 한 박자 늦게 대화를 따라갔다.

그즈음엔 발렌타인은 저가 꺼낸 볼펜을 들고 몇몇 팀들 위로 동그라미와 엑스자를 치면서 영이에게 하나하나 묻고 있었다. 인준이 고른 팀 위에는 전부 엑스자가 그려져 있었다.

“프레셔랑 플러피는 왜?”

“프레셔 팀은 이번 연도에 새로 데려온 서포터가 작년만큼 못하기는 한데, 꾸준하게 성적 내는 2부 상위권 팀이라 들어가면 각 잡고 경기만 뛰게 될지도 몰라요.”

“플러피는.”

“거긴 너무 못해서 시카고 감독이 관심 갖지도 않을걸요.”

“차라리 거기가 더 괜찮겠다.”

“여기?”

“아니, 그거 말고 뒷장에, 방금 그거.”

“팀원들이 좀 고인 거 빼면 괜찮을 것 같긴 해.”

자신을 빼놓고도 매끄럽게 진행되는 대화에 한순간 인준은 2부 리그를 가는 주체가 자신이 맞는지 고민해야만 했다. 여태까지 그렇게 날 세우고 싸우던 놈들이 맞나 싶은 생각은 덤이었다. 영이의 의견을 따라 발렌타인이 팀 로고 위로 동그라미를 치는 것도 잠시, 선수들 이름 좀 확인하겠다던 영이는 메인 딜러의 닉네임을 확인하자마자 이 새끼 게임하기 전에 쑥과 마늘 먹일 자신 있으면 가라는 식으로 이 팀은 괜찮다는 의견을 금방 철회하고는 했다. 그렇게 검지를 대신해서 들고 있던 포크를 휙휙 움직이면 발렌타인은 별말 않고 동그라미 위로 엑스자를 덧대었다.

인준은 이미 한참 전에 비운 빨대를 씹으며 둘을 관찰했다. 발렌타인은 뒤늦게 영이와의 나이 차이를 체감하고 이제라도 어른인 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2부 리그 오퍼에 관한 것은 영이가 이 중에서 제일 잘 안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고. 뭐가 됐든 중재할 필요가 없다는 건 잘된 일이다.

확실히 2부 제의를 좀 많이 받아 본 게 아닐 영이와 1부 리그를 뛰고 있는 발렌타인이 고른 팀이면 뭐가 됐든 자신이 고른 팀보다는 더 나을 것 같았다. 약 두 장 분량에 엑스 표가 빼곡하게 채워질 때까지도 인준은 느긋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형, 갈 팀이 없는데요?”

“적당한 팀이 없는 걸 어떡해.”

이윽고 발렌타인이 말했다. 한 발자국 뒤에 서서 구경이나 하던 인준이 급하게 몸을 앞으로 빼면 영이는 조금의 고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이거 그냥 경쟁전에서 만난 딜러 있으면 다 빠꾸 쳐 놨네.”

“아니~ 그 새끼들이 사람이 아닌 걸 어떡하라고.”

“아까 그 세 곳 말고 더 봐 둔 곳은 없어요?”

발렌타인의 손에서 종이를 뺏으면 대문짝처럼 되어 있는 엑스자 표시 말고도 간결한 탈락 사유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준이 파란색 볼펜으로 적어 둔 메모 밑에 오탈자 교정하듯 밑, 혹은 위에 있는 글씨들은 대부분 똑같은 내용이었다. ‘시카고 감독 만나기 힘들 것 같음’. 살짝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보면 영이는 티라미수에 관심을 돌렸고, 발렌타인은 턱을 괸 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준이 들리게끔 한숨을 쉬었다.

“사실 맨 처음부터 가고 싶다고 생각한 곳이 따로 있긴 해.”

따지자면 그곳보다도 더 적합한 곳은 없을 것이다. 종이를 넘겨 어렵지 않게 팀 로고를 찾아낸 인준은 모두가 보이게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살짝 고개만 빼서 로고 밑에 선수들 닉네임을 확인한 영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는 탱커랑 딜러 둘 다 제정신 아닌 곳인데.”

“확실하다고 한다면 여기보다 제대로 된 곳은 없을걸.”

“여기가 뭔데, 화물 맵 최종 경유지?”

“전 시카고 감독이 코치하고 있는 팀.”

턱을 괴고 있던 발렌타인이 대신 대답했다. 전 시카고 감독이라는 말에 인준의 리그 기어가 살짝 풀렸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영이가 눈을 치켜뜨는 것도 잠깐이었다. 포크를 든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을 짚어 표정을 수습한 영이가 다시 차분함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여기에 가면 다른 팀보다는 확실히 만날 것 같은데, 처음 후보에서 왜 뺀 거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좀 덜 됐다고 해야 하나…….”

“왜, 뭔데.”

인준은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모자를 잡아 눌렀다. 설명을 위해 준비된 말들이 이미 입 밖까지 나와 있었으나, 쉽게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 없던 일이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엇보다도 고민하게 만드는 건 눈앞에 있는 존재의 탓이 크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살짝 눈동자만 위로 굴려 눈앞에 있는 상대를 확인하면 여전히 턱을 괸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뭔데, 뭐 때문에 그러는데. 기다림에는 재능이 없는 영이가 입을 다문 인준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심호흡에 가까운 숨을 쉬었다.

“만약에 내가, 떠나간 봄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달라고 구질구질하게 바짓가랑이 붙잡고 빌면 어떡해……? 술 먹고 전화해서 감독님한테 다시 1부로 돌아와 주시면 안 되냐고 연락하면 어떡하냐고.”

“너는 진짜 웬만하면 리그에 관해서 말 얹지 마라. 듣는 사람 개빡치게 만드니까.”

영이는 말과 동시에 잘라 놓은 케이크 덩어리를 포크로 집어 입에다가 들이밀었다. 이거 먹고 닥치라는 뜻이었다. 순순히 입을 벌려 달짝지근하기만 한 빵 덩어리를 입 안에 넣고 나면 영은 다시 발렌타인과 대화를 시작했다.

이미 그 팀으로 가는 것으로 가닥을 정해 놓고 입단 테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이 막힘없이 세워진다. 케이크 조각을 삼킨 뒤에도 얌전히 입을 닫고 있던 인준은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 턱을 괴고, 다시금 발렌타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리그에 미쳐 사는 자신이라지만 전 감독에게까지 그러는 걸 진지하게 고민 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급하게 틀어, 영이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 리그에 미친 놈인 척 굴었던 까닭은 차마 발렌타인을 앞에 두고 그 팀이 불편한 진짜 이유를 말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정확히는 뉴욕으로 오라는 말을 더 이상 농담처럼 하지 못하게 된 놈을 앞에다가 두고, 4년도 더 된 과거에, 김진수 감독으로부터 라이즈 팀 입단 제의를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꺼려졌다.

점수가 좀 높은 유저면 너나 할 것 없이 오퍼 받았던 그때 일을 딱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팀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렇게 의미가 크게 남은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런 제의들을 받았다는 것을 발렌타인에게만큼은 알게 두고 싶지 않았다.

감독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인준이 차마 조력자들에게 꺼내지 못한 변수를 혼자 곱씹던 그때였다.

“너 어디 대회 나가서 상 탄 적 없지?”

“어? 어.”

영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손에서 살짝 턱을 뗀 인준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럼 그냥 기타 경력은 내 서포터 3년 했다고 해.”

“그런 건 커뮤니티에서나 먹힐 커리어고. 차라리 시즌별 점수 쓰는 게 낫지.”

“자소서는 무조건 재미와 특색이 있어야 하는 거 몰라? 그런 당연한 거 써 놓으면 누가 읽겠냐고.”

“형도 그런 거 있으니까 괜찮아.”

진행되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고 있으면 발렌타인이 시선을 맞춰 왔다.

“형 배틀스트라이커 시절이요. 거기서 상위 1% 찍었잖아요. 그거 넣어요. 에임 된다는 소리니까.”

“너 예전에 하던 게임도 쟤한테 다 말해 줬어?”

“그,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영이의 눈이 가늘어진다. 배틀스트라이커 시절은 영이에게도 그렇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가끔씩 늘어지는 매칭 대기를 못 참고 사설 방에 들어가 오디르 전을 할 때, 1:1 히트 스캔 대치 상황에서 나오는 FPS 짬밥을 아주, 아주, 아주 수상하게 여긴 영이가 캐물어 올 때마다 찔끔씩 흘린 게 전부였다.

오픈 시티 출시와 함께 버린 게임을 이제 와서 다시 꺼내서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곳에는 별로 좋은 추억이라고 할 게 없었다. 10년 전에 멈춰 있는 물리 엔진과 운영진이 손을 놓은 핵, 어뷰징들이 판쳐서만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리그를 보면서 완전히 기억에서 잊히던 것들이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 알았을까.

“배틀스트라이커는… 안 한 지 4년이나 지나서 거긴 진짜로 퇴물 됐을 것 같은데.”

실력과 티어를 속이는 기분에 찝찝하게 말했다. 나이를 속일 수 있는지 확인하겠답시고 냅다 편의점으로 달려갈 때조차 잠잠하던 양심은 점수라는 숫자 앞에서만큼은 청렴결백하게 굴었다.

“설마 오픈 시티 리그에서 배틀스트라이커 해 보라고 시키진 않겠죠. 기왕 배틀스트라이커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혹시 그때 뛰었던 선수 중에서 친하게 지낸 사람 있어요?”

“그건 또 왜?”

“알려 주신 닉네임으로 소재 찾는 게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몇 명은 개인적으로 먼저 컨택해 봤거든요. 그런데 감독에 대해서 묻기만 하면 전화를 끊어 버려서요.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화까지 내는 사람도 있고요. 친분이 있으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형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고민이네요.”

인준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하면 발렌타인 역시 막힘없이 읊었다.

“그새 컨택까지 해 봤다고?”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상을 솔직하게 입 밖으로 내뱉으면 발렌타인은 어깨만 으쓱이며 웃었다. 뽐내기보다는 칭찬이 부끄러운 듯한 반응이었다. 이미 영이라는 존재로 서브 딜러들이 과장되게 이런 척, 저런 척하는 것에 익숙했던 인준은 다른 반응을 얹는 대신에 금방 발렌타인의 뒷말로 빠져들었다.

감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입을 다물고 도망치거나, 화를 낸다는 건 별로 좋지 못한 신호였다. 그 와중에도 발렌타인이 접근을 경솔하게 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정하면 다정함과 온화함을 꾸며 내는 건 일도 아닌 놈이었다.

“반응을 보면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 왜 말하기를 거부하는 걸까.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당연히 풀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일들이니까 이제 와서 들쑤시기엔 늦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들은 게임은 취미로만 두고 잘살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선수를 괴롭히는 게 심했을지도.”

“때린 거 아냐?”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어느새 끝부분만 남은 케이크를 먹기 좋게끔 잘라 가던 영이는 여전히 시선을 접시에 둔 채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 감독이, 선수들 때린 거 아니냐고.”

타이밍 좋게 흘러나오던 노래가 끊긴다.

“에이, 근데 이거는 너무, 아 씨발 깜짝아!!”

대수롭지 않게 꺼냈던 이야기였던 만큼,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을 잇던 영이가 크게 놀라 인준의 어깨를 내려쳤다. 상대의 표정 때문이었다.

올라간 눈매에 힘이 들어갈 때면 적당하게 나른해 보이던 얼굴이 정도를 모르고 사나워지고는 했는데, 거기에 실내에서도 벗고 있지 않은 모자 때문에 그늘까지 지니, 당장 사람을 잡아가는 차사라 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기겁하다 못해 질색하면 인준은 한 손으로 급히 얼굴을, 정확히는 눈가를 가리고 사과했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이 어느 땐데 감독이 선수를 때리겠어. 학교에서 선생도 학생을 못 때리는데.”

스피커에서 노래가 다시 이어진다. 흘러나오는 팝송은 시작 구간에 공백이 긴 것으로 꽤 유명한 노래였다. 기겁하느라 마무리하지 못했던 말을 끝맺어도 인준이 손을 내리는 일은 없었다. 혼자서 비운 티라미수 접시를 내려놓은 영이는 팔짱을 꼈다. 내심 언젠가 함께 시카고 경기를 보던 때에 능청을 떨며 즉석에서 콩트를 했던 그때처럼 넘어갈 거라 생각하며 꺼낸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그에 미친 놈에겐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야 그때도 콩트 주제였던 승부 조작이 불법 도박, 스포츠 토토의 형태가 돼서 돌아오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영이는 다시금 진지하게 자신이 꺼낸 말을 되짚었다. 꽤 예민한 주제긴 했다. 정도를 따졌을 때 어쩌면 승부 조작보다 이게 더 심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인준이 이렇게까지 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너 설마 라이스가 감독한테 맞았을 거라고 생각해?”

인준은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모르는 이야기였기에 흘려들었으나 분명 배틀스트라이커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오픈 시티의 라이스에게로 훌쩍 뛰어 버리는 건지. 정도를 모르고 뛰어넘는 사고의 흐름이 조금 궁금했으나, 애초에 그가 이러고 있는 이유가 라이스 때문이 아니던가. 그게 아니어도 인준의 사고가 리그만 관련되면 시속 150km를 뚫는다는 걸 이미 질리도록 체험한 영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감독이 어떤 놈인지는 일단 미뤄 두고, 라이스한테 그런 일이 있었으면 시카고는 벌써 망했을걸.”

테이블 밑 아래로 다리까지 쭉 편 영이가 말했다. 테이블의 테두리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는 영이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그 가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같았다.

그때쯤에 인준은 자수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선수 신분으로 2부에 들어가서 우여곡절 끝에 만난 시카고 감독을 죽인 뒤, 자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이나 발렌타인을 통해 시카고 감독이 벌였던 일들이 모두 세상 밖으로 까발려지고, 참작을 받는 대신에 복역하는 동안 시카고 경기를 챙겨 보게 해 달라고 하자. 면회로 라이스가 오면 거부해야지. 연주에 의해 호적이 파일 수도 있겠다. 언젠가 시카고 감독을 위해 생각해 두었던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 직접 갇히는 것으로 시뮬레이션을 끝낸 인준은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크게 심호흡했다.

선수를 때리고 지금까지 괜찮을 리 없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팀은 물론, 한 게임의 간판이 되는 선수였다. 그뿐일까? 라이스는 팀 구단주가 가장 사랑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애초에 배틀스트라이커 때 선수의 몸에 손을 올렸으면 오픈 시티 리그로는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그게 맞았다. 그게 맞는데, 선수를 향한 폭력이 감독이 원하는 대로 승부 결과를 내는 데 가장 좋은 수라는 생각이 도저히 멈추지 않았다.

관자놀이의 욱신거림이 눌린 이마의 상처 때문인지, 골치 아픈 생각을 그만하라는 몸의 신호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그즈음에 인준은 손에서 얼굴을 들었다.

“아니지?”

영이가 끼어든 그 시점부터 자신과 함께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발렌타인을 보며 말했다. 영이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면 대부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인준이었으나, 지금은 영이보다도 발렌타인의 대답이 필요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는 말이 그에게서 나와야 했다. 누구도 아니고 발렌타인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박하다는 표현에도 부족함 없는 인준의 얼굴에 발렌타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확인해 보고 바로 말해 줄게요.”

“지금 여기서 감독이 선수를 때리는 게 존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하나인 거야?”

“네 말이 틀렸다고 생각 안 해. 단지 시카고 감독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 게 문제인 거지.”

발렌타인의 생각 역시 인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와 다른 생각이 필요했던 인준은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어떤 짐작도 되지 않았다.

“네가 모르면 아니겠지. 내가 널 인정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고, 너 라이스랑 친구라며.”

“그게 왜.”

“맞고 다녔는데 친구가 모르는 게 말이 되냐고.”

“…친구 사이라고 다 말하는 건 아니니까. 너도 형이 2부 리그 뛰려던 거 몰랐잖아.”

발렌타인의 말에 처음으로 영이 입을 다물었다. 찌푸려져도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얼굴이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발렌타인의 입에서 나온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에 완전히 넋 놓고 있던 인준이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든 건 그 때문이었다. 영이가 당장 포크로 발렌타인을 찔러 죽일 것만 같아서.

“네가 한 번만 봐줘, 지금 여기서 가장 심란한 건 쟤일 거니까.”

혼란한 상황에 완전히 휩쓸려 가지 않도록 애써 정신을 붙잡은 인준이 서둘러 목소리를 꾸며 냈다.

“나도 네가 어디서 맞고 다닌 거 숨긴 거 알면 엄청 복잡할 것 같거든.”

“미쳤냐? 넌 내가 어디서 맞고 다닐 애로 보여?”

“예시가 그렇다는 거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던 것과 달리 영이는 그 이상으로 화내지 않았다. 자신이 대충 던진 돌멩이가 두 마리의 개구리를 맞췄으며, 그들이 죽기 직전이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이해해 준 것 같았다. 영이를 달래기 위해 꺼낸 말이 진정시키는 건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의 혼란함이었다. 앞에 앉은 발렌타인은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꼰 다리 위에 팔을 얹고, 또 그 위에 다른 한쪽 팔을 올려 턱을 괸 영이가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더 이상 어떻게 대화를 이어 가야 할지 막막한 정적이었다. 애초에 대화를 이끌어 나갈 힘과 기력, 정확히는 정보를 제대로 처리할 이성이 더 남아 있지도 않았던 인준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된다면 영이는 저녁까지 먹이고 집에 보낼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일찍 집에 보내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시간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허리를 편 인준의 행동에 무언갈 눈치챈 건지, 발렌타인이 테이블 위로 이리저리 퍼져 있던 종이들을 한곳으로 모으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근데 왜 지금 바로 연락 안 해?”

여전히 창가를 보고 있던 영이가 말했다.

“심란하다며. 그럼 빨리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미국 지금 새벽 2시야.”

발렌타인을 대신해서 인준이 말했다. 여전히 창가를 보고 있던 영이가 고개만 반쯤 돌렸다. 턱을 괴고 있는 손끝 때문인지 유독 잘 보이는 오른쪽 눈 밑에 찍혀 있던 점은 무표정한 영이의 인상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올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잠깐이었다.

“난 네가 어디서 맞았다고 들으면 새벽 2시여도 전화할 것 같은데.”

“…….”

“그냥 그렇다고.”

영이의 말을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 다시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나이와 성별을 떠나 영이와는 게임 플레이부터 성격적으로도 굉장히 잘 맞는다고 느끼며, 상대도 그런 친밀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쯤이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넷상으로 이어진 상대와 이렇게 깊고 꾸준하게 관계를 이어온 것은 영이뿐만 아니라 인준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 말고도 영이와의 관계를 친근하게 표현할 말이야 많았는데, 별개로 그녀에게 아껴지고 있다는 걸 직접적으로 표현 받아 본 적 없던 인준이 어색함으로 삐걱거렸다.

기실 소름 한번 쫙 돋고 나면 그럭저럭 삼킬 수 있는 말이긴 했다.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여기는 건, 라이스와 발렌타인의 사이를 의심하는 듯한 말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동창 딜러들의 우정을 비즈니스로 오해하는 사람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영이였다. 자신을 통해 라이스와 발렌타인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을 영이. 그런 동시에, 영이였다. 자신이 놓치는 것까지 빠르게 꿰뚫어 보는 영이. 그녀가 라이스의 마음을 가장 먼저 눈치챘던 과거는 인준에게 있어서 꽤 인상 깊게 남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들끼리 걱정된다고 새벽 2시에 전화하는 일은 낯간지러움을 뛰어넘은 영역이라는 생각과 같은 성별임에도 불구하고 오해받는 친구 사이라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 영이가 이렇게 구는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무엇이든 영이에게 다르게 돌려줄 말은 없었다.

슬슬 만남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이던 손들이 멈춰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지 봐선 안 될 것을 보는 기분으로 슬쩍 고개를 들어 발렌타인을 보면 그는 웃지 않고 있었다. 가식적인 미소가 없는 얼굴이 훨씬 대하기 편하다고 여긴 것이 허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불편함이 밀려온다.

“형도 그렇게 생각해요?”

눈이 마주치면 발렌타인이 입을 열었다. 그가 무엇을 묻는지는 모르고 싶어도 알았다.

“아니, 나야……,”

“그럼 넌 나한테 연락 안 할 거야?”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면 영이가 끼어들었다.

“네가 어디서 맞고 다니는 애로 보이냐며.”

“예시가 그렇다는 거지.”

몇 분 전에 했던 말을 비슷하게 돌려받은 것도 모자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듣게 된 인준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발렌타인이 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빼 들었다. 창가에 비친 모습으로 테이블 상황을 보고 있던 영이가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엄지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던 발렌타인이 곧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어떤 고민도 느껴지지 않는 동작에 어째선지 인준의 손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라이스에게 연락을 취하는 데 저렇게까지 고민이 없을 수 있는 게 가능한 건지, 역시 가까운 친구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제게도 라이스에게 연락을 취하는 데 어떤 고민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게 뒤늦게 떠오른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쯤, 발렌타인이 귀 옆에 갖다 대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자고 있나 봐요.”

묘한 안도감으로 숨을 쉬는 것도 잠깐이었다.

“네가 해 봐.”

“내가?”

인준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안심해야 하는 건지, 아쉬워야 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고 있으면, 어느샌가 턱을 괴느라 굽었던 허리를 펴고 양손을 자유롭게 한 영이가 옆구리를 찔러 왔다.

“형 곤란해하잖아.”

“리그에 미쳐서 팔자를 꼬아도 무릎까지 꼬아 놓은 새끼가 곤란한 건 잘 모르겠고, 친구 전화는 걸러도 이 새끼 전화는 받을 건 너도 아는 거 아냐?”

“무, 무릎까지 꼬았다니… 영아.”

“닥치고 있어 봐.”

미약하게 목소리를 냈던 인준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왜 갑자기 이 일에 적극적으로 구는 건데. 이것도 재밌어 보여서?”

발렌타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더 이상 다정함을 꾸며 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영이는 이미 오래전에 웃음을 잃은 상태였고.

“그럼 나도 하나 묻자, 말도 안 되는 가정에 얼굴색 바뀐 사람들이 누군데 왜 자꾸 질질 끌어?”

“서로가 마음에 안 들어도 상대가 맞는 판단을 하면 일단은 따라가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너를 또 오해했나 보다.”

“너 자꾸 그렇게 말 빙빙 돌려서 아닌 척 상대 엿 먹이는데, 누군 못 하는 줄 아냐?”

“할 줄 알아?”

“그전에 뭐 하나만 더 대놓고 물을게.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라이스 친구라는 새끼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리그에 미친 새끼랑,”

“얘들아! 전화할게. 하면 되잖아!”

인준이 다급하고도 과장된 몸짓으로 가방 안에 처박아 둔 휴대폰을 찾아 꺼냈다. 누구 하나가 상대 머리채를 잡고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대화가 뚝 멈췄다. 손가락에 박히는 유리 조각도 신경 쓰지 않고 화면을 넘겨 다급하게 번호를 찾아 눌렀다. 슬슬 높아지는 남녀의 목소리에 모이던 사람들의 시선들이 그제야 흩어진다.

여유로워 보여도 꽤 열받은 것 같은 영이는 아예 죽일 듯이 상대를 노려봤고, 발렌타인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러나 인준은 더 이상 그곳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라이스에게 전화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영의 말이 다 맞았다. 제 팔자는 리그에 미쳤다가 이렇게까지 꼬인 팔자였다. 영의 말 중에서 틀린 건 저가 무당보다 용하다는 말이었다. 제 앞길 모르는 무당이라는 뜻이라면 또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서둘러 건 연결음이 길어진다. 7월에 오고 가던 연락으로 그의 수면 패턴이 매우 일정하며, 보통 늦은 새벽까지는 깨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인준은 그가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도 받았으면 하는 건지, 아니었으면 하는 건지 도통 서지 않는 마음을 정하는 걸 미뤄 놓고 나면, 부재중 연락에 대한 변명거리를 떠올리기 바빴다.

무엇이든 실수로 그랬다는 말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딱히 할 말이 없는데도 그랬다. 차라리 그럴듯한 명분을 준비해 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라이스가 자신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도 연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실시간으로 제 연락을 확인해 놓고서 아직도 답장 하나 없었다.

어쩌면 지금도 자신의 전화라서 안 받는 걸지도. 직전에 마찬가지로 연락이 씹힌 발렌타인을 앞두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면, 입가의 근육이 굳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자신을 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인준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허리를 폈다. 그나마 모자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다.

“내 전화도 안 받는데, 역시 자나 봐.”

길어지는 연결음에 손가락을 액정에 갖다 대던 그때였다.

-…인준이 형?

라이스가 전화를 받았다.

인준이 휴대폰을 얼굴에서 치우며 펄쩍 뛰었고, 영이는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인준을 진정시키려 했으며 발렌타인은 테이블에 올린 손으로 턱을 괴어 입가를 가렸다. 생각보다 훨씬 멀쩡한 목소리에 오히려 허둥거리게 되는 건 카페에 있는 셋이었다. 반응을 보아하건대 네 전화는 받을 거라던 영이도 길어지는 연결음에 착신을 포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이크에 다른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손으로 틀어막은 인준이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다. ‘뭐라고 말해?!’ 마찬가지로 영이가 뻐끔거렸다. ‘지금 얘랑 뭐 하려고 전화했냐? 맞았냐고 물어봐!!’ 미약한 말소리가 들렸으나 그것도 성대에서 진동이 완벽히 제거된 볼륨이었다. ‘다짜고짜 그러면 이상하잖아.’ 제거된 소리 대신 몸짓을 크게 하며 의사소통을 시도하면 영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흰자가 다 보이게 눈을 떴다.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내숭 떨면서 개구라치는 거! 어떻게 두 개 잘 엮어서 해 봐!’ 라이스에게 그야말로 밥 먹듯이 거짓말해 왔으나 내숭은 떨어 본 적 없었던 인준이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조언을 얻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돌리면 발렌타인은 좌우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저었고, 그게 전부였다. 무언갈 부정하는 건지, 뭐든 하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목을 앞으로 빼 봐도 발렌타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웃긴 꼴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떠오르는 시나리오들은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애초에 누구한테 맞았냐고 자연스럽고도 진지하게 물을 방법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나? 뭐든 간에 대화 중에 그게 나오는 건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 아닌가? 지금 우리 사이가…… 그 정도로 가깝긴 한가?

“야, 전화 끊기겠어.”

-형, 많이 바빠요?

말이 겹쳐 울렸다. 영이 살짝 목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라이스가 말한 것이다. 영이는 눈을 크게 뜨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고, 그런 영이만큼 크게 눈을 뜬 채로 그녀를 마주 본 인준은 덩달아 숨을 참았다. 곧장 물음이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간신히 들키지 않았다는 것을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그때도 발렌타인은 여전히 손으로 얼굴 반이 다 가려지게 턱을 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영이나 인준이나 신경 쓸 수 없었다.

“바, 쁜 건 아냐. 아니, 하나도 안 바빠. 시간 많이 있고, 남기도 많이 남아서… 그래서, 연락한 건데…….”

더 이상 답변을 미루면 진짜로 수상하게 보일 것을 안 인준이 입을 열었다. 조급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듯 평소보다 빠르게 나간 목소리 끝은 몇 번 손을 휘젓는 걸로 사라질 법한 연기만큼이나 힘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지난번에 씹힌 연락에 대해서 의연하게 굴어야 한다는 걸 알았고, 그걸 잘 해낼 자신도 어떻게든 끌어왔으나 문제는 자연스럽게 폭행 사실에 관해 묻는 일이었다.

질문을 그럴듯하되 농담이나 변명으로 넘길 만한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서 내는 것도 일인데, 그렇게 물어서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돌이켜 보면 라이스는 속사정이나 안고 있는 고민, 혹은 문제에 대해 깊게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괜찮다고 말했고, 인준이 어떻게든 빠른 눈치로 그가 앓고 있는 문제를 파악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막히면 언제나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친구 놈을 만나러 갔고.

눈에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던 힘이 슬슬 풀리면서 과부하가 올 정도로 돌아가던 머리가 한순간 차갑게 식는다.

“…있잖아, 준혁아. 너 혹시,”

-형, 그럼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어?”

-먼저 끊을게요.

“어, 어……. 하긴 거기가 많이 늦긴 했으니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끝이 올라갔던 인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전화가 도중에 끊겼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얼굴에서 휴대폰을 내린 인준이 어느샌가 아래로 내려갔던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앙다문 영이가 눈을 깜빡이며 눈치를 봤고, 발렌타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실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도 인준의 전화를 먼저 끊는 라이스 같은 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인준은.

* * *

발렌타인<<<이새끼 진짜 어디감???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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